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양심과 권력에 흔들린 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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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투신의 악몽이 또다시 시작된 걸까. 지난 1월 17일 유태흥 전대법원장(86)이 서울 마포대교에서 한강으로 투신해 숨졌다. 유전대법원장은 투신 직후 구조대에 의해 인근 여의도 성모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이날 밤 10시 50분께 끝내 숨지고 말았다.

유가족들에 따르면 유전대법원장은 투신 3주 전부터 허리통증이 심해져 물리치료를 받는 중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평소 허리통증과 고혈압에 시달리던 그는 2000년 허리를 삐끗해 두달여간 통원치료를 받기도 했다.

큰아들 총동씨(53)는 "2주 전쯤 몸이 안 좋아 '자식에게 폐를 끼치느니 차라리 죽고 싶다'고 말해 이를 만류했더니 '그럼 취소다. 자식들에게 할 소리가 아니다'라고 말씀했다"고 전했다.

1981년부터 86년까지 제8대 대법원장을 지냈던 유전대법원장은 대법원장에서 물러난 뒤 한동안 '법무법인 광화문'에 변호사로 등록했지만 실제로 변호사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그가 공식석상에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2004년 12월 10일 최종영 현대법원장이 마련한 '역대 대법원장 송년만찬' 때였다.

1948년 변호사시험에 합격해 법조계 생활을 시작한 유전대법원장의 과거는 한국 법조역사의 굴곡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단적으로 그는 모두 세차례에 걸쳐 일어났던 사법파동 가운데 두차례 파란의 중심에 서 있었다.

사법파동의 중심에서

제1차 사법파동은 벌어진 것은 1971년. 박정희 전대통령은 그해 4월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에게 가까스로 이겨 7월부터 임기를 시작했다. 이 무렵 대법원은 사상 처음으로 위헌심판권을 행사하여 군인과 군속의 손해배상권을 제한하는 국가배상법을 위헌이라 판결했다. 그리고 학생시위로 구속되거나 반정부 논문을 기고했다가 반공법으로 기소된 문인 및 학생들이 잇따라 무죄를 선고받고 풀려났다.

박전대통령은 이에 격노했고 그해 7월 28일 서울지검 공안부는 무죄판결을 많이 냈던 재판부의 하나인 형사지법 항소3부 이범렬 부장판사와 최공웅 판사 등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하기에 이르렀다.

표면상 이 두 판사의 혐의는 국가보안법 위반사건의 증인심문을 위해 지방으로 내려간 자리에서 변호사로부터 숙식을 제공받았다는 것이었다. 물론 피고인 변호사로부터 일종의 향응을 제공받은 것이 옳은 일은 아니지만, 공식 출장비가 거의 책정되지 않던 당시만 해도 이는 오랜 관행이었다. 즉, 두 판사에 대한 영장 청구는 법원 길들이기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때 문제의 영장을 기각한 사람이 바로 유전대법원장이었다. 대통령을 등에 업은 검찰의 서슬이 푸르던 당시 형사지법 수석부장판사를 지내고 있던 그는 증거인멸과 도주우려가 없다고 판단해 영장기각이라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러자 검찰은 증거를 보강해 재차 영장을 청구했고 이에 법관 83명은 '검찰의 영장청구는 시국사건에서 잇따라 무죄를 선고한 법관에 대한 보복조치'라며 집단사표를 내는 등 강하게 반발했다. 이른바 제1차 사법파동의 시작이었다. 사표를 제출한 판사는 이후 150명까지 늘었는데 유전대법원장은 이들을 대신해 성명서를 읽는 등 시대의 양심을 대변하는 역할까지 자임했다.

사법사상 최초 '탄핵발의' 수모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유전대법원장은 대법원 판사에 오른 뒤 10-26사태를 주도한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사형 판결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그 덕분에 그는 전두환 전대통령의 집권과 함께 1981년 대법원장 자리까지 오르게 됐다. 반면 김재규에게 '단순살인'이라는 소수의견을 제시한 대법원 판사 6명은 모두 전전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옷을 벗어야 했다. 신군부의 눈밖에 난 탓이었다.

이렇게 대법원장 자리에 오른 유전대법원장은 대법원장 재직시절이던 1985년 법관 인사의 난맥상을 비판하는 글을 법률신문에 기고한 판사를 서울민사지법 판사 부임 하루 만에 지방으로 좌천시켜 본인 스스로 제2차 사법파동을 초래하고 말았다.

유전대법원장은 이 일로 결국 대법원장에 대한 사법사상 최초의 탄핵발의까지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야당에서 제기한 탄핵발의는 당시 국회 다수당이던 여당 의원들의 반대로 국회에서 부결되기는 했지만 그는 임기 내내 소장법관들로부터 '정치판사'라는 따가운 시선에 시달려야 했다.

이렇게 두차례의 사법파동을 거치는 동안 유전대법원장은 한번은 양심의 편에서, 또 한번은 권력의 편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했던 셈이다. 스스로 생을 마감한 유전대법원장의 죽음 뒤에서 많은 법조인들이 상념에 잠기는 것은 그가 걸어온 파란 많은 과거와 무관하지 않다.

최성진 기자 csj@kyunghyang.com

'한강의 악몽'은 언제까지

지난해부터 시작된 '한강의 악몽'이 올해 들어서도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3월 11일 대기업의 비자금 조성 의혹사건을 둘러싸고 서울지검의 수사를 받아오던 남상국 전대우건설사장이 한남대교에서 한강에 투신, 10여일 만에 변사체로 발견됐다. 대통령 탄핵정국과도 맞물려 남사장의 한강투신은 커다란 충격을 던졌다.

이어 4월에는 박태영 당시 전남지사가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 재직시절 인사 및 납품관련 비리 연루혐의로 검찰의 조사를 받던 중 반포대교 아래로 투신해 숨졌다. 박지사는 당시 부인의 개인 운전기사인 임모씨(63)가 운전하던 오피러스 승용차를 타고 반포대교를 건너던 중 남단에서 차를 세운 뒤 곧바로 한강에 뛰어들어 숨졌다.

이후 두달도 채 안 돼 이번에는 이준원 전경기 파주시장이 운전사 이모씨(31)와 함께 반포대교를 지나던 중 한강으로 투신했다. 긴급출동한 경찰은 이시장을 구조해 인근 병원으로 옮겼지만 결국 사망을 막지는 못했다.

이시장이 사망한 지 열흘 뒤에는 '쓰레기 만두파동'으로 혹독한 고통을 겪던 만두제조업체 (주)비전푸드 대표 신모씨(35)가 "정부와 언론이 만두업체를 무조건 불량식품업체로 매도한다"며 반포대교에서 한강으로 투신해 사회에 큰 충격을 던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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