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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SC 연출, 외교부 엑스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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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18일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을 대신해 출석한 최영진 차관은 무려 3번이나 노무현 대통령의 11월 12일(현지시간) LA발언은 외교부와 사전협의 후에 이뤄졌음을 강조해야 했다. 그것도 '어제 정동영 NSC상임위원장이 밝힌 것처럼'이라는 문구를 꼭 사용했다.

거듭해서 이렇게 답변한 것은 통외통위 소속 의원들이 자신의 질문 시간에만 자리에 앉아 다른 의원의 질문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다른 의원이 질문했을지도 모르지만 야당 의원들로서는 또다시 물을 만큼 궁금한 사안임에 틀림없었다. 특히 한나라당 박성범 의원의 질문은 더욱 날카로웠다.

"그럼(사전협의했다면) 외교부에서는 그 발언이 한-미 정상회담에서 도움이 된다고 보셨습니까?" "그것(도움이 될지, 도움이 되지 않을지)은 예단하기는 어렵습니다."

"안보부처와 상의했다" 국회 답변

박 의원은 이어서 "한-일 정상회담 개최장소, 핵문제 유엔 안보리 회부 가능성 등 요즘 외교통상부가 하는 일이 거의 되는 일이 없는데 국제환경이 어려워진 것입니까, 아니면 국내에서 외교부의 발언권이 위축된 것입니까"라며 외교의 난맥상을 추궁했다.

최 차관은 정색을 띠며 "외교부가 고민을 좀 해봐야겠습니다"라는 답변으로 넘어갔으나, 뒷줄에 앉아서 듣고 있던 외교부의 한 고위 관리는 멋쩍은 듯 웃고만 있었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LA발언 이후 외교부의 곤혹스런 입장은 국회 상임위에 출석한 고위 관리들의 모호한 표정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적극적으로 "대통령의 발언은 북한에서 핵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큰 흐름 속에 판단해야 한다"고 답변했지만 '적극적인 답변'에 못 미치는 무언가가 존재했다. 

최 차관의 3번에 이르는 답변 속에서 '외교부와 상의했다'가 아닌 '안보부처와 상의했다'라는 표현도 의미심장하게 해석된다. 외교부의 의견이 전적으로 포함되지 않았음을 표시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박성범 의원이 "외교부의 입김이 제대로 먹히지 않는 나라는 불행한 나라"라고 비판했을 정도다.

노무현 대통령의 LA발언은 앞으로 대미 관계의 새로운 전환을 선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미 문제에 대해서도 자주적인 입장을 주장했던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손을 들어준 것으로 해석된다. 외교-국방에 정통한 한나라당의 어느 의원은 LA발언을 '이종석식 발언'이라고 규정했다.

'자주파'의 주축인 NSC라인이 '동맹파'의 주축인 외교부-국방부 라인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한-미 동맹을 강조해온 외교부 쪽에서 LA발언의 진의를 설명하며 씁쓸한 표정을 지울 수 없는 것도 그래서다. 올해초에는 "외교부가 NSC와 사사건건 갈등을 빚고 있다"는 내용이 연달아 보도될 정도로 심각한 파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NSC 실무자인 이종석 사무차장은 부시 미 대통령의 재선 이후 한나라당으로부터 공공연하게 사퇴압력을 받아왔다. 한나라당은 한-미 동맹의 복원을 위해 NSC를 물갈이하라고 주장했다.

여권 내부의 한 핵심인사는 올해 초 이종석 사무차장이 남북 관계에 획기적인 성과를 연말까지 나타내지 못할 경우 올해 말 경질될 수도 있다고 내다보았다. 남북관계는 이후 계속 정상화되지 못했고 이 사무차장은 한나라당으로부터 집요한 공격을 받고 있었다.

