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규의 미스터리 산책]공포소설 거장 스티븐 킹, 추리소설에도 일가견

사실 공포소설은 독자의 손에 땀을 쥐게 한다는 점에서 추리소설과도 비슷한 점이 많으니 킹의 변신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을 수도 있다. 여성 작가들 중에는 로맨스 소설을 쓰다가 추리소설가로 변신하기도 한다.

대중소설가라면 독자의 취향에 맞춰 쓰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추리소설도 잘 쓰고, 로맨스도 잘 쓰고, 판타지도 잘 쓰고, 기타 등등 모두 잘 쓴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는 않다. 대개 한쪽 분야에 집중하게 마련이다. 어쩌다 ‘비전문’ 분야에 뛰어들었다가 핀잔을 듣는 경우도 있지만, 오히려 새로운 방향이 적성에 맞아 ‘전향’하는 작가도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해에는 어느 유명 공포소설 작가가 추리소설 분야에 뛰어들어 다음과 같은 줄거리의 작품을 발표했다.

‘40년간 경찰에서 근무하다가 퇴직한 호지스. 아내와도 이혼하고 혼자서 아무런 의욕 없이 TV만 보며 시간을 보내던 그에게 익명의 편지가 날아온다. 보낸 이는 호지스가 말끔하게 해결하지 못했던 사건(누군가가 메르세데스 승용차를 몰고 사람들에게 돌진해 여덟 명의 희생자를 냈던 사건)의 범인이라 자칭하면서 그를 조롱하는 내용이었다. 이 ‘도전장’으로 사그라져가던 수사관 본능이 되살아난 호지스는 옛 감각을 되살린다. 이제는 경찰 신분이 아닌 상태에서 과거 사건의 재검토에 착수한다.’

스티븐 킹 <미스터 메르세데스> 표지

미국 추리작가협회 거장상 받기도
최근 출간된 <미스터 메르세데스>는 플롯 상으로 보면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추리소설이다. 이 소설을 쓴 사람이 ‘스티븐 킹’이라 하면 고개를 갸우뚱하거나 ‘아니, 이 사람은 무서운 소설을 쓰는 작가 아니었어?’ 하는 반응을 보일 사람도 제법 있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스티븐 킹은 대중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들에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는 작가이다. 초능력을 지닌 왕따 소녀의 비극을 그린 데뷔작 <캐리> 이래 그의 작품은 많은 사람들의 밤잠을 설치게 했다. <세일럼스 롯>의 흡혈귀, <샤이닝>의 귀신들린 호텔, <그것>의 끔찍한 피에로, <크리스틴>의 저주받은 자동차 등 세상에 없을 듯한 무서운 것들을 천연덕스럽게 내세웠다. <미스터 메르세데스>에서는 그런 초자연적 존재가 등장하지 않는 대신 노련한 수사관과 머리는 좋지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악당이 등장한다. 애거서 크리스티처럼 ‘용의자 대여섯 명 중 범인은 누구일까?’ 하는 수수께끼 풀이 형식의 작품이 아니다. 초반부터 범인을 알려주고 그의 동선과 심리상태를 묘사하면서 서스펜스를 극대화하고 있다.

킹은 2007년에 미국 추리작가협회의 거장(grand master)상을 받은 경력이 있다. 그것은 그의 작가로서의 경력에 대한 경의였다. 직업적 수사관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본격적인 추리소설을 쓴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전에 중편 <쇼생크 탈출>이나 <스탠 바이 미> 등으로도 충분히 독자들의 마음을 흔들었던 경력이 있는 만큼 마음만 먹으면 ‘초자연적인 무서운 것’이 나오지 않는 추리소설을 쓸 수 있을 능력이 충분했을 것이다. 2013년 발표한 <조이랜드>는 유령이나 초능력 등의 초자연적 현상이 나오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연쇄살인범 추적이라는 추리소설적인 구조도 가지고 있다.

