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Ⅰ

"로데오거리도 초토화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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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불황의 그늘이 깊어지고 있다. 경기침체에 따른 소비 위축으로 그동안 불황의 무풍지대였던 서울 압구정동마저 불황의 늪에 빠진 지 오래며, 경기를 가늠해볼 수 있는 빈택시가 갈수록 늘고 있다. 일각에서는 부동산과 주식 등 자산가치 폭락으로 지난 10여 년 동안 장기불황에 빠졌던 '일본형 복합불황'이 한국에서 나타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심지어 일부 경제전문가들은 "중국발 쇼크나 유가 급등 등으로 수출이 둔화할 수 있다"며 "내수시장이 회복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수출마저 위축되면 '더블딥'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우려했다. 국내 최대 소비지역인 압구정동 로데오거리와 중소업체, 재래시장 등을 찾아 현장 목소리를 들어봤다.〈편집자〉

압구정동에도 불황탈출의 비상구가 없다.

5월 13일 오후 10시 20분 서울 압구정동 로데오거리.

[특집Ⅰ]"로데오거리도 초토화됐어요"

로데오거리 끝자락에 있는 ㄷ소주방에는 평소 불야성을 이루던 것과 달리 25개 테이블 가운데 3곳에서만 사람들이 술잔을 기울일 뿐 대부분 자리가 비어 있었다. 주인 최모씨(36)는 로데오거리의 침체된 경기를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초토화입니다"라고 짧게 말했다. 그동안 아무리 경기가 나빠도 압구정동만큼은 건재했다는 것이다.

그는 "지난해 추석을 기점으로 손님이 급격히 줄어 요즘에는 지난해 평소 매상의 5분의 1 수준인 20∼30만원에 머물 정도"라면서 "그나마 다른 업소에 비해 나은 편"이라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주방장을 비롯해 홀에서 서빙하는 아르바이트생 3명의 인건비와 월세 등으로 매달 6백만원 가량의 적자를 내고 있다"면서 "인근 상당수 업소가 폐업을 하거나 업종변경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곳에는 지난해 말부터 일부 상권의 경우 권리금이 크게 줄거나 사실상 없는 상태로 거래되고 있다. 대한민국 최고의 상권으로 명성을 날리던 압구정동에 권리금이 사라진 것은 그만큼 불황의 골이 깊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로데오거리에서 유일하게 문을 닫지 않고 영업 중인 ㄱ패션의류점 박상미 사장(35)은 "물건을 구경하는 사람은 많지만 정작 구입하는 사람은 없어 극심한 불황에 시달리고 있다"면서 "이곳에서 10여 년 일했지만 요즘 같은 불황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ㅇ부동산의 중개사 김상수씨(45)는 "한 건물의 지하1층 80평 영업소는 지난해 말만 해도 권리금이 3억원이었지만 지금은 1억원으로 뚝 떨어졌으며 그나마 사려는 사람도 없다"면서 "일부이기는 하지만 권리금을 포기하면서까지 가게를 처분하려는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심지어 1년 이상 월세를 내지 못해 보증금이 소진된 '깡통업소'도 상당수라고 중개업자들은 전했다.

[특집Ⅰ]"로데오거리도 초토화됐어요"

최근에는 불황으로 인해 상상도 못할 일들이 압구정동에 벌어지고 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압구정동 일대에 전당포와 중고명품점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에만 이 지역에 전당포와 중고명품점이 10여 개 이상 새로 생겨났다.

최근 전당포를 개업했다는 ㅎ전당포 이모 사장은(50) "허름한 동네에나 있던 구식 전당포가 최첨단 압구정동에 생겨나고 있다"면서 "물건을 맡기려는 사람이 최근 늘고 있는 추세"라고 말했다. 또 최근에는 3,000원대 가격의 커피전문점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인테리어와 규모 등은 기존 업체에 버금가지만 가격은 절반에 불과하다.