한나라당은 11월 17일 NSC의 규모를 대폭 축소하는 개정안을 당론으로 채택했다. 법안을 발의한 권경석 의원(국방위 소속)은 "NSC 사무처를 불법으로 확대해 오히려 통일부와 외교통상부, 국방부, 국가정보원 등 안보관련 중앙부처의 고유업무 수행을 위축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국내 대미 외교라인의 불신"

하지만 노 대통령의 LA발언으로 결국 부시 대통령의 재선이 NSC에 '독'이 아니라 '약'이 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미국이 대북문제에 강경한 입장을 취할수록 더 이상 밀려서는 안 된다는 NSC의 목소리가 설득력을 얻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미 동맹을 주장했던 동맹파에는 오히려 힘든 상황이 됐다고 볼 수 있다. 대미-대북 문제에 정통한 한 여당 의원은 "노 대통령의 이번 발언은 미국을 (대북 평화기조로 이끄는) 유인책"이라면서 "한편으로는 또 국내의 대미 외교라인에 대한 불신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고 분석했다.

향후 미국의 국무성 라인이 정비될 경우 한국의 대미 라인이 새롭게 바뀔 가능성도 점칠 수 있는 대목이다. 지난 6월 김선일씨 피랍 살해사건 때 반기문 외교부 장관의 경질설이 나돌았지만 그후 잠잠해졌다. 일부 여권인사의 '대미 외교라인 불신' 언급은 '한-미 동맹만을 강조하는 대미외교 라인이 바뀌어야 한다'는 개혁 세력쪽의 입장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다.   

한나라당은 미국 대선이 끝난 직후 일부 여권 인사와는 정반대의 이유로 외교안보라인의 일대 정리를 요구했다. 한-미 동맹을 복원하기 위해 이 사무차장을 포함한 인사를 단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외교라인까지 포함됐다.

외교라인의 변동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인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있다. 국회 통외통위 소속 장영달 의원(열린우리당)은 "외교 라인의 변화는 없을 것으로 본다"면서 "다만 내년 초가 4대 주요국의 대사 임기가 만료되는 시기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NSC의 교체에 대해 장 의원은 "이 사무차장은 이미 대미관계에서도 물이 오를대로 올랐다"면서 "이 시점에 교체하는 것은 오히려 손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LA발언을 통해 볼 수 있는 '노 대통령의 구상'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외교안보 원칙과 맥이 닿아 있다. 김 전 대통령은 '미국에 대해 할 소리는 한다'는 원칙을 국민의 정부 내내 견지했다. 2001년 미국에서 가진 한-미 정상회담에서 부시 미 대통령은 김 전 대통령에게 불쾌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2003년 초 방미 때 노 대통령은 후보 시절과는 달리 대미 관계에 있어 유연함을 보여줬다. 한-미의 전통적인 동맹을 강조하며 실용주의적 입장을 나타낸 것이다. 하지만 부시 대통령의 재선으로 김 전 대통령의 노선으로 되돌아간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낳고 있다. 이와 관련, 정가에는 노 대통령의 외교라인에 있는 한 핵심 인물이 김 전 대통령측과 접촉했다는 얘기까지 나돈다.

국민의 정부 시절 청와대에서 대북 정책의 입안에 참여했던 최성 의원(열린우리당)은 "노 대통령의 발언은 김 전 대통령의 원칙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면서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의 조언을 받아 노 대통령이 그런 입장을 취한 것은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열린우리당 최재천 의원은 "노 대통령이 김 전 대통령의 원칙을 잇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 당선 당시의 초기 입장으로 돌아간 것으로 본다"고 해석했다.

노 대통령의 LA발언이 새로운 입장 변화를 의미할 수 있다는 것은 여당 의원들의 목소리에서도 감지된다. 최성 의원은 "미국이 강경하게 나서는 상황에 대북 문제에 관한 한 우리의 입장을 확고하게 내세울 수밖에 없는 노 대통령의 고충이 그대로 나타난 발언"이라고 해석했다. 장영달 의원은 "우리의 생각을 밝힘으로써 대북 협상을 오히려 촉진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윤호우 기자 ho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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