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여행의 길잡이-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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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문화유산이 가장 많은 도시는 어디일까. 아마도 서울일 것이다. 불국사와 석굴암으로 대표되는 신라의 천년고도 경주도, 백제의 도읍이던 부여도 수적으로만 본다면 서울보다 많지 않다(오래된 문화유산은 경주와 부여가 더 많이 보유하고 있겠지만). 한국문화유산답사회에서 엮은 '답사여행의 길잡이' 시리즈의 마지막 권인 '서울'은 이 점을 똑똑히 보여준다.

서울에 문화유산이 많다고 하면  의아해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네모반듯한 빌딩과 뜨거운 아스팔트와 자동차와 바쁜 사람들뿐인 서울에서 옛 정취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저자인 유홍준 문화재청장에 따르면 서울은 우리나라 사람보다는 오히려 외국인들이 감탄하는 지역이다.

서울은 북한산, 인왕산, 남산 등이 감싸고 있고 한가운데에는 한강이 흐른다. 그래서 고대부터 서울은 군사적-지리적으로 최고의 요충지였고 삼국(고구려, 신라, 백제)도 한강을 낀 서울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국호가 여러 번 바뀌고 서울땅을 차지한 나라가 수시로 바뀌면서 그만큼 서울에는 문화유산이 차곡차곡 축적되었다.

우선 한강 유역은 빗살무늬토기로 대표되는 신석기 문화의 중심지였다. 이를 증명하는 곳이 암사동 선사유적지다.

이후 정치세력이 등장하면서 한강 유역을 비롯한 서울 지역은 백제의 땅이 되어 '백제의 전성기'라 일컬어지는 한성시대를 연다. 비록 현대 건축물을 세우느라 많이 파괴되기는 했지만 풍납토성, 몽촌토성, 아차산성, 석촌동 고분군, 방이동 백제고분군 등은 서울이 백제인들의 희로애락을 품고 있는 지역임을 말해준다. 

아다시피 서울은 500년 조선왕조의 도읍지였다. 따라서 곳곳에 조선왕조의 숨결을 느끼게 하는 유적이 버티고 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훼손되기는 했지만 5대 궁궐(창덕궁, 창경궁, 경복궁, 경희궁, 덕수궁)과 우리나라 최초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받은 종묘, 조선시대에 각종 제사를 지내던 사직단 등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유산이다. 비록 온전하게 간직되지 못하고 치욕과 상처로 얼룩졌지만 이러한 유적들이 서울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함을 이 책은 은연중에 암시한다.

서울을 말하면서 산을 빼놓을 수 없다. 서울 외곽을 둘러싼 수많은 산 중에 으뜸은 국립공원 북한산이다. 이 책의 표현을 빌리면 "북한산은 민족의 산-백두산에 뿌리를 둔 우리 산천의 등줄기 백두대간의 한북정맥에서 뻗어내린 수도 서울의 진산(鎭山)이다."

북한산 비봉 꼭대기에 세워진 진흥왕순수비는 이곳이 삼국의 쟁탈전이 치열했던 곳임을 보여준다. 북한산은 고려시대에는 거란과 몽골의 침략을 막아낸 격전의 현장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왕조는 군사적 중요성을 깨달아 그곳에 성을 쌓았다. 그것이 북한산성이다. 또한 북한산 자락에는 신라 무열왕대인 659년에 창건된 장의사(莊義寺), 영험하기로 소문난 석조승가대사상이 있는 승가사(僧伽寺) 등 불교 유적이 숨어 있다.

서울에는 근대문화유산도 남아 있다. 한국은행 본관을 비롯해 정동교회, 명동성당 등이 그런 곳이다.

이처럼 서울에는 여기저기 우리의 전통과 혼이 살아 숨쉬는 유적이 많다. 그리고 이 유적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 다만 우리가 반성해야 할 점은 그것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를 깨닫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 그래야만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길이 보전할 수 있고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다. 이 책이 강조하는 것도 이 점이다. 

임형도 기자 lh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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