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등급제 파문

수렁에 빠진 입시정책 교육 공황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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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도덕적이어야 할 교단에서 온정주의가 판을 치고 있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사건'이다. 세칭 명문대학에 한 명의 학생이라도 더 입학시켜야 한다는 학력제일주의와 학교이기주의가 결합한 결과다. 목적을 위해선 수단-방법은 상관없다. 성적도 하나의 수단이었다. 성적은 인플레이션됐다. 아니 성적은 위조됐다.

최근 3년간 전국 2,095개 고교의 23%인 491개 고교에서 시험문제를 미리 알려주거나 기출문제를 출제했다. 교육부는 이런 사례를 1,311건이나 적발했다. 그러나 정직 이상의 중징계를 받은 교사는 단 1명뿐이다. 너무나 관대하게 조치했다. 사실상 교육현장에 만연한 모럴헤저드를 방조한 것이다. 이는 국회 교육위 박창달 의원(한나라당)이 '최근 3년간 고교 학업성적 관리실태 현황' 자료를 분석한 결과다. 서울 ㅇ고교의 ㅂ교사(국어)는 "(내가 낸)시험문제에 대해 창피하게 생각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면서 "그동안 어린 학생들에게 목적지상론을 가르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고 반성했다. 그러나 이미 때늦은 후회다. 학교교육의 능률저하는 물론 한국교육의 신뢰 수준은 '정직한 성적표'에서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결국 학생들이 더 큰 불이익 당해"

[고교등급제 파문]수렁에 빠진 입시정책 교육 공황이 보인다

한자실력만 그런 것이 아니다. 올해 이공계 1학년을 대상으로 실시한 수학성취도 측정시험 결과, '고급수학' 수강자격을 얻은 학생은 90명(7.1%)에 불과하다. 전북의 한 대학교수는 "서울대가 이 정도면 지방대야 어떻겠냐"면서 "삼각형 면적도 내지 못하는 학생들이 있을 정도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한국 교육이 세계시장에서 어떤 대접을 받고 있을까. 한마디로 대학진학률은 높은데 교육수준은 형편없는 나라다. 스위스 IMD(국제경영개발연구소)가 올해 실시한 '세계경쟁력 종합순위' 중 대학교육 순위는 60개국 중 59위였다. 최하위권인 셈이다. 최근 중국의 상하이자오퉁(上海交通) 대학이 전 세계 500위권 대학의 순위를 매긴 결과 서울대는 150~201위권 대학에 포함됐다. 500위권엔 연세대, 한국과학기술원(KAIST), 포항공대, 성균관대, 고려대, 한양대, 경북대 등 7개 대학만 추가될 뿐이다.

미래의 국가발전 토대가 되는 당장의 교육경쟁력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우리의 교육현실이 처한 양면성 때문에 학력증진을 위한 모범답안을 가까운 시일 내에 찾기가 쉽지 않다. 빈약한 정부 재정과 취약한 사학기반 때문이다. 이들 문제가 교육의 질적 변화를 꾀하는 데 장애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고교등급제에서 드러난 것처럼 대학자율권 보장에 반대할 수밖에 없는 정책공급자(교육의 공공성을 중시하는 교육당국)와 미래지향적이고 경쟁력 있는 대학을 요구하는 정책수요자(교육의 수월성(秀越性)을 역설하는 대학과 일부 학부모)가 충돌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한 달 이상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고 있는 고교등급제 논란의 끝은 어디일까. 논란이 진행될수록 학교구성원 불화-교직사회 내홍-교육정책 갈등은 증폭되고 있다. 그 홍역의 근간에는 각 교육 주체 사이의 불신과 알력이 숨어 있음은 사태의 진행과정에서 여과없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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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신 부풀리기 성적 하향화 불러

이런 논쟁의 핵심은 한마디로 '학력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하며 그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정유성 서강대 교수)와 '학력차이가 존재하는 것과 학력격차를 법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다르다'(전교조 송원재 대변인)는 것이다. 이 쟁점의 발단은 학력격차 원인을 어디서 찾느냐는 문제로 귀결된다. 송 대변인은 한 TV토론에서 "경제적 불평등이 교육 차별로 이어지고 있다"면서 "최소의 수혜자에게 최대의 혜택을 주는 것은 사회정의에 맞지 않다"고 말한다. 이런 주장의 근거는 서울대 대학생활문화원이 실시한 '2004학년도 서울대 입학생 부모 직업조사' 결과이다. 부모가 의사-변화사 등 전문직인 학생은 18.9%, 기업경영주나 고급공무원 등 경영-관리직은 20.5%였다. 반면 비숙련 노동자는 0.8%, 농축수산업은 2.8%밖에 되지 않았다. 합격자 지역분포도 이런 주장을 뒷받침한다. 광역단체 중 2004학년도에 가장 많은 합격자를 낸 서울(1,550명, 38.9%)의 경우 지역간 학력격차도 심각한 수준이다. 가장 많이 합격시킨 강남구(256명)는 가장 적은 성동구(5명)의 50배가 넘었다. 

어떻든 교육부는 '평등교육론'의 손을 들어줬다. 지난 10월 14일 안병영 교육부총리는 국민담화문에서 3불(고교등급제, 본고사, 기여입학제)정책 고수, 특목고 활성화, 내신 부풀리기 처방이라는 원칙을 분명히 밝혔다. 이는 2008학년도부터 실시될 예정인 제8차교육과정 역시 '이해찬 교육이념'의 틀을 유지하겠다는 입장인 셈이다.

"한국 조기유학생 신뢰 바닥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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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야 어떻든 고교간 학력격차를 눈으로 확인함에 따라 조기유학이 급증할 가능성도  커졌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경기도의 한 중학교 교사인 박현철씨는 "내신에 불이익을 당한다고 생각하는 많은 학생들이 조기유학에 관심을 갖게 될 것"이라면서 "쇠뿔을 빼려다가 소를 죽이는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인적 자원의 해외 유출이라는 더 큰 화를 부를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유학 에이전시들은 유학시장의 확대를 기대하지 않는 분위기다. 고객감소를 우려해서가 아니다.

"걱정이다. 한국 유학생의 내신성적을 믿어주겠냐." 서울 종로구에 있는 한 유학원 실무담당자는 "미국 대학도 고등학교 성적만으로 입학허가를 하는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를 중심으로 유행하고 있는 '칼스테이 프로그램'은 고등학교 1-2학년의 성적으로 입학허가하는 방식이다. 이 프로그램은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는 추세다. 유학 주선을 하고 있는 (주)코리아 토인비 황현철 사장도 "아직까지 한국 유학생의 학교성적을 문제삼았던 외국 대학은 없었다"고 전제하면서도 "입학허가를 내게 될 미국 대학은 주한 미국대사관을 통해 유학생 재학 혹은 졸업대학교의 랭킹까지도 체크하는데 '내신 부풀리기' 사실이 알려지면 한국 조기유학생의 학력에 대한 신뢰는 땅에 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교육의 주체들이 불신과 증오, 갈등과 알력이 있는 분위기 속에선 미래를 위한 교육정책이 나올 수 없다. 99명의 보통사람을 희생하면서 1명의 천재를 키워서도 안 된다. 보통사람 99명을 위해서 천재 1명이 빛을 잃어서도 안 된다. 보통사람들이 천재를 외국으로 몰아내선 더욱 안 된다. 소모적 논쟁에서 벗어나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아야 한다. 그 지혜는 교육의 공공성이나 대학의 자율성 어느 한편에 있는 것은 아니다.

김경은 기자 jj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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