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된다는 것](10) 일하는 즐거움과 타인의 인정, 나 자신의 변화

몇 달 전, 한 직장인이 상담을 청해왔다. ‘번아웃 증후군’인 것 같다면서 증상을 호소했다. 상담자는 20년 넘게 유능한 직장인이었고, 충분한 대우를 받고 있었다. 최근 들어 여러 직업군에서 번아웃, 소진 등의 말이 자주 들려오고 필자도 관련 강의를 의뢰받는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인간에게 직업은 삶의 주요 요소이고,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엔 교육에서부터 삶의 목표까지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다. 그런 직업에서 내가 비워지고 소진된다면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매우 난감해진다. 과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능력을 십분 발휘하고 충분한 보상을 받는데도 문제가 된다면 말이다.

먼저 우리는 어떻게 일을 하게 되었고, 일이 어떤 가치를 갖고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인류 역사의 차원이 아니라 한 개인의 차원에서 말이다. 인간은 무능력하게 태어난다. 때문에 모든 것을 다른 사람에게 요청해야 한다. 인간의 삶은 누군가(흔히 부모)에게 필요한 것을 달라고 하면서 시작된다.

‘번아웃 증후군’에 빠진 유능한 직장인

그런데 한 가지 특이점이 있다. 유일하게 아이가 요청받는 게 있는 것이다. 바로 똥이다. 위생개념이 있는 사람은 갓난아기 때부터 동물과 다른 방식으로 배설한다. 기저귀에 배설하면 부모가 가져가는 방식. 프랑스의 정신분석가 라캉은 프로이트가 주목한 ‘항문기 대상’에 대해 부모와 아이 사이에 오가는 ‘요구’와 ‘응답’의 차원을 덧붙인다. 건강과 직결되는 아이의 똥에 부모는 다양하게 반응한다. “잘 쌌다”고 칭찬하기도 하고, “왜 안 싸지?”라며 기다리기도 하고, “드디어 쌌다”며 기뻐하기도 한다.

아이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유일한 생산물인 똥은 그렇게 부모에게 의미 있는 것이 된다. 아이는 똥을 참아서 부모를 좌절시킬 수도 있고, 제때에 배설해 만족시킬 수도 있다. 게다가 프로이트가 지적했듯이 배설의 자극은 아이에게 쾌락을 제공하기도 한다. 요컨대 똥은 무능력한 아이가 스스로 즐기면서 동시에 능력자가 되게 하는 최초의 것이다.

배변훈련은 아이의 최대 난관 중 하나다. 그렇게 소중한 똥을 이제는 부모에게 주지 못하고, 변기에 버려야 한다. 또한 맘대로 배설하는 기쁨을 포기하고 규율에 맞추어야 한다. 그럼 이제 아이는 어디서 기쁨을 찾고 자신의 능력을 뽐내야 할까?

이때부터 다른 것을 만들어내야 한다. 아이는 말을 하고, 춤을 추고, 노래하게 된다. 모두 아이가 타인의 요청을 받아 자신의 몸을 이용해 만들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똥과는 달리 외부의 것을 배우고 익혀서 하게 된다. 아이는 그것을 재미있게 즐기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선사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아이가 변화한다. 즉 말할 줄 알고, 춤출 줄 알고, 노래할 줄 아는 아이가 된다. 똥을 대신하는 아이의 새로운 생산물은 타인의 요청에 응하고 스스로 즐기는 것이라는 점 이외에 배운 것을 이용해 스스로 변화(발전)한다는 요소를 겸비하게 된다. 바로 그 새로운 생산물이 학창시절에는 공부, 성인이 되어서는 일로 이어지게 된다.

어른이 되면서 얻는 것도 많지만, 잃는 것도 많다. 일하는 어른은 생각해봐야 한다. 내가 일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 중에 잃은 것은 없는지. 일하면서 이룰 수 있는 것들에서 특정 요소만 실현되고 다른 요소가 버려지면 일이 내 삶을 지탱해주는 대신 갉아먹을 수 있다.

