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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대통령 조기 레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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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근 각종 의혹 불거지고 사법개혁엔 군·검찰 반항까지 ‘악재 돌출’

[정치]노 대통령 조기 레임덕?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1층 커피숍. 열린우리당 출신 보좌관으로 보이는 몇몇 사람이 모여서 열린우리당의 향후 진로에 대한 토론을 하고 있었다. 한 사람이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에서 복귀한 뒤 사라진 ‘정치용어’가 꽤 많은 것 같다”면서 ‘집권여당’(당정분리로 인해 집권여당이라는 의미가 퇴색됐다는 뜻), ‘영수회담‘, ‘대타협’ 등과 같은 단어들을 줄줄 뱉어냈다. 그는 노 대통령이 탄핵정국에서 복귀한 뒤 바뀐 정치환경을 지적한 것이다.

다른 한 사람이 “새로 생긴 말은 없냐”고 묻자 누군가가 “책임정치, 아니 연설정치”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가 말한 ‘연설정치’란 노 대통령이 최근 각종 행사의 연설을 통해 국정운영 방향과 철학을 천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열린우리당 윤호중 의원도 “책임총리제를 실시하고 당정이 분리된 상황에서 노 대통령이 연설 등을 통해 대국민 메시지를 전달하는 기회가 많아진 것”이라고 말했다.

말의 파장과 의미를 잘 아는 사람

5월은 기념일이 집중되어 있는 달이다. 당연히 노 대통령이 참석해야 할 기념행사도 많다. 그만큼 노 대통령은 발언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 이런 발언을 통해 정국의 방향을 유도하고 있다. 민주당 이낙연 원내대표는 “노 대통령의 연설은 재미와 감동이 있다”면서 “노 대통령이 계산된 발언을 하면서도 즉흥적으로 들리게 하고, 그런 말들이 상황에 따라서는 진지하게 하는 발언보다 더 강한 메시지를 던진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이 기본적으로 말의 파장과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아는 정치인이라는 얘기다.

[정치]노 대통령 조기 레임덕?

이번 5월 들어서도 주목받은 노 대통령의 연설은 꽤 많다. 노 대통령은 19일 청와대에서 열린 주한외교단 리셉션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전쟁만은 우리가 막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북핵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북·미간의 무력충돌을 막겠다는 의지가 실려 있다. 18일에는 ‘5·18 민주화운동 25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자리에서 “우리는 아시아에서 가장 활발한 시민사회를 가진 나라가 되었다”면서 “이제 시민사회가 그 위상에 걸맞게 한층 더 성숙한 모습으로 발전해 가야 하며, 무엇보다 대안을 내놓는 창조적 참여를 통해 우리 사회의 합의 수준을 높여나가야 한다”고 언급했다. 노 대통령은 입법·행정·사법부에 이어 ‘제4부’로 인식되는 시민사회가 새로운 권력으로 고착되면서 드러나고 있는 퇴행적 모습에 대해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보낸 것이다.

문제는 이런 일련의 발언이 미치는 파장이다. 열린우리당의 한 의원은 “노 대통령이 연설을 통해 국민여론을 한쪽으로 몰아가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정치권 일각에선 노 대통령이 외교사절단을 향해, 그것도 ‘전쟁’에 대해 얘기했다면 뭔가 의도가 있다고 보고 있다. 한나라당 박창달 의원은 “외교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선 국민여론을 업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전제하면서도 “그러나 노 대통령의 경우는 외교적 문제를 국내 정치상황에 이용하는 경우가 있다”고 지적했다. 열린우리당의 한 의원도 “노 대통령이 상당히 많은 고민을 하고 ‘전쟁’ 발언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미전쟁을 막기 위해선 한·미동맹 관계의 이완을 감수할 수도 있다는 뜻으로 오해를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청와대 시스템 작동 각성 촉구

이낙연 의원은 최근 자신의 홈페이지 ‘이낙연 일기’라는 코너에서 “노 대통령의 연설에 감동이 떨어지고 있다”면서 “연설팀이 피로한 것이냐, 아니면 청와대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고 있지 않은 것이냐”고 물었다. 이 의원이 노 대통령의 연설내용 자체보다는 청와대 시스템 작동의 문제에 비중을 두고 각성을 촉구한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 의원은 종종 “청와대 비서실의 능력과 능률 저하보다 도덕성 하자에 문제가 있을 때 청와대 시스템 작동에 문제가 불거졌다”고 말해왔다.

사실 최근 청와대가 도덕적·정치적 논란에 휘말린 사안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오일게이트를 둘러싼 국정상황실 보고 누락과 노 대통령과 막말이 가능하다는 강금원 창신섬유 대표의 특별사면, 그리고 이종석 NSC 사무차장 조사, 노 대통령의 전용자동차 교체 등이 대표적 사례들이다. 열린우리당의 한 의원은 “여권 전반에 도덕적인 문제들이 노 대통령이 추구하는 분권형 국정운영에 방해가 되고 있다”면서 “그렇다보니 노 대통령이 제시하는 국정방향이 겉도는 일이 더러 있다”고 말했다. 특히 노 대통령의 오른팔이라는 열린우리당 이광재 의원이 오일게이트 연루의혹에 휩싸인 데 이어 병역기피를 위해 검지를 절단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의 확산은 노 대통령에게도 큰 부담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정치]노 대통령 조기 레임덕?

