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북핵 문제 할 말은 하겠다"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정부가 이번 한-미정상회담 결과에 대해 지나치게 분위기가 업(up)됐다고 언론에서 말하지만 그건 노무현 대통령과 미국 조지 부시 대통령 간 대화록을 직접 보지 못해서 그렇다. 대화록을 보면 좋게 평가할 수밖에 없다. 북한에 좋은 신호(signal)를 보낸 성공적인 회담이었다."

칠레 산티아고에서 11월 20일 열린 한-미정상회담 결과에 대한 정부 핵심당국자의 전언이다. 정상회담을 전후해서 이틀 동안 브리핑을 했던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도 "한-미관계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것으로 생각한다"고 높은 평가를 내렸다. 반 장관은 여기에 북핵 해결 과정에서 한국이 적극적이며 주도적 역할을 하기로 했음을 거듭 강조했다.

그러나 우리의 적극적 역할도 내용을 들여다보면 지난 6월 끝난 제3차 6자회담에서 제기됐던 우리 제안을 보다 적극적으로 세일즈하겠다는 데서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다. 그렇다면 정부 고위 당국자들을 한껏 고양시킬 정도로 우리가 얻은 성과는 과연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회담 성과는 북핵 해결의 주변 여건을 우리에게 우호적으로 조성했다는 데서 찾아야 할 것 같다. 회담을 전후해서 우리 정부가 공개적으로 밝힌 방침을 뜯어보면 북핵 해법과 관련해 한-미간에는 이견이 존재하며, 서로 다른 전략적 환경에 처한 점에 비추어 오히려 이견을 갖는 게 당연하다는 점을 여러 번 강조하고 있다. 한-미가 한 목소리를 내도 부족할 판에 한-미는 다르며,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정부가 내세운 것은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외교부 핵심당국자는 "북한 핵폐기와 한반도 비핵화에 대한 공동목표는 같지만, 이에 도달하기 위한 접근방법은 다를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부산까지 가는 데 대구를 통해서 갈 수도 있고, 진주를 경유할 수도 있듯이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의견을 절충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미 입장차이 미국이 인정

한-미가 다름을 미국이 인정한다는 것은 한국 입장에서 다소 움직일 수 있는 여지가 확보됐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걸핏하면 북핵의 유엔 안보리 회부 또는 대북 군사적 압박을 들먹이는 미국 내 매파가 부시2기 행정부의 헤게모니를 잡게 될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한국에 적지 않은 의미를 준다는 지적이다. 부시 대통령은 같은날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에서 "북한의 지도자는 핵프로그램의 포기를 요구하는 세계의 공통된 목소리를 들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는 공동의 목표일 뿐 정부 당국자들이 강조한 접근방법 또는 전술적 차이를 말한 것은 아니다.

'접근 방법상의 차이'는 구체적으로 3차 6자회담에서 제시됐던 한국과 미국안의 차이를 뜻한다. 예를 들어 '핵동결 대 보상'의 해결구도에서 한-미는 보상 문제를 둘러싸고 이견을 보여왔다. 한국은 북한이 동결을 선언하는 대가로 대북 에너지 지원을 하자고 주장해온 반면 미국은 애초 "잘못된 행동에 보상할 순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가 최근엔 한-중-러 등 다른 6자회담 참가국들의 중유지원을 이해하고 지지한다는 입장으로 누그러졌다.

북한이 본격적인 핵동결에 이르기 전까지 준비기간에 대해서도 미국은 3개월이면 충분하다는 입장인 반면에 우리는 6개월 정도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고 있다. 우리 정부는 3차회담 안을 토대로 이러한 한-미간 차이를 좁힌 절충안 초안을 마련해 세일즈를 벌여왔다고 정부 당국자는 전한다. 애초 지난 9월에 열기로 했던 4차 6자회담 실무그룹 회의에 제출하기 위해 동결의 범위와 검증, 기간 등에 대해 구체안을 마련했으며, 이를 미국과 일본, 중국, 러시아 등 북한을 제외한 회담 참가국들과 협의를 거쳤다는 설명이다. 물론 이에 대한 미국의 반응은 아직 시큰둥하다. "4차회담이 열리면 보다 유연성을 보이겠다"는 부시 대통령의 언질이 이번 정상회담에서 얻은 미국측 답변이다.

정부 당국자는 "중요한 것은 미국이 타협의 여지를 남겼다는 것"이라면서 "2기 행정부 구성이 안 된 현 상황에서 미국이 새로운 안을 내놓을 입장이 아닌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한국은 적극적 활동을 할 여지를, 미국은 당분간 한국의 활동을 지켜보면서 북핵 문제를 안정적으로 '방치'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한국이 주도적-적극적 중재활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은 이라크 사태가 안정되고 부시2기 행정부의 인선작업 및 정책 재검토가 마무리될 내년 3월 이전까지로 보고 있다. 일종의 '시한부 주도권'인 셈이다.

'소수의 극단세력' 정상차원서 견제

한국은 이때까지 북한을 설득해 6자회담 프로세스를 다시 시작하고, 회담의 실질적인 진전을 도모할 만한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대북 설득에 성공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은 물론이다.

정부 당국자들이 꼽는 이번 정상회담의 또다른 소득은 한-미 양국 내에서 강경발언을 통해 상황을 덧들이곤 하는 '소수의 극단세력'에 대해 양국 정상 차원에서 견제를 했다는 점이다. 노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에게 "한-미 양국 내에서 북한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있다. 전문가들과 언론의 시각에서 제재 등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데 이는 6자회담의 원만하고 순조로운 과정에 도움이 안 된다"고 못을 박았고 부시 대통령은 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밝혔다.

한 정부 당국자는 "미 네오콘을 보면 꼭 10년 전 북핵 1차위기 때 상황이 생각난다"면서 "당시 한국 내에서 '북한을 그런 식으로 다루는 게 아니다' '핵을 가진 자와는 악수할 수 없다'는 등의 강경발언이 종종 터져나와 미측에 해명해야 했다"고 회고했다. 한국 내 보수우파가 네오콘을 자극하고, 네오콘의 강경발언이 북한을 자극하는 악순환의 고리가 당분간이나마 끊어지게 된 점이 다행스럽다는 지적이다. "북한을 대화의 상대로 봐야 한다"는 'LA발언'의 연장선상이기도 하다.

윤덕민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는 노 대통령의 발의로 한국이 당분간 북핵 해결의 이니셔티브를 쥐게 됐다는 점에서 한-미정상회담에서 우리의 제안을 '노무현 이니셔티브'라고 지칭했다. 그러면서 "문제는 한국이 북한의 변화를 얼만큼 추동할 수 있느냐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북핵 해결의 본질적인 성과는 여전히 핵을 포기하겠다는 북한의 '전략적 결단'과 북한을 대화 파트너로 인정하는 미국의 '창의적 자세'에 달려 있다. 그때까지 이번 한-미정상회담이 남긴 성과는 부수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김진호[정치부 기자] jh@kyunghyang.com


바로가기

주간경향 댓글 정책에 따라
이 기사에서는 댓글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