스티븐 킹은 <미스터 메르세데스>로 에드거 상(미국추리작가협회상) 장편부문 상을 수상했다. 이 정도면 그가 추리소설가로서도 연착륙했다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역대 수상자를 살펴보면 1996년 수상자인 딕 프랜시스(당시 76세) 다음의 두 번째 고령(68세)의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스티븐 킹의 추리소설은 아직 하나밖에 없으니 ‘전향한 작가’의 좋은 예로 삼기는 좀 어색하다. 하지만 호지스가 등장하는 작품을 3부작으로 완성할 예정이라니 ‘추리소설가 킹’의 앞날은 매우 기대된다.

(왼쪽부터)재닛 에바노비치, 코난 도일의 역사소설 <마이카 클라크>, 노바라 노에미(기리노 나쓰오의 필명)의 로맨스 소설 <밀피유 보이> / 출처 : 위키피디아

사실 공포소설은 독자의 손에 땀을 쥐게 한다는 점에서 추리소설과도 비슷한 점이 많으니 킹의 변신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을 수도 있다. 여성 작가들 중에는 로맨스 소설을 쓰다가 추리소설가로 변신하기도 한다. <원 포 더 머니>, <사라진 24개의 관> 등을 발표한 미국 여성작가 재닛 에바노비치가 대표적이다. 30대의 나이에 소설을 써 보겠다는 결심을 한 에바노비치는 10년간 세 편의 미국 역사소설을 탈고했으나 모두 출간에 실패했다. 주위의 권유에 따라 로맨스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매력적인 등장인물들과 특유의 유머가 깔린 그의 작품은 상업적으로 성공해서 나름대로 유명작가가 됐다. 자신의 작품이 ‘로맨틱한 모험소설’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그는 로버트 드 니로 주연의 영화 <미드나이트 런>을 보고 여성 현상금 사냥꾼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을 구상한다. 1년간의 작업 끝에 ‘얼떨결에 현상금 사냥꾼이 된’ 스테파니 플럼이 등장하는 <원 포 더 머니>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독자들에게 대단한 호평을 받음과 동시에 에드거 상, 애거서 상, 앤소니 상, 매커비티 상, 셰이머스 상 등 영어권의 주요 추리문학상 신인 장편 부문 후보에 올랐고, 영국추리작가협회상 신인 장편 부문상을 수상했다. 에바노비치는 올해 72세이지만, 스테파니 플럼 시리즈는 스물두 번째 작품이 나올 예정이며 로맨스 소설도 여전히 발표하고 있다.

코난 도일의 애초 꿈은 역사소설가
일본에도 로맨스 소설을 쓰다가 추리소설로 전향한 여성작가가 있다. 작품마다 ‘세상은 절대 장밋빛 희망이 넘치는 곳은 아니다’라고 느끼게 해주는 기리노 나쓰오 역시 처음부터 추리소설가로 시작하지는 않았다. 결혼 후 일종의 부업처럼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는 지금 작품 분위기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로맨스 소설을 선택했다. 1984년에 발표한 데뷔작 <사랑의 행방>은 제2회 산리오 로맨스 상(賞)의 가작을 받았으니 성공적인 출발을 한 셈이다. 이후 로맨스 소설뿐만 아니라 노바라 노에미라는 필명으로 청소년 소설을 발표했다. 약 10년 동안 18편을 발표(1989년에는 무려 6권이나 출간했다)하며 로맨스 소설가로서 활동했다. 그러나 1993년 첫 추리소설인 <얼굴에 흩날리는 비>로 에도가와 란포상(일본의 신인 추리작가상)을 수상하면서 ‘추리소설가’라는 호칭이 붙게 되었다. 그녀는 더 이상의 로맨스·청소년 소설은 발표하지 않았다. 절판된 옛 로맨스 작품은 비싼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박광규의 미스터리 산책

반면 추리소설가로 대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다른 분야로 전향하는 데 실패해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던 작가가 있다. 코난 도일은 애초 역사소설가로서 성공하고 싶은 꿈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셜록 홈즈 시리즈 첫 작품인 <주홍색 연구>를 발표한 후, 역사소설에 관심이 많아져 <마이카 클라크> 등을 발표했으며, 평생 동안 자신의 작품 중 역사소설이 가장 낫다고 생각했다. 그가 역사소설만 써서 성공했다면, 홈즈라는 기념비적 인물이 탄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또한 세계의 추리문학계가 어떻게 변했을지 알 수 없으니, 그의 실패는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박광규 추리소설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