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조 9호세대 비화

관악산 유격대 '삼우일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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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춘승(현 지환테크 대표, 관악민주포럼 회장)은 논리가 명쾌하고 사리 판단이 분명했다. '4년 시한부 학생운동은 한계가 있다. 단발 희생타로 끝나버리는 시위로는 사회의 근본을 바꾸는 것은 고사하고 눈앞의 정권을 무너뜨리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혁명은 결코 4년짜리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 역시 관악 언더그룹의 메인스트림과 인식을 같이하고 있었다. '학생운동은 혁명이라는 장기전을 준비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깨어 있는 학생 역량이 민중 속으로 구석구석 스며들어 혁명의 불씨가 되도록 해야 한다. 하방(下放). 대학 4년은 이를 준비하기에도 충분하지 않은 기간이다.'

그런데... 그는 혼란스러웠다. 흔들리고 있었다. 3년 동안 금과옥조처럼 지켜온 신념, 그 자신은 물론 그가 속한 패밀리가 공유해온 '모범답안'을 버려야 하는 상황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느꼈다.

"학교가 너무 조용하지 않아?"

1974년 광주고를 졸업하고 그해 서울대 사회계열에 입학한 그는 농촌법학회(농법회)의 식구가 됐다. 그는 농법회 1년 선배이자 리더인 이범영(전 민청협 의장, 작고)과는 '계급'부터 달랐다. 깡촌(전남 장흥군 장평면) 출신이고, 빈농의 아들이었다. 몸속에 흐르는 '피'가 더 뜨겁고, 더 빨리 끌어오를 수밖에 없는 훌륭한(?) 성분이었다.

[긴조 9호세대 비화]관악산 유격대 '삼우일승'

당시 학내에 향토개척단이라는 연합서클이 있었다. 법대 농법회, 상대 농업경제학회(농경회), 사대 향토개발회, 자연대 황토, 약대 소(牛)모임, 공대 향토공학회, 농대 농연(한얼-농사단-개척농사회의 연합조직) 등 농촌 관련 서클을 망라한 것이었다. 양춘승은 이 향토개척단의 단장을 맡았다.

일반적으로 캠(학생운동)의 지휘권은 3학년이 갖는다. 1~2학년 때는 '공부'에 전념하다가 3학년이 되면 후배를 지도하고 '집안'을 건사하고 운동을 지휘하는 등 전권을 행사한다. 74학번이 3학년이 된 1976년 서울대 내에는 운동성 있는 서클을 중심으로 언더그룹이 구축돼 있었다. 한국사회연구회(한사)-농법회-농경회-국제경제학회(국경회)-이론경제학회(이경회)-역사철학회(역철회)-흥사단아카데미(아카데미) 등 10여개 패밀리 대표가 비밀 회합을 통해 활동을 조율하고 있었다. 농법회와 향토개척단을 대표하고 있는 그도 이 그룹의 일원이었다.

양춘승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1학기가 '조용히' 지나간 1976년 여름이었다. 아무리 조직이니 민중이니 현장이니 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학교가 이렇게 조용해서야 되겠느냐는 얘기가 운동권 내부에서 조금씩 흘러나오는 시점이었다. 그의 예민한 귀가 이를 놓칠 리 없었다. 그리고 그 소리는 몇 십배 증폭돼 그의 내면을 뒤흔들었다.

그의 이런 마음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경제학과 동기 김창우(전 부산지역일반노동조합 집행위원)였다. 그는 가장 선진적인 이론으로 무장한 그룹인 한사의 리더였다. 그러니만큼 이론에서 당할 자가 없을 정도로 예리하고 철저한 면이 느껴지는 친구였다. 교문 앞에서 그의 '콜'을 받은 양춘승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학교가 너무 조용하지 않아?"

지나가는 말투였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그 말이 무얼 뜻하는지를. 그 역시 지나가는 말처럼 되받았다.

"어디 할 놈이 있을까."

그것은 사실이었다. 뭔가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는 분위기는 분명 있었지만, 움직일 사람을 찾아내고 규합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그런데 김창우의 말이 그의 귓전을 때렸다.

"내가 좀 알아볼게."

[긴조 9호세대 비화]관악산 유격대 '삼우일승'

당시 서울대 이념서클은 대부분 이중구조를 채택하고 있었다. 서클을 책임지는 실질적인 리더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게 일반적이었다. 공식적인 회장은 기관원의 주목을 받지 않는 사람으로 등록하고 실제로 서클을 꾸려나갈 사람은 따로 두는 식이었다. 김창우는 한사의 살림과 대외 활동을 책임지는 실질적인 수장이었다.

하급공무원 집안의 4남1녀 중 장남으로 제주도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를 따라 부산에 정착해 부산고를 나온 그는 이론에도 강했지만 실천력 또한 강했다. 74학번 언더그룹의 일원이면서 73학번 선배와도 긴밀한 커넥션을 맺고 있는 핵심 인물이었다.

