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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갈린 역사인식 ‘내 입맛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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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에 나타난 양국의 인식차… 중국 “일본 침략 잊지 말자”, 일본 “중국은 후진국”

한 국가의 교과서는 역사인식을 보여줄 뿐 아니라 자라나는 세대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중·일간의 마찰이 문제가 되고 있는 가운데, 중·일 양국의 중학교 역사교과서에서 상대 국가는 어떻게 묘사돼 있는지 살펴봤다.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중국 교과서(인민교육출판사 편·연변교육출판사 역)와 일본 교과서(도쿄서적)는 근대사 기술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중국 교과서에 비친 일본은 고대에는 중국의 영향을 받는 국가였다가 근대에 이르러 ‘잔인한 침략자’로 바뀌었다. 일본이 중국 교과서에 처음 등장한 것은 한나라 시기를 언급하면서부터다. 일본의 100여개 소국 가운데 30여개가 한조와 왕래했고, 광무제 때 일본의 왜노국왕이 사신을 보내와 ‘한왜노국왕’ 금인을 주었다는 것이다. 수·당 시기에는 왕래가 밀접했다고 한다. 덕택에 일본은 당조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지금도 여전히 당시대의 일부 풍속이 보존돼 있다. 당시 일본의 도읍이었던 ‘헤이죠쿄’의 건축양식은 장안과 거의 같으며, 당시는 일본에 광범위하게 유행했다. 일본 천황과 사대부는 중국의 서예를 열심히 학습했다고 한다.

일본 관련 기술은 왜구를 물리친 척계광이라는 ‘민족영웅’에 대한 기술을 거쳐 갑자기 청일전쟁 시대로 접어든다. 이때부터 일본은 철저한 침략자로 규정된다. 청일전쟁을 도발한 것은 일본이며 이 과정에서 중국인을 야만적으로 학살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생생한 그림까지 곁들여져 있다.

중국 교과서의 일본 만행에 대한 기술은 상당히 구체적이다. 1928년 국민당정부의 북벌부대가 지난을 점령했을 때 교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산둥에 출동한 일본군은 제남에 침입해 중국 군민 수천명을 살상했다고 한다. 교과서는 일본군이 국민당정부 인사 한명을 납치해 귀와 코를 잘라내고 그의 눈알을 도려낸 뒤 살해했다고 기술하며 일본군의 잔인성을 부각했다.

中, 일본 잔인성 구체적으로 서술

난징대학살을 묘사하는 대목에서는 일본침략자가 가는 곳마다 방화와 살인, 간음, 약탈 등 온갖 만행을 다했다고 적었다. 일본군이 난징 점령 6주도 안 되어 중국 군민을 30만명 이상 학살했다는 내용과 함께 중국 군민을 생매장하고 있는 일본군 사진을 첨부했다. 교과서는 당시 일본의 한 기사를 인용해 일본군의 만행을 강조했다. 일본군 소위 무카이와 노다는 중국인 100명을 찍어죽이는 내기를 했다. 노다는 105명을 죽이고 무카이는 106명을 죽였다. 그러나 누가 먼저 100명을 죽였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승부를 가를 수 없었고, 결국 다시 누가 먼저 150명을 죽이는지 겨루기로 했다는 것이다.

731부대에 대한 설명도 빼놓을 수 없다. 주로 페스트, 콜레라 등 병균과 병균을 넣은 폭탄을 연구제작한 731부대는 붙잡아온 중국인을 마루타라고 부르며 몸에 세균주사, 세균전염음식을 강제하며 실험을 진행했고 산 채로 해부까지 했다. 이렇게 살해당한 중국인은 무려 3000명이나 된다. 교과서는 뒤의 연습문제에서 세균전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부대 이름을 빈칸채워넣기 문제로 내는 등 과거를 잊지 말자는 목소리도 냈다.

