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규의 미스터리 산책]부모만한 자식 작가 없다

미국에는 대를 이은 추리소설가가 드문드문 나오기는 했다. 일본 추리문학계에는 유명 작가의 2세 작가가 별로 없다는 것이 묘한 점이다. 기껏해야 합작이라는 이름 아래 발표하거나 유작을 완성하는 데 그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올해 들어 ‘부모 잘 만나 자기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성공해서 풍족하게 사는 사람’을 의미하는 ‘금수저’라는 단어가 유행어가 되고 있다. ‘개천에서 용이 나오던’ 과거와는 달리 명문학교에서부터 고급 직업에 이르기까지 ‘금수저’들이 거의 차지하고 있다. 물론 대부분 정당한 과정을 거치겠지만 재산과 권력을 이용한 편법이 너무 자주 보인다. 보통 사람들은 자조적으로 ‘우리는 흙수저’라는 말을 뇌까릴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대기업 총수, 정치인이나 고위 공직자의 가업(?)을 이은 2세가 논란을 일으킨 사례는 누구나 기억 속에서 하나쯤은 떠올릴 수 있을 터이니 굳이 예를 들 필요도 없을 것이다.

부모의 후광으로 쉽게 성공하는 것을 ‘금수저’라고 정의했을 때 추리소설가는 예외인지, ‘금수저 작가’는 전 세계를 둘러보아도 찾기 어렵다. 작가로서도 높은 평가를 받으면서 엄청난 수입까지 올린 추리소설가는 손으로 꼽기 힘들 정도로 많지만, 그들의 자녀들 중에서 대를 이어 직업적 추리소설가가 된 사람은 별로 없다. 성공한 2세들은 그보다 훨씬 적다. 독자의 호평은 인위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에드거 월러스

홈즈 애호가들 반감 산 코난 도일의 아들
얼마 전 미국의 출판전문잡지 <퍼블리셔스 위클리>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기사 제목은 ‘피로 쓴 글(Written in Blood)’. 누군가 의분에 넘쳐 쓴 혈서(血書)라거나 피가 줄줄 흐르는 공포소설을 다룬 것은 아니다. 유명 추리소설가와 그 대를 이은 2세 추리소설가들에 대한 글이다. 기사는 메리 히긴스 클라크와 캐롤 히긴스 클라크 모녀, 토니 힐러맨과 앤 힐러맨 부녀, 제임스 리 버크와 알라페어 버크 부녀, 아이리스 요한슨과 로이 요한슨 모자, 조너던·페이 켈러맨 부부와 아들 제시 켈러맨 등 다섯 가족을 소개하고 있다.

부모 작가들은 20세기 후반 활약하며 거장 반열에 올라 있다. 짧게는 30년에서 길게는 50년 이상의 경력과 인기만으로도 그렇지만 토니 힐러맨과 메리 히긴스 클라크, 제임스 리 버크는 미국 추리작가협회가 수여하는 거장상(그랜드마스터)을 받은 바 있다. 하지만 그들의 2세들은 캐롤 히긴스 클라크를 제외하고 모두 21세기에 등단한 젊은 작가들인 터라 아직은 부모 명성의 그림자 밖으로 벗어나지는 못한 것 같다.

그래도 이 기사에 실린 작가들은 나름대로 입지를 쌓아가고 있는 중이다. 부모를 넘지 못한 2세 작가들도 종종 볼 수 있다.

켈러맨 가족(맨 왼쪽이 아들 제시, 한사람 건너 조너던·페이 부부)

코난 도일의 아들 에이드리언 도일은 아무래도 아버지 덕택에 윤택하게 살아간 인물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위키피디아를 보면 그의 직업은 자동차 레이서, 사냥꾼, 탐험가, 작가로 되어 있다. 자신이 아버지의 문학적 재능을 이어받았다고 여긴 그는 홈즈 시리즈를 이어서 쓴다면 베스트셀러를 넘어 역사에 남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존 딕슨 카와 함께 <셜록 홈즈 미공개 사건집>을 완성한 뒤, 그는 이 작품을 패러디가 아닌 정규 시리즈라고 공인한다. 본인이 코난 도일 재단의 운영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이런 행동은 작품성을 떠나 홈즈 애호가들의 반감을 샀고, 그는 더 이상 소설을 쓰지 않았다.

