[박광규의 미스터리 산책]무인도에 간다면 가져가고 싶은 책은?

‘아무것도 없는 무인도에 혼자 오랫동안 있는다’는 것이라면, 너무나 재미있어 순식간에 읽어버릴 책보다는 그다지 재미가 없어도 오랜 시간 동안 천천히 읽을 책을 고르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여름’ 하면 더위와 함께 휴가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여름휴가’ 하면 바다가 머리에 떠오른다. 또 ‘여름은 추리소설의 계절’이라는 말이 있다. 이 광고 문구와도 같은 구호(?)가 누구의 머리에서 처음 떠올려진 것인지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1960년대의 잡지 여름호(대개 7월, 8월호)에도 ‘납량특집’이라는 타이틀 아래 단편 추리소설들이 실렸던 것을 보면 분명 꽤 오래된 것임에는 틀림없다. 요즘도 별로 다를 바가 없어서 여름이면 신문이나 잡지에 ‘여름에 읽을 만한 추리소설’을 소개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휴가지로 떠날 때 제법 긴 시간 동안 기차나 고속버스 등을 타고 가자면 따분해지기도 하는데, 그 따분함을 달래기 위해 추리소설을 한 권 들고 읽는 것이 여행의 즐거움이기도 하다.

남서태평양에 있는 뉴칼레도니아의 한 무인도

휴가지에서 읽기 적당한 추리소설
다만 휴가지에 도착하면 책을 읽을 틈이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다. ‘기왕 멀리까지 여행을 왔으니 가족·친구와 함께 재미있게 놀아야지 무슨 책이냐…’ 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성수기 해수욕장의 분위기라면 번잡해서 글씨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것임에 틀림없다.

반면 한적한 곳에 있다면 책을 읽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다. 서양 사람들은 휴가지에 책을 가져가 해변에서 일광욕을 하는 동안 읽곤 한다. 이럴 때 읽는 책은 대개 추리소설 등이 많다. 만약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에라도 간다면, 더욱 책 읽을 시간은 많아질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인도에는 어떤 책을 가져가야 할까?

엘러리 퀸의 짤막한 글들을 모아 놓은 <퀸의 거실에서>라는 책을 보면 ‘무인도에서 읽을 것’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미국 추리소설의 왕’ 엘러리 퀸과 ‘밀실의 제왕’ 존 딕슨 카는 뉴욕에 살 때 서로 집이 가까워서 자주 찾아갔다고 한다. 특히 카의 서재는 낡은 벽난로, 벽에 걸린 오래된 칼, 영국산 안락의자 등이 있어서 마치 평화롭고 쾌적한 사교 클럽에 온 것 같았다고 퀸은 회상한다. 그러던 어느 날 평상시처럼 저녁에 만난 두 사람은 밀실에 대한 이야기에 열중한다. 이 때 퀸에게 갑작스럽게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그가 발간 중인 잡지 <엘러리 퀸즈 미스터리 매거진>에 ‘유명한 추리소설가가 좋아하는 추리소설’이라는 코너를 연재하면 어떨까 하는 것이었다. 카는 “좋은 생각이긴 하지만, 훌륭한 작품은 여러 사람에게 선택될 가능성이 많은데 중복된 소개는 의미가 없지 않을까…” 하는 의견을 제시했다. 퀸은 일단 카에게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편 추리소설을 열 작품을 이야기해보라고 했고, 그에 따라 즉석 단편집 구상이 시작됐다.

(왼쪽부터)토머스 버크 <오터몰 씨의 손>이 수록된 단편집 표지, 유메노 규사쿠 <도구라 마구라>(1935) 표지

카가 고른 작품으로는 첫 번째로 코난 도일의 홈즈 시리즈 중 하나인 <입술이 뒤틀린 남자>, 뒤이어 G.K.체스터튼의 <통로에 있었던 사람>, 토머스 버크의 <오터몰 씨의 손>, 재크 푸트렐의 <13호 독방의 문제>, M.D.포스트의 <대암호>, 앤소니 버클리의 <우연의 심판>, 리처드 오스틴 프리먼의 <알루미늄 단검>, 브렛 할리데이의 <인간의 관심 물건>, 윌리엄 호지슨의 <보이지 않는 물체>. 마지막으로 고를 작품이 하나 남게 되자, 카는 마치 호랑이처럼 방을 빙글빙글 돌다가 로널드 녹스의 <동기>를 선택했다.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을 하나도 고르지 않은 이유를 묻자, 카는 ‘포의 작품은 특별하기 때문에 감히 이 목록에 넣을 수 없다’고 답했다.

