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등급제 파문

"학교보다 학원 신뢰할 수밖에 없어요"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자녀교육 위해 강남이사-고교자퇴 결정한 한 학부모 수기

고등학교 자퇴생 딸을 둔 직장여성이다. 고교등급제 때문에 대학, 정부, 전교조 사이에 공방이 뜨겁지만 정작 주인공이자 희생양인 학생과 학부모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학교에서 가르치고 점수 주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대학에서 원하는 조건에 맞는 학생을 골라 뽑으면 뽑히는 대로 순응하는 것이 대한민국 학생들과 부모들이기 때문이다. 주와 객이 바뀐 교육현실이 너무 억울하고 답답하다. 

[고교등급제 파문]"학교보다 학원 신뢰할 수밖에 없어요"

현재 17세인 딸 하나를 키우는데 시집도 보내기 전에 집을 팔아야 했고, 생활비의 80%를 사교육에 퍼붓고 있다. 그래도 소위 명문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그렇다고 아이에게 시골출신도 명문대학 가니 혼자 알아서 공부하라거나 대학은 행복과 무관하니 마음대로 살라고 할 용기도 없다. 아무리 학벌파괴가 일어난다고 해도, 상고 출신 대통령이 연이어 등장해도 '명문대'란 간판을 따지 않고서는 명함을 내밀 수 없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특히 남자들의 경우엔 학벌에 상관없이 장사나 부동산 등으로 치부를 해서 경영대학원 등의 학벌로 만회하면 상류사회 진입이 가능하지만 여자들의 경우엔 취직은 물론 결혼시장에서도 탈락하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 가족은 직장 때문에 강북에 살았다. 아이가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아무 걱정이 없었다. 아이는 건강했고 교우관계도 좋았으며 수우미양가나 석차가 안 나오는 새로운 교육방식의 성적표를 보면 아이는 학교생활도 잘 적응하며 수학, 체육 등에만 그저 '노력'이 요구될 뿐이었다. 학습지 정도에 의존하며 무사히 중학교에 진학했다. 아이 말로는 친구들은 학원도 다니고 과외도 한다고 했다. 다른 친구들은 이미 외국어고교 등 특목고 진학을 위한 학원도 다니고 어떤 친구들은 어머니가 강남 학원까지 매일 데려다준다고 했다. 강남 사는 친구들을 만나보니 나처럼 대책없이 '순수한 자연인'으로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방임죄에 해당된다고 했다. 동네 근처 학원을 다녔으나 학생이 없어 몇달 만에 문을 닫았다. 과외선생을 수소문하니 실력있는 선생들은 강북에는 다니지 않는다고 했다. 딸의 친구 엄마들에게 물어보니 강북에서도 실력있는 아이들은 이미 초등학교 때부터 그룹 과외반을 운영해 절대 다른 아이들이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남편과 상의하고 다른 이들의 조언을 얻어 학원도 많고 과외선생도 구하기 쉬운 강남으로 이사를 결정했다. 집을 판 돈은 평수를 줄였는데도 강남 아파트의 전세값밖에 되지 않았다. 중학 2학년 가을, 이사와 함께 아이도 전학을 하고 학원에 등록했다. 아이는 처음 한두달은 울면서 다녔다.

[고교등급제 파문]"학교보다 학원 신뢰할 수밖에 없어요"

"엄마, 학원에서 선생님이 쉬운 문제를 풀면서 '이런 유치한 강북수준의 문제는...'이라고 해요. 또 이곳 애들은 벌써 고등학교 수학을 시작했어요. 난 중2 수학도 겨우 푸는데... 외국에서 살다온 아이가 많아 영어도 완전히 본토발음이야. 가방이며 신발도 다 브랜드고 나보고 촌스럽다고 놀려. 나 전에 살던 곳으로 갈래."

조금만 참으면 적응할 거라고, 고생한 만큼 보람이 있을 거라고 아이를 달랬지만 속이 쓰렸다. 강남에는 학원비가 강북보다 2배나 비싼 곳도 있고 과외비도 높다. 뿐인가. 작은 소품까지 유명브랜드로 치장해야 왕따를 당하지 않기 때문에 아이에게 들어가는 돈이 장난이 아니다. 그야말로 뱁새가 황새 따라가는 격이다.

딸은 고등학교에 진학했는데 내신 성적이 1등급이 아니었다. 유치원 때부터 선행학습을 하며, 체육시험을 위해서는 체대생들을 초청해 단기과외를 하고 성악지도까지 받아온 아이들을 따라가기 힘들었다. 시험 때면 실컷 밤샘 공부를 하고도 "아, 어젠 드라마 보다가 잤어"라고 말하는 가면을 쓴 친구들도 역겹다고 했다. 수업시간에 아이들이 졸거나 휴대폰으로 문자메시지를 보내도 야단도 안 치고 모노드라마하듯 수업을 진행하는 선생님에게도 존경심을 가질 수 없다고 토로했다. 학교에서는 아이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 같은데 학원에서는 조금만 지각을 하거나 결석을 하면 득달같이 전화를 하고, 아이의 특성과 성적을 파악해 수시로 상담을 해줬다. 그러니 당연히 학교보다 학원에 의존하고 신뢰할 수밖에 없다. 

아이가 학교 마치고 다시 학원에 갔다 집에 돌아오면 12시. 수학은 꼭 과외를 더 해야겠다기에 12시에 과외를 시작하면 새벽 2시에 끝난다. 학교에 가면 자거나 학원-과외숙제를 한다고 했다. 아침도 제대로 못 먹고, 엉망인 학교 급식에 의존하고, 학교 끝나면 근처 김밥이나 햄버거로 대충 때우고 다시 학원에 가는 생활을 반복하다보니 아이 얼굴도 창백해졌다. 그걸 바라보는 에미 가슴은 아예 타들어갔다.

미국이나 동남아 유학을 고려해보았으나 연고지도 없고 사춘기 딸을 혼자 보내는 것은 모험이었다. 조기유학 성공률은 10%밖에 안 된다는데, 딸과 함께 보낼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그런 무모한 도전은 싫었다. 마음 약한 아이도 유학은 가고싶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자퇴를 결정했고 현재 학원과 과외를 받으며 검정고시와 수능시험을 준비중이다. 그리고 우리는 아이의 과외비를 위해 부모님이 물려주신 땅도 팔아야 할 것 같다. 아이가 무사히 명문대에 들어가면 우리 가족은 행복해질까.

글 | 김효숙(43-서울 강남구 대치동)


바로가기

주간경향 댓글 정책에 따라
이 기사에서는 댓글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