한여름의 '도원결의'

'사람을 모으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자신은 결단을 내렸어도 남의 인생을 망치라고 권유하는 것은 인간적으로 괴로운 일일 수밖에 없다. 또 의식과 의지만 있다고 되는 게 아니다. 깔끔하게 일을 치를 수 있는 능력 또한 갖고 있어야 하며, 그 뒤에 닥칠 가혹한 상황을 받아들이고 극복할 수 있는 '프로'여야 한다.

박형규 목사(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의 제일교회 팀에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사대 역사학과 74학번 박찬우(전 여수YMCA 파견간사)였다. 기질이 강하고 드세 보이지만 한없이 순한 구석도 있는 그는 선배그룹이 촉망하는 재목이었다. 체구가 건장하고 강단이 만만치 않은 데다 검도 유단자였다. 그것만이 아니다. 머리가 영민했고 특히 기억력이 비상했다. 언변 또한 '박구라'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좋았다.

전남 나주 출신으로 광주에서 영세 자영업을 하는 집안의 6남2녀 중 3남인 그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자라 자립심이 강했다. 광주일고를 거쳐 서울대에 입학한 그가 새로운 세상에 눈뜬 것은 제일교회와 인연을 맺으면서였다. 선배의 소개로 용산 바울학사에 들어간 그는 제일교회의 중랑천변 빈민촌 야학에 참여했다. 그는 철거민들의 피눈물나는 삶과 그 가운데서도 피어나는 따뜻한 정을 체험하고 스스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깨쳤다.

"이런 세상은 안 된다"며 고뇌하던 그는 뒤늦게 학내 기반을 갖기 위해 사대 향토개발회에 입회, 향토개척단의 일원이 됐다. 1976년 여름, 그의 마음은 이미 '정리'돼 있었다. 양춘승-김창우가 바울학사를 찾아왔을 때 그는 '혁명가의 길'을 걷기로 작심하고 있던 참이었다.

뜻밖의 인물이 또 한 사람 있었다. 제주일고 출신의 김천우(현 강창일의원 보좌관, 전 SK글로벌 상무). 3학년 1학기까지 맡고 있던 아카데미 회장 자리를 다음 사람에게 넘기고 개인의 진로를 모색중인 법학도였다. 74학번 언더그룹의 아카데미 대표였던 그는 내부 논의를 거쳐 사법시험 준비를 하기로 잠정결정한 상태였다. 법학 전공이니 인권변호사의 길을 가는 게 좋다는 이너그룹의 의견을 따르기로 한 것이다.

그는 차분하고 심지가 굳은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운동뿐 아니라 일상 활동에서도 모범적이었으며, 고향 제주에서 기대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가 사법시험을 준비하면 오래지 않아 금의환향할 것을 그를 아는 사람은 별로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사시 공부는 일주일을 넘기지 못한다. 3일째 김창우가 찾아와 흔들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는 생각했다. 피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하방도 좋고 인권변호사도 좋지만 필요할 때 치고나가지 못하면서 어떻게 민중을 말할 수 있는가. 이런 마음으로 헌법을 보니 더 부아가 치밀었다. 5일째 되는 날 그는 법전을 팽개쳐버렸다. 그리고는 김창우에게 달려갔다.

양춘승과 김창우-김천우-박찬우. 이름 끝자를 따서 뒷날 '삼우일승'으로 불리는 거사팀이 조직된 때는 한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1976년 7월 말이었다. 이 사실은 박석운(현 전국민중연대 집행위원장)-백계문(현 한국증권금융 상임감사)-이범영 등 73학번 선배그룹에도 전해졌다. 8월 중순 이들 7명은 비밀리에 경기 송추로 떠났다. 거사를 위한 작전회의이자 향후 학생운동의 방향을 설정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세상 일이란 계획한 대로 척척 결과가 나오지 않는 법. '송추작전' 역시 그런 세상사의 이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73학번 삼총사와 74학번 4인방의 계획은 예기치 못한 변수 때문에 뒤죽박죽돼버린다. 작전이 종료되기까지 무려 7개월이 소요되는 것이다. 그 과정에 중단과 재시도, 수정, 반복 등 첩보전을 방불케 하는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송추 7인 회합에서 애초에 수립된 작전은 다음과 같다.

*73학번은 데모를 하지 않는다.

*양춘승-김천우-박찬우 3인이 첫 테이프를 끊는다.

*김창우는 남아서 후속 시위를 조직한다.

*D데이는 10월 축제 전후로 한다.

송추에서 돌아온 거사팀은 발빠르게 움직였다. 일단 주변 정리를 깨끗이 하는 것이었다. 가족 등 사적인 부분은 물론 자신이 소속한 조직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게 최우선이었다. 그 다음은 은인자중하는 것이었다. 3명이 모든 책임을 지려면 주변과 관계를 단절하는 것이 바람직했다. 이들은 송추 모임 이후 73학번 삼총사와도 '거래'를 끊었다.

