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반공 노인과 반페미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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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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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사회는 다양한 의견과 차이를 서로 존중함으로써 작동한다. 모든 성원이 그에 동의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가령 한국의 노년 남성 중엔 노동운동이라면 다짜고짜 ‘빨갱이’라 반응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노동운동에는 여러 갈래와 현실적 상황들이 있다. 그에 따라 누구든 제 나름의 의견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노동운동을 싸잡아 혐오하는 일은 노동자의 권리와 인권의 부정이며, 무지다.

비슷한 상황이 이 사회의 가장 젊은 세대에서 펼쳐지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청년 남성의 페미니즘 혐오 현상이다. 몇 년 사이 급속히 확산해 초등학생이 주 독자인 ‘고래가 그랬어’와 나에게도 “아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부모가 많아졌다. 나 또한 처음 이 현상을 알았을 때 일었던 거부감이 이젠 깊은 미안함으로 바뀌었다.

청년 남성의 페미니즘 혐오 이유로 이른바 ‘한남 무시’가 등장한다. 한국 청년 남성이 느끼기에 한국 청년 여성들이 자신들을 무시하며, 그 중심에 페미니즘이 있다는 것이다. 설사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 해도, 한남은 모든 한국 청년 남성을 가리키지 않는다. 상위 20을 뺀 나머지를 의미한다. 하위라는 말에 붙는 숫자는 50을 넘을 수 없으므로, ‘하위 80’은 성립할 수 없는 말이다. 하지만 20 대 80의 사회에서 하위 80은 명백하게 실재한다. 청년 남성과 청년 여성의 갈등은 양극화와 노동위기라는 사회경제적 모순 위에 놓여 있는 셈이다.

반공주의자 노인의 굴절된 의식은 사회 탓도 크다. 그들은 전쟁과 반공주의 독재하에서 성장하고 인생의 절반을 보냈다. 그들은 대부분 노동자였지만 기업이 잘되고 국가가 잘되는 게 내가 잘되는 길이며, 노동자의 권리 따위는 그 모든 걸 파괴하려는 빨갱이들의 선동이라 배웠다. 그들은 제 사회적 정체성의 부정을 증빙으로 사회의 일원일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노인을 유용성을 잃은 폐상품으로 대하는 신자유주의 세상에서, 그들은 더 강퍅한 반공주의자가 되는 것 외엔 제 자존을 지킬 방법을 찾지 못한다. 그들은 그러나 적어도 민주화 이후 수십 년 동안 그들이 의식을 수정할 사회적 기회를 가진 것도 사실이다.

청년 남성, 더욱이 소년 남성은 이들과 경우가 다르다. 그들은 제 의식에 자극을 받고 새로운 의식을 만들어 갈 권리,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 그들이 결국 현실에서 일어나는 불안과 좌절을 반페미로, 고작 동 세대 여성에 대한 적대로 보상받으려 한다면, 그건 사회의 책임이며 기성세대의 책임이다.

반페미 아들 일로 고민하는 이를 만나면 이렇게 말을 꺼낸다. “페미니즘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만 알아도 달라질 텐데요.” 페미니즘 혐오의 배경에도 무지가 있다. 해방을 좇는 모든 사회운동이 그러하듯, 페미니즘은 역사적으로 가부장제, 자본주의, 계급, 소수자 정체성 같은 문제와 결부 지어 다양한 갈래를 형성했으며 지금 이 순간도 역동한다. 하지만 반페미 청년-소년 남성에게 페미니즘의 노선과 사상이란 ‘성 분리주의’ 하나뿐이다. 이 외엔 본 일도 배운 일도 없다.

이 무지가 막막한 현실과 결합해 페미니즘 혐오로, ‘남자가 차별받는 세상’ 같은 얼토당토않은 하소연으로 표출될 때, 옹호할 순 없다. 사회와 기성세대는 그러나 그들의 상황과 처지를 좀 더 깊이 고민해야 할 책임이 있다. 다시 ‘교양 교육’을 이야기할 때다.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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