이 아이디어는 점점 커져서, 얼마 후 퀸은 여러 명의 지인에게 편지를 보내 역대 단편 추리소설 베스트 선정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곧 ‘쓸데없는 생각’, 혹은 ‘고를 자격이 없는 것 같다’는 답장이 돌아왔다. 그 중에는 ‘무인도에 혼자 머물러야 할 때를 위해 생각해볼 만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작가, 평론가, 출판편집자, 추리소설 전문서점 경영자, 그리고 독자 등 열두 명이 각각 열두 작품을 골랐다. <오터몰 씨의 손>이 12명 중 8명에게서 표를 얻어 최고 득표를 했다. 포의 <도둑맞은 편지>·도일의 <붉은 머리 연맹>·버클리 <우연의 심판> 등이 6표, <13호 독방의 문제>와 로버트 바의 <건망증 클 럽>이 5표, 체스터튼의 <보이지 않는 사람>·포스트의 <나보테의 포도원>·H.C.베일리의 <노란 민달팽이>·E.C.벤틀리의 <진짜 기사의 옷> ·올더스 헉슬리의 <지오콘다의 미소>·도로시 세이어즈의 <의혹> 등이 3표를 얻어 모두 열두 작품이 선정됐다. 퀸은 이 작품들에 ‘황금의 12’라는 명예로운 호칭을 부여했다.

존 딕슨 카(왼쪽)와 엘러리 퀸 (1947년 에드거상 시상식에서)

일본에서는 실제로 설문조사 벌여
퀸에게 보낸 누군가의 답장처럼, 이 정도의 걸작이라면 무인도에 혼자 머무를 때 읽으면서 시간을 보내기에는 충분하다.

한편 일본에서는 무인도에 가져가고 싶은 추리소설 설문조사를 벌인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설문의 결과는 앞에 언급했던 퀸을 비롯한 선정단의 투표와는 매우 다른 양상을 보인다. 어떤 사람은 아예 ‘너무 많아서 고를 수가 없다’는 답을 했고, ‘00출판사의 추리소설 전집’을 통째로 들고 가겠다는 욕심 많은 답변도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유메노 규사쿠의 <도구라 마구라>나 오구리 무시타로의 <흑사관 살인사건>등이 많은 표를 얻었다. 그런데 아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 두 작품에 대해 솔직히 평가하자면 아무리 좋게 말하려 해도 흥미진진해서 술술 읽힌다는 말은 할 수가 없다. 일본의 추리소설 연구가인 후지와라 사이타로는 이 두 작품이 ‘일본 추리소설 베스트’ 설문조사를 하면 단골로 순위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다. 후지와라 자신조차 두 번 세 번 읽으려 도전했지만, 결국 복잡한 내용 탓에 지겨워져서 끝까지 읽는 데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설문에 답한 사람들도 제대로 읽지 않고 과거의 명성에 이끌려 무책임하게 투표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박광규의 미스터리 산책

다만 ‘무인도에 가져가고 싶은 책’이라는 전제 아래에서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설문을 받은 사람들의 기본 전제가 ‘아무것도 없는 무인도에 혼자 오랫동안 있는다’는 것이라면, 너무나 재미있어 순식간에 읽어버릴 책보다는 그다지 재미가 없어도 오랜 시간 동안 천천히 읽을 책을 고르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퀸의 글 제목이 ‘무인도에서 읽을 것’이긴 하지만, 진짜로 무인도에 가져갈 작품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가장 뛰어난 작품을 고르는 설문이라는 점에서 답변에 큰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사실 아무것도 없는 무인도에서 한참 머물러야만 한다면 아무리 지루한 작품이라도 재미있게 읽을 것 같긴 하다.

<박광규 추리소설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