길고 긴 7개월의 대장정

주변 정리를 완료한 뒤 이들이 잡은 D데이는 10월 22일. 이때부터 이들은 동선을 극도로 제한하고 시간대별로 알리바이를 맞췄다. 불가피하게 거사팀 외의 인물을 만날 경우 알리바이를 조작해서 기억 속에 각인시켰다. 이런 가운데 불거진 뜻밖의 변수가 바로 10-15축제데모, 이른바 감나무골 사건이었다.

[긴조 9호세대 비화]관악산 유격대 '삼우일승'

양춘승의 최근 회고다. 다행히 박찬우가 무사히 풀려나면서 거사팀은 복원됐지만 작전을 다시 짜야 했다. 이미 학기가 마무리되는 시점이라 해를 넘길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거사 일정이 재조정됐다. 다음해 새 학기가 시작되면 맨 먼저 치고나가기로...

삼우일승팀의 첫 번째 거사 실패가 낳은 결과가 73학번 삼총사의 12-8시위였다. 데모를 하지 않기로 한 박석운-백계문-이범영이 졸업시험을 끝내고 전격적으로 시위에 나섬으로써 기대 이상의 극적 효과를 연출한 셈이었다. 양춘승 등 74학번 거사팀은 선배들의 거사를 먼 발치에서 지켜보았다.

이렇게 해서 학생운동의 주력인 74학번이 한 번도 거사를 하지 못하고 해가 저물자 언더그룹 내부 분위기가 심상찮게 돌아갔다. 2학기부터 양춘승으로부터 지휘봉을 넘겨받아 향토개척단을 이끌고 있던 오세범(전 내일신문 업무기획실장)이 '공개적'으로 불만을 터뜨린 것이다.

양춘승이 오세범에게 향토개척단장을 넘겨줄 때 둘 사이에 나눈 은밀한 얘기가 있었다. 농경회 소속인 오세범은 군 입대를 앞두고 있었고, 제대 후 노동현장으로 가기로 진로를 설정하고 있었다. 이를 아는 양춘승은 "내가 뭔가를 하기로 했으니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군대에 갔다 오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의 거사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뒤 겨울방학 때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그 얘기를 꺼낸 것이다.

"춘승이 넌 하기로 해놓고 왜 안하는 거야?"

"아, 그건... 하려고 했는데 용기가 안 나 포기했어."

임기응변으로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상황은 간단치 않았다. 오세범이 독자적으로 뭔가 일을 꾸미는 움직임이 감지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왕 하기로 했으면 서로 일정을 조정하는 게 낫기 때문이다. 그는 오세범을 만나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고 "3월 24일경에 우리가 먼저 나갈 것이니 후속타를 쳐라"고 말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1977년 3월 새학기가 열렸다.

아무리 굳은 결심도 너무 오래 끌면 물렁해지는 게 사람이다. 하지만 양춘승-김천우-박찬우는 그럴 수 없었다. 관악에 봄이 다시 찾아오면서 반년 넘게 표류해온 이들의 거사도 가부간 결말을 내야 할 상황에 내몰렸다. 이들은 지치고 느슨해진 마음을 다잡고 막바지 준비에 돌입했다. 이미 한 차례 도상연습을 한 셈이라 별다른 시행착오는 없었다.

그들에게 닥친 불길한 기운

판결문에 따르면 이들은 3월 20일 김천우의 사당동 자취방에서 시위에 사용할 유인물인 '민주구국선언문' 초안을 작성하고 23일 확성기와 플래카드 제작에 필요한 페인트와 포목, 종이 등 시위용품을 구입했다. 거사 일시는 24일 점심시간. 이들은 거사 당일 플래카드와 유인물 등을 각자 가방에 나눠 학교로 운반했다.

[긴조 9호세대 비화]관악산 유격대 '삼우일승'

두 번째 거사마저 불발되자 세 사람은 허탈한 마음으로 사당동 아지트에 돌아왔다. 이제는 지푸라기도 잡아야 할 판이었다. 이들은 도로 가져온 시위용품을 놓고 막걸리를 따랐다. 기우제를 지낸다는 얘기는 들었어도 그 반대되는 제를 지내는 경우는 들어보지 못했지만 이들은 하늘에다 빌었다. 맑은 날을 기원하는 '청명제'였다.

1차 시도... 실패. 2차 반복... 실패. 그래도 포기할 수 없다. 이들은 곧바로 3차 반복에 들어갔다. D데이는 4일 후인 3월 28일. H아워는 학생들이 점심식사를 마칠 무렵인 낮 12시 45분. 장소는 5동과 8동 사이의 계단. 유인물과 현수막, 확성기는 이미 준비돼 있고 청명제까지 지냈으니... 이들은 성공을 확신했다. 막걸리의 기분 좋은 취기가 가슴 구석에 숨어 있는 일말의 불길한 생각까지도 말끔히 걷어내 주었다.

'1977년 대투쟁'의 막을 연 서울대 1차 시위는 이런 우여곡절 끝에 성사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시위의 전개 과정은 학생들에게 또 다른 충격을 안겨주었다. 충분히 예상했던 것이라고 하더라도 막상 그것이 현실로 나타났을 때는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그런 것이었다.

신동호 편집위원 hudy@kyungh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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