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조 9호세대 비화

사건전장에서 피어난 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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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편물을 뜯어보던 학생회 간부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봉투에서 나온 것은 달랑 면도칼 하나. 다른 어떤 메시지도 없다. 단서는 겉봉에 적힌 발신지뿐이다. '이화여대 총학생회'라는 여덟 글자. 그렇다면... 학생회 간부가 소스라친다. 남자에게 던지는 최고의 모욕, ... '잘라라'!

[긴조 9호세대 비화]사건전장에서 피어난 꽃들

이름하여 '이화여대 면도칼 사건'. 우스개 같은 이야기지만 긴급조치 9호 시대 대학가의 정서를 적나라하게 말해준다. 1970년대 학생운동에서 '이화여대'의 명성과 상징성은 이 '유비통신'이 전하는 그대로다. 대학가가 실의와 좌절과 침묵에 빠져 있을 때 그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용기와 열정을 불어넣고, 행동으로 보여줌으로써 침묵을 질타하고 운동을 채찍질했다.

이화여대가 꺼져가는 학생운동의 불씨를 살린 예는 그 전에도 있었다.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이 조인되고 각 대학이 '정치방학'에 들어가면서 학생운동이 파장 분위기에 접어들 때였다. 진민자(현 한국청년문화원 원장)-신인령(현 이화여대 총장)-차명희(전 여성특별위원회 사무처장) 등 62학번 지도부 3인방이 6-23가두시위에 이어 108시간 단식투쟁을 주도한다. 이들의 거사는 대학 연대 조직인 한비연의 결성과 방학중의 한일협정 비준반대 투쟁을 촉발, 8-26 위수령 사태로 이어졌다.

차라리 '잘라라'

1973년 서울문리대 10-2데모의 꺼져가는 열기를 되살린 것도 이화여대였다. 김옥길 총장이 망토를 휘날리며 선두에 서서 정문 앞 150m까지 진출한 11-28가두시위는 선뜻 데모에 나서지 못하고 있던 주요 대학에 '면도칼'을 던진 격이었다. 이 시위에 자극받은 전국 주요 대학이 총궐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유신정권의 항복선언이나 다름없는 12-7석방조치와 이듬해 민청학련 사건을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이화여대 학생운동의 이런 전통은 긴급조치 9호 시대에 이르러서는 더욱 '공격적'이 돼 있었다. 서울대 오둘둘 데모 후 대학가가 깊은 적막에 빠져든 1975년 6월 19일 의대 본과 3학년 김매자(현 울산병원 부이사장)와 대학원 신방과 2학년생 김경애(현 동덕여대 교수-도서관장, '여성인물을 화폐에! 시민연대' 대표)가 구속된다. 김매자의 의대 후배 10여명과 김경애의 대학원 후배 황루시(현 관동대 국문학과 교수)도 함께 연행돼 조사를 받는다.

'이화여대 손수건 판매사건'으로 명명된 이 사건은 여대생의 첫 긴급조치 9호 위반 사건이다. 보름 전 터진 '전대련 사건'으로 이대생 박진선(종교 활동)이 구속된 바 있지만 여대생이 주도해 일으킨 사건은 이것이 처음이다.

사건 주동자인 김매자는 무남독녀로 장래가 촉망되는 의학도였다. 그는 이 사건으로 약 3개월간 서울구치소(현 서대문독립공원)에 구금되고, 그해 의사 자격시험을 칠 기회마저 박탈당한다. 하지만 학교측의 노력과 신현확 보사부 장관의 특별 배려로 응시원서 뒤에 '빨간 딱지'를 붙이고 시험을 쳐 전국 수석을 차지, 주변을 놀라게 했다. 공범인 김경애 역시 교칙 한 번 어기지 않고 학부를 졸업한 모범생이었다. 그의 부모는 딸이 의대에 가길 원했지만 그는 "사회를 고치는 의사가 되겠다"며 신문방송학과에 지원했고, 대학원 과정을 마친 뒤 유학할 계획이었다.

이렇게 운동권 본류가 아닌 그룹이 학내 긴급조치 9호 위반 사건 1호를 기록한 것은 뜻밖이었다. 뒤집어 생각하면 이화여대 학생운동 저변이 그만큼 넓었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이 즈음 이화여대에는 나름대로 이념서클도 자리를 잡고 있었고, 학생회와 [이대학보] 등 공조직도 학생운동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여느 대학과 마찬가지로 이화여대 학생운동도 '68그룹'이 활동하던 시기를 대도약기로 볼 수 있다. 이대 68그룹으로는 이옥경(현 미즈엔 대표)-김순진(전 풀빛출판사 편집주간)-신혜수(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상임대표) 등 '68학번 삼총사'가 유명하다. 이미경(현 열린우리당 의원)-최영희(현 내일신문 부회장)-장하진(전 한국여성개발원 원장, 현 충북대 교수)은 '69학번 삼총사'로 불린다.

