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현장체험

노숙자 깨우자 대뜸 욕설부터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기자의 현장체험]노숙자 깨우자 대뜸 욕설부터

역사 대합실 내에는 100여명의 노숙자가 삼삼오오 모여 앉아 TV를 보거나 의자에 앉아 잠을 청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술잔을 기울이는 광경도 보였다. 그들에게서 악취가 풍겼지만, 그렇다고 다짜고짜 단속할 수는 없었다. 불법행위를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일반 시민이 역내에서 잠을 청하거나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신다고 바깥으로 내몰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노숙자들이 가장 반발하는 것이 차별이라니, 어찌 쉽게 단속하겠는가. 최소한 술을 마시고 싸운다거나 큰소리로 떠드는 경우에만 단속이 가능하다.

범칙금 스티커 발부도 겁 안내

노숙자들은 이런 속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오전 10시쯤, 2층과 3층을 연결하는 에스컬레이터 뒤의 대합실 의자에 노숙자 5명이 둘러앉아 있었다. 살펴보니 의자 아래는 소주병과 1회용 컵이 나뒹굴고 있었다. 입에서는 심한 술냄새가 풍겼지만, 이들은 "우리가 마신 술이 아니다"고 발뺌했다. 술을 마신다는 이유로는 단속할 수 없기에 가만 둘 수밖에 없다. 그들은 의자에 앉아 술을 마시고 라면을 먹는 등 '즐겁게' 하루를 보냈다.

원래 노숙자 단속은 철도공안의 주 임무가 아니다. 철도공안의 임무는 역사와 열차 내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것으로, 강-절도범 등을 검거한다. 노숙자를 단속하는 것은 노숙자가 승객에게 구걸하거나 소란을 피우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어떻게 보면 부수적인 임무인 셈이다. 그런데 요즘은 철도공안의 주 임무가 노숙자 단속이 돼버렸다. "노숙자 단속반으로 간판을 바꿔야 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는 자조섞인 목소리가 나올 법도 하다.

노숙자 단속은 의자에 누워서 잠자는 노숙자를 깨우는 것이 대부분이다. 단잠을 방해하면 누구라도 기분이 나쁠 것. 욕설부터 튀어나왔다. 하지만 질서유지를 위해 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다. 그나마 일어나면 다행이다. 아침인데도 술에 취해 일어날 줄 모르는 노숙자도 있다. 공안원들에 따르면 건강한 노숙자는 하루 평균 소주 10병, 몸이 허약한 사람도 5병씩은 마신다고 한다. 아무리 그래도 아침부터 인사불성이라니....

노숙자 엄모씨(42)가 사무실로 끌려왔다. 역내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적발됐는데도 담뱃불을 끄지 않고 버텼다는 것이었다. 그는 사무실에 끌려온 뒤에야 담뱃불을 껐다. 이미 몇차례나 실내흡연으로 단속됐다는 그는 범칙금 스티커를 발부하려는 공안원에게 "만날 끊어봐야 소용없어"라면서 "솔직히 말해 스티커 발부가 형식적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고 말해, 드러내놓고 비웃는 듯한 눈치였다.

이것은 또 무슨 뜻일까. 특별사법경찰인 철도공안원은 강-절도 뿐 아니라 경범죄도 단속한다. 실내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승객에게 행패를 부리고 구걸하는 경범죄도 철도공안원에 적발되면 즉결심판 처분을 받게 된다. 예전에는 단속되면 즉각 법원으로 이송해 즉결심판을 받게 했기 때문에 구류 등의 처벌로 이어질 수 있었지만, 요즘은 경범죄의 경우 가능한 한 피의자를 귀가시키고 즉결심판 기일에 스스로 즉결심판 법정에 출석하도록 하고 있다. 주소지에서 살지 않는 노숙자는 이를 악용하기 마련이다.

주먹다툼 일보직전 겨우 뜯어말려

[기자의 현장체험]노숙자 깨우자 대뜸 욕설부터

오후로 접어들면서 술에 취해 소란을 피우는 노숙자가 한두명 보이기 시작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노숙자가 있는가 하면 자기들끼리 싸우는 이도 없지 않았다. 사무실로 끌려온 최모씨(57)와 김모씨(60)가 그랬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정말 사소한 이유로 벌어진 싸움이었다. 김씨 옆자리에 아이 2명과 동행한 여성이 앉았다. 뒷자리에 앉아 있던 한 노숙자가 구걸하려고 하자, 김씨가 그를 제지했다고 한다. 구걸하려던 노숙자가 김씨에게 욕을 퍼붓자 김씨가 그의 뺨을 때렸으며, 마침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최씨가 싸움에 끼어든 것이었다. 그 노숙자가 간경화를 앓고 있었다는 것도 동정을 산 이유지만, 오후 4시 무렵에 김씨는 이미 소주 7병을 마신 상태였다.