20세기 초반 영국 최고의 인기작가로 군림했던 에드거 월러스의 부유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한때 영국에서 팔리는 책 4권 중 하나가 그의 책이었다고 한다. 런던 교외에 컨트리 하우스(가사 도우미만 20명)를 소유한 그는 런던에 나갈 때는 호텔의 스위트룸을 잡아 가족과 머물렀다. 호텔 식당을 몽땅 빌려 200명 규모의 저녁 연회를 열고, 경마에도 돈을 물 쓰듯 썼다고 한다. 월러스는 생전에 5000만권 이상의 책을 팔았다고 하니 진정한 금수저 집안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능력은 반드시 이어지지는 않는 것인지, 그의 장남 브라이언 에드거 월러스도 아버지와 비슷한 스릴러 소설을 썼지만 전혀 인기를 얻지 못했다. 결국 자신의 작품 대신 아버지의 작품을 각색하는 작업으로 이름을 남기는 데 그치고 말았다.

아버지 코닐리어스 그래프튼에 안긴 수 그래프튼

그나마 미국에서는 대를 이은 추리소설가가 드문드문 나오기는 했다. 일본 추리문학계에는 유명 작가의 2세 작가가 별로 없다는 것이 묘한 점이다. 기껏해야 합작이라는 이름 아래 발표하거나 유작을 완성하는 데 그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부부 작가는 종종 있어서 우리나라에도 이름이 알려진 사람을 꼽자면 현역 작가 중에는 아야츠지 유키토와 오노 후유미 부부, 누쿠이 도쿠로와 가노 도모코 부부, 오리하라 이치와 니츠 키요미 부부가 있다. 이들 사이의 자녀들이 작가가 되었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 어쩌면 너무 유명해진 나머지 그것을 뛰어넘는 것이 어려운 일이 되어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몰락한 명문가의 딸
반대로 부모가 작가로서 크게 성공하지 않았다면 부담도 적을 것이다. 미국 추리작가협회장을 역임했으며, 여성 사설탐정 킨지 밀혼을 주인공으로 한 알파벳 시리즈 스물네 번째 작품 를 올해 발표한 수 그래프튼은 역시 추리소설가였던 아버지 코닐리어스 그래프튼의 인기를 훌쩍 넘어선 지 오래다. 아마 유명 추리소설가들 중에는 부모가 ‘작가 지망생’이었던 사람도 꽤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해본다.

일본의 노벨상 수상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몰락한 명문가의 아이가 소설가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는데, 공교롭게도 어느 유명 여성 추리소설가의 상황에 정확하게 들어맞고 있다.

애거서 크리스티 부녀

19세기 말, 뉴욕에 살던 프레드릭 밀러는 그의 영국인 아내와 함께 영국으로 건너가 토키에 정착했고, 120명 정도가 넉넉히 춤을 출 만한 식당이 있을 정도로 커다란 저택에서 살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사업을 하던 그는 영국으로 와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의 조부에게서 받은 유산을 투자가에게 맡겨 일하지 않고도 지낼 만큼 충분한 수입이 있었기 때문이다. 훗날 그의 딸이 자서전에서 아버지의 일과를 기록했는데,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다. ‘아침에 일어나면 클럽에 갔다가 집에 돌아와 점심식사를 하고 다시 클럽으로 가서 카드놀이를 하다가 저녁 만찬을 위해 집으로 돌아온다. 매주 집에서는 대규모 만찬이 열리고, 또 다른 집의 만찬에 간다. 크리켓과 아마추어 연극은 또 다른 취미였다.’

딸이 열한 살이 되던 해, 프레드 밀러는 심장병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다. 집안형편은 갈수록 어려워졌고 결국 정든 집을 떠나야만 했다. 소녀는 성장해서 병원 외과병동의 간호사로 일하면서 추리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 원고는 대여섯 곳의 출판사에서 거절당하다가 ‘가능성이 있을 것 같다’는 평가를 받고 4년 만에 출간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50여년 동안 추리소설을 썼는데, 영어권에서만 10억권이 팔리면서 ‘추리소설의 여왕’이라는 명예로운 호칭을 얻었다.

박광규의 미스터리 산책

그녀의 이름은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애거서 크리스티. ‘만약’이라는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그녀가 금수저를 잃지 않았다면 세상에 ‘푸아로’나 ‘미스 마플’이 등장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박광규 추리소설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