이들 68그룹이 중심이 돼서 1971년 만든 서클 '새얼'은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이화여대 학생운동의 시작이자 기반이 된다. 3학년까지 학보사 기자를 한 이옥경은 4학년이 되자 학내에 사회성 있는 서클 하나를 만들어놓고 졸업하고 싶었다. 1년 후배인 동생 이미경이 최영희-장하진을 소개했다. 이들이 의기투합해 만든 새얼은 실제로 대한민국 여성의 '새로운 얼'을 찾는 일을 톡톡히 하게 된다.

이옥경과 조영래의 만남

'한국 여성운동의 대모' 이효재 교수의 지도와 63학번인 한명숙(현 열린우리당 의원) 등 선배 운동권의 후원을 받으며 출범한 새얼은 이화여대 학생운동의 심장부로 급부상한다. 이들은 교내 학생운동을 주도하는 한편 서울대를 비롯한 타대학 학생운동권과 연대에도 앞장선다. 남자들 판이던 학생운동에 여자가 끼어들면 분위기가 달라질 것은 불문가지. 새얼 1세대를 시발로 이대 운동권은 대학 운동권 전체를 끈끈하게 이어주는 접착제 구실을 한다. 그 신호탄이 이옥경과 서울법대 운동권 조영래(작고)의 만남이었다.

[긴조 9호세대 비화]사건전장에서 피어난 꽃들

새얼 운동권 커플의 면면은 쟁쟁하다. 68학번 이옥경(조영래)-신혜수(서경석), 69학번 이미경(이창식)-최영희(장명국)-장하진(김홍명), 70학번 김은혜(신철영), 71학번 오성숙(김세균), 73학번 김희은(김경남)-인재근(김근태)-김귀균(장상환) 등이 대표적이다. 새얼 출신은 아니지만 68학번 김순진(나병식)-조무하(장기표), 71학번 이혜경(양길승), 72학번 박혜숙(최민화)-이경숙(최규성), 73학번 양해경(김학민)-이혜경(유인태), 74학번 김영인(김봉우)-이정숙(이선근), 75학번 최정순(이을호)-박인혜(이호웅) 등도 유명한 운동권 커플이다.

이들은 남편 또는 예비 남편의 도피처 제공이나 옥바라지 등 든든한 조력자가 됨으로써 '직업운동가'의 출현을 가능케 했다. 하지만 거기에만 머물지 않았다. 후원자이자 동지로서, 그리고 운동의 주체로서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오늘날의 '우먼파워'는 이 무렵 형성된 이화여대 학생운동 역량의 결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새얼은 서울대 운동권과 만나면서 한 단계 도약한다. 학내 문제에서 학외 문제로 눈을 돌리기 때문이다. 이옥경은 "새얼은 원래 학교 울타리 안에서 활동하려고 만든 서클이었다"며 "그런데 외부 남학생과 연결됨으로써 사회 전반적인 문제에 눈을 떠 학생운동에 깊이 휩쓸려들었다"고 최근 회고했다.

앞에 소개한 1973년 11-28가두시위가 단적인 예다. 이 시위의 주동자는 김은혜(전 부천 여성의 전화 회장)는 새얼 출신이었다. 이날 김은혜는 대강당에서 실시된 채플이 끝나자마자 마이크를 잡고 학생들을 선동, 4,000여명을 교문 밖으로 이끌었다. 이듬해 민청학련 이화여대책으로 지목돼 도피에 들어간 오성숙(전 참교육을 위한 전국 학부모회 회장), 전대련 이화여대책으로 지목돼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된 박진선(수학과 73학번)도 새얼의 핵심 인물이었다.

여성의 힘 '새얼'과 '파워'

새얼은 70학번 김자혜(현 소비자문제를 연구하는 시민의 모임 사무총장)-강명순(현 부스러기사랑나눔회 상임이사-안산제일감리교회 목사), 72학번 정선자(여성민우회 활동)-김혜숙(현 이화여대 교수-철학), 74학번 홍미영(현 열린우리당 의원) 등 많은 인재를 배출하고 1980년 해체된 뒤 '참솔'로 이름을 바꾼다.

새얼을 더욱 새얼답게 만든 것은 졸업 후에도 운동을 이어간 힘이었다. 창립 멤버인 이옥경-이미경-최영희-장하진 등은 졸업 후 활동에 대해서도 역할을 분담했다. 이옥경과 장하진은 대학원에 진학해 후배들을 의식화하는 일을 맡았다. 이미경은 교회로 들어가 민주화운동에 투신하고, 최영희는 인천산업선교회를 기반으로 노동운동을 펼치기로 했다. 그리고 그 언약을 지켰다.

이 즈음 이화여대에는 새얼뿐 아니라 파워나 흥사단아카데미 등도 만만찮은 역량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들 세 서클과 공조직인 학생회-학보사가 긴밀히 공조해 학생운동을 이끌고 있었다.

[긴조 9호세대 비화]사건전장에서 피어난 꽃들

하지만 파워가 이대 학생운동의 전면에 부상하는 것은 1974년 들어서다. 그해 2월 수도권 특수지역 선교위원회 사건의 여파로 70학번 차옥숭(현 한일장신대 교수)이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구속되면서다. 파워의 핵심인 그는 KNCC 공보담당 간사로 활동하면서 긴급조치 1호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유인물을 각 교회에 배포했다.