이처럼 악재가 거듭되면서 청와대 주변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조기 레임덕이 올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대검의 정보관리팀 소속의 한 검사는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도 집권 중반기에 그들의 가족이나 측근이 각종 의혹에 시달리면서 대통령의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사법개혁을 둘러싸고 검찰과 군이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특히 오일게이트 수사를 하고 있는 검찰은 여권의 유력한 차기 대권예비주자인 정동영 통일부 장관에 대한 소환까지 거론하고 있는 처지다. 국정운영의 기본적 일정과 흐름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군 역시 마찬가지다. 군에서도 사법개혁에 반발하고 불만 섞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5월 19일 국방부청사에서 열린 ‘군 사법제도 개선 토론회’에선 군지휘관들의 불만이 거침없이 쏟아져나왔다. 심지어 “군 사법제도 개선안 내용을 보고 경악을 금할 수가 없다”는 얘기까지 거침없이 나왔을 정도다.

연설정치보다 정치전면 나서야

이런 상황에서 국정운영을 뒷받침해야 할 청와대 비서실과 열린우리당에서는 권력투쟁의 징후까지 드러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이종석 NSC 사무차장에 관한 조사와 열린우리당의 ‘빽바지(백바지)와 난닝구 논쟁’ 등이 그 예이다. 윤호중 의원은 이 사무처장 조사 문제와 관련, “언론이 외교적 관례와 행태를 모르고 보도하는 측면이 있다”면서도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 사무차장 조사 사실이 언론에 알려진 것”이라고 말했다.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이 사무차장에게 상처를 내려는 세력이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열린우리당의 ‘빽바지와 난닝구 논쟁’도 마찬가지이다. 열린우리당 이상민 의원은 “좋게 보면 왜곡된 노선논쟁이고 나쁘게 보면 권력싸움”이라면서 “선거에 영패한 열린우리당에선 곡소리는 들을 수 없고 싸움소리만 들린다”고 말했다.

여권에 이처럼 악재가 거듭되자 노 대통령이 탄핵터널에서 빠져나오면서 구체적으로 실천했던 분권형 국정운영 기조를 재검토해야 할 분기점에 선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노 대통령이 ‘연설정치’가 아니라 정치 전면에 나서야 한다는 주문인 셈이다. 열린우리당의 한 의원은 “당·청·정의 리더십은 결국 정국 주도권에서 찾아야 한다”면서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방법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략적 유연성’ 문제를 조사한 까닭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NSC(국가안보회의)에 대한 노무현 대통령의 신뢰는 아직도 높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대미관계를 둘러싼 외교노선을 놓고 청와대와 외교부 사이에 갈등이 있었던 지난해 “NSC는 부처 이익을 앞세우지 않는다”며 NSC 편을 들었다. 이 발언이 계기가 되어 이종석 사무차장이 참여정부의 외교안보 컨트롤 타워를 장악하게 됐음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렇다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지시에 의해 ‘전략적 유연성’ 문제가 조사를 받게 된 것일까. 전략적 유연성은 주한미군 감축과 용산기지 이전, 그리고 한미연합사의 ‘작계5029’ 전략과도 밀접하게 관계가 있다. 이는 참여정부의 외교안보전략의 핵심인 ‘동북아 균형론’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 사무차장에 대한 조사 자체가 중차대한 문제인 것이다.

구체적으로 노 대통령이 조사를 지시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는다. 다만 청와대 국정상황실에서 올린 “이 차장이 전략적 유연성을 번복했다”는 보고를 받은 노 대통령이 정동영 통일부 장관을 통해 확인하려 했다는 게 청와대측의 설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차장의 조사와 관련해 두 가지 관측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첫째는 대미협상에서 미국의 ‘전략적 유연성’ 문제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이 차장이 이중적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열린우리당 윤호중 의원은 “미국은 말과 정책의 일관성을 중시한다”면서 “만일 오해가 있다면 오해를 풀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했다.

안보정책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한 인사는 “이 차장은 지난달 방미 중 미국 NSC 관계자로부터 ‘한미간 협상결과가 번복되는 것이 당신 때문 아니냐’는 항의를 받았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은 남북관계를 중시하는 이 차장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두번째는 권력싸움으로 보는 시각이다. 노 대통령의 지시의 발단이 국정상황실의 보고에 의해서 이뤄졌다는 점과 조사단 일원으로 문정인 민정수석과 천호선 국정상황실장이 참석했다는 점 때문이다. 국회 외교안보통일위원회 소속의 한 열린우리당 의원은 “통일·국방 유관 연구기관 사람들을 만나 얘기하다보면 이 차장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많았다”면서 “NSC에 대한 문제라기보다는 이 차장 개인에 대한 문제로 보인다”고 말했다. 현재 이 차장에 대해 흘러나오는 얘기들은 대체로 ‘이 차장이 독주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그가 자기 사람을 중용한다’ 등이다. NSC에 대한 힘빼기나 전략적 유연성과 관련한 NSC의 부적절한 대응이 문제가 된 것은 아니라는 시각이다.


<김경은 기자 jj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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