특이한 점은 청의 위안스카이와 국민당정부의 장제스를 개인의 욕심 때문에 일본에 협력하거나 소극적으로 항일운동을 벌였다는 식으로 깎아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으로부터 받은 고통을 이들의 책임으로 전가하는 식이다. 중국의 일반 대중은 피해자 혹은 강한 항일운동가로 묘사하고 있다. 중국 교과서는 공산당과 중국 인민의 항일운동 덕택에 1945년 100여년에 걸친 굴욕에서 벗어났고 현재의 중국이 탄생했다는 식으로 설명했다. 하종문 한신대 교수(일본학)는 “현재의 중국 정부는 항일투쟁을 통해 탄생한 정부인 만큼 일본의 만행을 부각하는 것은 당연하다”며 “교육을 통해 일본의 만행을 끊임없이 배우고 있는 중국인은 일본의 자극이 있을 때 폭발적인 반일시위를 벌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반면 일본 교과서에 비친 중국은 선진국에서 후진국으로 변하는 느낌이다. 중국은 처음에는 우세한 입장이었다. 4대 문명지 중 한곳인 중국은 일본에 발달한 문화를 전해주는 선진국이었다. 기원전후 일본의 한 나라가 중국 황제로부터 금인을 받은 것이라든가, 3세기쯤 일본 야마타이국 여왕이 ‘친위왜왕’이라는 칭호와 금인을 받은 것은 당시 중국의 국제적인 위치를 잘 보여준다. 중국의 수·당 시절 일본은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려고 애를 썼다. 견당사와 견수사가 대표적인 예다. 이처럼 일본 교과서는 중국의 문물을 열심히 받아들인 선조의 모습을 설명하는 한편 그들의 독자적인 모습도 강조했다. 국제어였던 한자로부터 힌트를 얻어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라는 문자를 만들어낸 것은 독창적이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교과서의 기술은 점차 일본 우위로 변해간다. 일본 교과서는 몽골의 침입을 이겨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광대한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한 원조차도 일본을 정복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오다 노부나가가 전국을 통일한 16세기쯤부터 일본 교과서의 기술은 중국에서 유럽 중심으로 넘어간다. 이때부터 중국은 유럽의 약탈 대상으로 기술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아편전쟁 때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은 중국을 넘보지 못했다. 청에 대항하기 위해 군비의 증강을 꾀했다고 적고 있기 때문이다. 청일전쟁 뒤에는 유럽과 대등한 국가로서의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 적고 있다.

우익교과서 후소샤판 교과서에는 이런 점이 잘 드러난다. 아편전쟁에 대한 기술에서 교과서는 ‘전쟁에 진 당시의 중국인은 일본인이 놀란 만큼의 충격은 받지 않았다. 서양의 군사기술을 받아들일 생각은 했지만 정치사회의 모습이나 문명 그 자체를 바로잡고자 하는 생각은 아직 하지 못했다. 개혁이 필요하다고 청이 생각하게 된 것은 훗날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배한 이후의 일이다. 청은 근대국가의 건설을 배우고자 다수의 유학생을 일본에 보냈다. 고대의 견당사와는 반대되는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라고 적었다. 중국에 대한 인식이 역전된 것을 잘 보여준다.

日, ‘아전인수’식 역사해석 가관

중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에 대한 기술에서 일본 교과서는 어쩔 수 없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청일전쟁과 중일전쟁의 발발은 중국측에 책임을 떠넘기거나 관동군의 책임으로 돌렸다. 게다가 일본의 안보를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식이다. 일본 교과서는 중국에 대한 침입을 크게 만주사변과 루거우차오사건으로 인한 중일전쟁 발발, 이 과정에서 발생한 난징대학살을 중심으로 기술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중국이 어떠한 피해를 입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적지 않았다. 난징대학살에서 ‘여성이나 어린이를 포함한 중국인을 대량으로 학살했다’며 모호한 표현을 사용했다. 후소샤 교과서는 오히려 중일전쟁의 책임을 중국에 돌렸다. 국민당과 손을 잡은 중국 공산당은 정권을 빼앗는 전략으로 중일전쟁의 장기화를 꾀했다는 것이다. 일본은 전쟁 목적을 잃고 전쟁에 끌려들었으며, 평화적인 해결을 위해 1938년부터 1941년까지 몇번이나 여러 루트로 중국측에 평화제안을 했지만 성과는 없었다는 것이다. 일본인이 중국인의 반일시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정재용기자 jj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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