상담자의 사례로 돌아와 보자. 직장에서 그가 한 일은 타인의 요청에 응답하는 것이었다. 일하는 즐거움이 없지 않았고, 보상으로 받는 급여를 통해 많은 것을 누렸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펴본 일이 가진 요소를 거의 다 만족한 셈이다. 사실 필자의 상담자와 달리 일하면서 즐거움을 얻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억지로 일하거나 그럼에도 충분한 보상을 못 받는 경우, 필수 요소인 즐거움이 빠져버리기 때문에 일할수록 삶이 공허해진다. 하지만 이번 상담자는 그보다는 나은 경우인데도 소진을 이야기한다. 무엇 때문일까? 바로 자신의 변화·발전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입사 후 20여 년 간 많은 능력을 키운 유능한 직원이다. 이것이 변화가 아닌가? 엄밀히 말하자면 아니다. 그건 그 회사에서만 가치 있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자신의 몸과 정신에 능력을 쌓은 것이 아니라 부장이라는 역할에 쌓은 것이다. 그는 회사를 나온다면 자기는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될 거라고 이야기했다. 재산을 모으긴 했지만, 그 역시 그가 소유한 것들의 양이 늘어난 것이지 그 자신의 변화는 아니다.

무엇이 변해야 내가 변하는 것일까

업무 능력도 키우고 승진도 하고 재산도 늘어났지만, 스스로가 변화하고 발전한 바가 없다면 직장의 일은 나를 위한 일이 아니라 단지 그 ‘자리’만을 위한 일이 된다. 일을 한 건 나인데 일이 만들어낸 중요한 이익 중 상당 부분을 뺏기게 되는 것이다. 어린 시절 우리는 이미 그런 이익의 혜택을 체험한 바 있다. 일을 통해 내가 다른 사람이 되는 경험. 따라서 의식적으로는 잊을 수 있어도 무의식적으로는 그런 이익을 추구하게 되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허망함이 밀려오게 된다.

그렇다면 무엇이 바뀌어야 내가 변화하는 것일까? 나의 변화는 직업에서의 업무방식의 변화나 발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나의 변화다. 내 생각이 변하거나 태도가 바뀌는 것, 내가 바라는 것이 변하거나 목표가 바뀌는 것, 세상이나 타인을 보는 관점이 변하는 것이다. 달라지는 것, 확장되는 것, 축소되는 것 등 모든 변화를 포함한다. 평생을 한결같은 생각과 태도로, 한결같은 소망과 목표로 산다는 건 충실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발전이 없다는 것, 일을 하더라도 내가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했음을 뜻한다.

그렇다면 변화는 어떻게 이뤄질 수 있을까. 내가 가진 지식이나 정보, 일의 영향을 나 자신도 받아야 한다. 단지 일의 효율과 성과를 위해서만 사용하지 말고 스스로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힘들여 일했는데 그 일을 한 당사자인 내가 그대로라면 내 역사에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셈이 되어 버린다. 따라서 일에 동원되는 여러 가지 도구들을 나를 위해서도 이용할 수 있는 길을 찾는 데 힘을 기울여야 한다. 또한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도 내가 변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내 생각이나 태도와 다른 새로운 것을 찾아내 나를 확장할 수 있을 때 변화가 일어난다.

일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을 앞서 살펴본 유아기 항문기 경험을 통해서 세 단계로 유추할 수 있다.

어른이 된다는 것

첫째는 즐거움. 여기엔 일에 대한 보상도 포함된다. 둘째는 타인이나 사회의 요청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로 나 자신의 변화를 이루어야 한다. 한 가지만 빠져도 일은 우리를 시달리게 할 수 있다. 그리고 한 단계를 만족시키면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고 첫 번째나 두 번째 단계에서 계속 제자리를 맴돈다면 나 자신이 일 속에서 소외되어 갉아 먹히고 소진될 수 있다.

<이수련 정신분석학 박사(한스아동청소년상담센터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