'바람부는 날엔 압구정동엘 가야 한다'라는 영화제목이 이제는 '돈이 없는 날엔 압구정동엘 가야 한다'로 바뀌어가고 있다.

안산 반월공단은 지금 변신 중

5월 12일 오후 2시 국내 최대 국가산업단지인 경기 반월공단 내 ㅅ피혁 생산라인.

매캐한 염료 냄새가 코를 찌르는 공장 안에는 50대 후반의 한 직원이 양피(양가죽)를 다듬고 있었다. 불과 2∼3년 전만 해도 3명이 매달려 3교대로 일을 했지만 지금은 생산량이 줄어 혼자 처리하고 있다. 한때 동양 최대의 양피제품을 생산하던 업체였지만 원가상승과 내수침체로 공장가동률이 절반에 머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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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또 "장기불황으로 인근 20여 개 피혁업체 가운데 이미 10여 개가 도산하거나 중국 등지로 이전했다"면서 "경기침체가 장기화할 경우 대부분 업체가 부도 등 최악의 상황에 직면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부의 특단조치 마련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그나마 인접한 자동차부품업체인 ㅅ산업(주)은 상황이 나은 편이다. 아직까지 자동차산업은 호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황이 장기화할 경우 자동차산업도 장담할 수 없다. ㅅ산업(주) 조모 이사(48)는 "다른 업종에 비해 비교적 나은 편이지만 지금과 같은 불황이 이어질 경우 장래를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불황의 골이 깊어지면서 반월공단에는 때아닌 부동산 열풍이 불고 있다. 근원지는 폐업한 공장부지. 경영난에 시달리던 업주들이 공장 가동을 중단하고 대신 공장부지를 분할해 벤처업체에 임대하고 있다. 벤처업체가 반월공단 지역으로 몰리면서 임대가격도 지난해 평당 1백20만원 수준이던 것이 최근엔 2백20여만원 수준으로 올랐다. 

안산상공회의소 김철연 조사홍보팀장은 "경기침체로 서울 등지에서 이주해온 벤처업체가 공단지역으로 몰리면서 임대료가 지난해에 비해 2배 가까이 오르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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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4일 오후 3시 서울의 남대문 시장.

이틀간 비온 후 맑게 갠 날씨 덕분인지 평소보다 북적였다. 하지만 대부분 시민은 점포에서 물건을 고르기보다 리어카 등 좌판 물건에 몰려 있었다. 좌판에는 '3,000원에 팝니다' '공장정리가격' 등 최저가를 표방하는 물건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상당수 시민은 물건을 고를 뿐 선뜻 구매하지는 못했다.

남대문시장에서 30년째 여성 속옷을 팔아왔다는 김성례씨(65-여)는 "해도 해도 너무 한다"는 말로 최근의 재래시장 경기를 표현했다. 대형 할인점의 최저가도 최저가지만 극심한 경기침체로 소비자들이 물건만 만지작거릴 뿐 선뜻 구매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김 할머니는 IMF 당시만 해도 이렇게까지 경기가 어렵지 않았다"면서 "정치권은 정쟁에만 시간을 쏟지 말고 경제살기리에 팔을 걷어붙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밤 11시 동대문시장 상인들의 한숨은 더 깊었다. 소매권 패션몰 밀리오레에서 여성 구두를 파는 김영욱씨(31)는 "작년보다 상황이 더 안 좋다"며 "정치싸움이나 하고 나라꼴이 이 모양이니 장사도 안 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며 울상을 지었다. 대로변에서 조금 들어간 곳에 있는 한 쇼핑몰은 공실률이 20∼30%에 달하고 있는 상태. 평화-신평화-남평화 시장 등도 예전 같으면 사람이 붐볐을 새벽 2시에 셔터를 내린 가게가 많았고, 고객들도 드문드문 보였다. 15년 동안 평화시장에서 남성 티셔츠 장사를 해왔다는 최모씨(41)는 지금 동대문시장의 경기를 "동트기 직전 가장 추운 새벽과 같다"고 말했다.

김재홍 기자 ato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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