그나마 이 정도는 '양반급'이다. 어떤 노숙자들은 술을 사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싸웠다. 오후 5시 45분쯤. 대합실 쪽에서 갑자기 소란이 일어나 달려가보니, 50대와 40대로 보이는 노숙자 2명이 주먹다툼을 벌이기 직전이었다. 공안원의 개입으로 심각한 사태까지 발생하지는 않았지만, 화가 난 40대 노숙자는 상대방을 쫓아다니면서 욕을 퍼부었다.

이들을 먼발치에서 지켜보았다. 처음에는 "그냥 가라"며 상대를 하지 않던 50대 노숙자가 마침내 화가 폭발한 듯 40대 노숙자를 끌고 바깥으로 나갔다. 40대 노숙자는 바깥에 나가자 "나랑 술 먹기로 해놓고 왜 엉뚱한 놈이랑 먹어. 그런 식으로 날 농락하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술을 사주기로 약속하고는 다른 노숙자와 술을 마셔서 일어난 싸움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근처 할인매장에서 소주를 사들고 나와 근처에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오늘은 형님이 정말 잘못하지 않았느냐. 술 사올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다른 놈과 마시면 내가 얼마나 열받아." 5분 만에 소주 한병을 비운 이들은 어느새 화해한 듯 사이좋게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마시며 역내로 들어왔다.

노숙자가 어떻게 생활하는지 궁금해 사복으로 갈아입고 노숙자를 지켜보기로 했다. 이내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역내의 패스트푸드 매장 안을 바라보던 그는 알아들을 수 없는 욕을 웅얼거리면서, 한편으로는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패스트푸드 매장에 이른 그는 먹이를 발견한 매처럼 눈을 번득이더니 평소의 움직임과는 다른 몸놀림으로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목표가 된 테이블에는 여성 2명과 아이 1명이 햄버거를 먹고 있었다. 이들이 먹던 햄버거를 거의 강탈하다시피 받아낸 노숙자는 바깥으로 나와 햄버거를 먹다가 목이 마른 듯, 옆자리에 앉아 있던 여성에게 돈을 구걸했다. 동전 몇개를 얻어낸 그는 자판기 커피를 뽑아 구석으로 갔다. 먹기 아깝다는 듯이 햄버거와 커피를 조금씩 먹던 노숙자는 다 먹자 주머니를 뒤져 찾아낸 담배를 피웠다.

노숙자들은 대부분 여성과 젊은 학생, 군인을 상대로 구걸한다. 여러 명의 여성에게 접근했다가 일행인 남성의 제지로 구걸에 실패한 한 노숙자는 젊은 커플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이 커플은 사랑싸움을 하고 있는 듯 저기압이었다. 목표를 잘못 고른 노숙자는 화들짝 놀라 주변에 있던 학생들에게 접근했다. 이들에게서 1000원 지폐 1장과 동전 몇개를 받아든 노숙자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마도 소주와 안주인 사이다를 사러 근처 할인마트로 갔을 것이다. 노숙자에게 돈을 준 이모씨(19-대학 1년)에게 이유를 물어보자 "화장실에 갔다가 노숙자가 잠자는 것을 봤는데 무척 안쓰러웠다"고 털어놓았다.

[기자의 현장체험]노숙자 깨우자 대뜸 욕설부터

재기 포기한 채 구걸생활로 연명

노숙자들이 서울역에 본격적으로 모여들기 시작하던 IMF 때만 해도 200여명의 노숙자 가운데 대다수는 일거리를 찾아다니는 등 재기 의지를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서울역 노숙자의 수는 400여명에 육박했으며, 대부분은 재기를 포기한 채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 노숙자의 수가 늘어나는 것도 문제지만, 이들이 세력화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 더 큰 문제점으로 꼽힌다고 한다. 이미 그런 기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노숙자를 단속해 데리고가려 하자 다른 노숙자가 "내 동생인데 내가 알아서 하겠다"며 공안원을 가로막기도 했다. 사회불만세력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는 것이 공안원들의 생각이다.

상황이 이렇지만 노숙자를 단속하는 철도공안원은 턱없이 부족하다. 토요일에 발생한 사태로 인원이 충원돼 화요일에는 총 19명이 질서를 유지했지만, 서울역 공안원은 원래 8명이다. 그 8명이 맞교대로 하루 24시간 노숙자는 물론 노선을 물어보는 일반 승객까지 상대해야 한다. 밤이 되면 자신도 모르게 짜증이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새벽 1시쯤, 서울역을 나서며 정부부처와 지방자치단체가 외면하는 노숙자 문제를 소수의 공안원이 떠안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을 해보았다.

글|정재용 기자 jjy@kyunghyang.com

사진|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


바로가기

주간경향 댓글 정책에 따라
이 기사에서는 댓글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