[긴조 9호세대 비화]사건전장에서 피어난 꽃들

민청학련 거사일인 1974년 4월 3일 이화여대에는 4,000여명의 학생이 강당에 모인다. 이때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명의의 유인물을 뿌린 박혜숙(약학과 72학번)이 파워 소속이다. 파워는 72학번 강정례(미국 거주), 73학번 조순경(현 이화여대 교수, 고 조영래 변호사의 동생)-정영애(현 청와대 균형인사비서관)-염미봉(현 광주여성의전화 회장, 염동연 열린우리당 의원의 동생) 등으로 이어지는데, 뒤에 '봄뫼'로 이름을 바꾼다.

긴급조치 시대에 접어들면 이화여대 학생운동은 흥사단아카데미까지 가세해 백가쟁명의 모습을 띤다. 이 시기에 맹활약하는 그룹이 전남여고 동기생인 정강자(현 한국여성민우회 공동대표)-김선숙(미국 거주)-정선자 등 72학번 삼총사였다. 이들은 계보가 제각각이었다. 정강자는 흥사단아카데미, 김선숙은 학보사, 정선자는 새얼이었다.

이들은 1974년 9월 23일 민청학련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는 '8천 이화인에게'라는 성명서를 낭독하고 서명운동을 결의하면서 함께 경찰에 연행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요주의 인물로 찍히지만 이들은 활동을 멈추지 않는다. 1975년 4-9선언문 사건으로 김선숙은 제적되고, 10월에는 정선자가 [새벽]지 배포사건으로 구속된다.

이대생 손수건 판매사건은 이런 토양에서 불거졌다. 주범인 김매자는 긴급조치 1호를 위반한 전과가 있는 데다 의대 의식분자들의 모임인 '한마음회'를 이끌고 있었다. 68학번인 김경애는 학부를 마친 뒤 [이대학보] 상임기자로 일하면서 대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비록 운동권의 본류는 아니어도 학내 분위기상 학생운동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동아사태'라는 좋은 아이템까지 있었다. 특히 이화여대로서는 동아사태가 비운동권 학생까지 자극할 수 있는 부담 없는 소재이기도 했다. 1975년 3월 18일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가 결성되자 즉각 지지 성명을 낸 학교가 이화여대였다. 당시 4학년으로 이화여대 흥사단아카데미의 핵심이던 정강자의 회고.

"동아사태가 우리에게 준 충격이 매우 컸다. 새벽에 끌려나와 기독교회관에 농성하는 동아투위 아저씨-그때 우리에겐 아저씨였다-들을 위문하러 갔을 때 퀼트 이불 같은 것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이 너무 처연했다. 그래서 각 서클이 나서서 동아투위 돕기 운동을 했다. 우리 서클도 도봉산에 가서 '동아커피'를 팔았다."

김매자가 문제의 손수건을 제작한 것은 이런 와중이었다. 그는 시위 과정을 상징하는 동양화, '나라에 도가 없으면 행동은 대담하게, 말은 겸손하게 하라'(邦無道危行言孫)는 [논어] 헌문편(憲問篇)의 구절, 윤동주의 [서시]를 각각 넣은 세 종류의 손수건을 만들었다. 디자인은 서울미대에 다니는 친구가 예쁘게 해주었다.

"동아투위 아저씨들 도와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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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수건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김경애는 자신의 거처인 연희동 아파트에 손수건을 쌓아두고 졸업한 친구들에게 팔았다. 황루시가 그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김경애의 기억에 따르면 장사가 너무 잘된 것이 탈이었다. 기관원에게 들통이 나서 김매자와 함께 구속된 것이다.

부모님이 나를 기숙사에 넣지 않고 아파트를 사서 언니와 함께 있게 했다. 그런 부르주아적(?) 환경 때문에 운동권에서 따돌림을 받기도 했다. 나는 손수건 제작에는 참여하지 않고 집이 아파트라 보관하고 팔기만 했는데 내 루트에서 들켜버렸다. 너무 잘 팔려 잡혀갈 때 손수건 판 돈 10만원을 지니고 있었다. 그걸 서대문경찰서 형사한테 빼앗겼는데 그때는 잡혀가는 것보다 돈을 빼앗긴 게 더 억울해서..."

[긴조 9호세대 비화]사건전장에서 피어난 꽃들

김매자와 김경애가 잡범 방에 따로 수감된 것은 휴가철이어서였다. 판검사들의 여름휴가로 재판이 제대로 되지 않아 늘어나는 미결수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환경이 순진한 언론학도였던 김경애를 여성학도로 만들었고, 또 한 사람의 여성운동가를 탄생시킨 배경이었다.

"절도-사기-매춘-마약사범들과 같이 있으면서 사회 현실과 여성의 고통을 알게 됐다. 그 전에는 대한민국의 모든 여자가 대학에 가는 줄 알았다. 언론이 사는 것이 나라를 바로세우는 길이라고만 믿고 가난한 사람을 만날 기회가 갖지 못했던 것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감옥에서 언론학을 버리고 여성학을 택했다."

신동호 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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