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조 9호세대 비화

'경희'의 손을 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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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경희대 연합데모 미수사건(중)

뭔가 움직임이 있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미세한 움직임.... '사람'을 찾아나선 서울대 신동수(현 선농음식살림 대표이사)의 안테나에 미확인 정보가 포착된 것은 오둘둘 데모와 전대련 사건의 여진이 채 가라앉지 않은 1975년 7월 즈음이었다. 분명 누군가가 움직이고 있는데 그 움직임의 주체와 실체가 파악되지 않고 있었다.

그는 표정 변화가 없는 사람이었다. 이 비상한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는 그의 얼굴은 평온했다. 호들갑을 떨 필요가 없었다. 회색 뇌세포와 비선 정보망을 가동하면 실체 확인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대학가는 긴급조치 9호의 찬바람에 전혀 미동하지 않고 있었다. 잔잔한 수면은 미풍에도 잔물결을 일으키게 마련이다. 그는 조용히 잔물결을 일으키는 바람의 방향을 탐색했다.

"끈을 좀 만들어달라"

진원지는 금방 파악됐다. 신호를 보낸 쪽은 경희대였다. '전설적 학생운동가' 신동수의 마지막 작품. 그 시나리오는 이 대목에서 시작된다. 75년 11월 18일, 13명이 구속 또는 수배되는 이 사건의 이름은 '서울대-경희대 연합데모 미수사건'. 70년대 학생운동사의 한 획을 그은 대사건이다.

[긴조 9호세대 비화]'경희'의 손을 잡다

"서울대가 자체적으로는 시위가 안 되니까 다른 곳과 연계하려고 했다. 그런데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타 대학에서 자꾸 서울대 쪽에 쑤시고 들어온다는 정보가 있어 신동수가 71동지회를 통해 박종호를 떠보았다. 박종호는 '타 대학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우리 대학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일단 그렇게 대답하고 우리에게 확인해보니 맞았다."

하지만 박종호의 기억은 좀 다르다. 그가 신동수와 경희대 팀을 연결해준 것은 맞지만 그 중간에 안병준(현 내일신문 편집위원장, 경희대 67학번)이라는 제3의 인물이 있었다. 박종호는 71년 총학생회와 별도로 학내 세력을 조직해 교련반대 투쟁을 벌이다 10-15 위수령 사태와 함께 제적-강제징집된 71세대 경희대 대표주자였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도서관 앞에서 김봉우를 만났는데 그가 '독자적으로 움직이기 힘들어 다른 대학을 엮어야겠다'며 '끈을 좀 만들어 달라'고 했다. 그래서 안병준한테 '서울대 활동가 중에서 아는 사람이 있으면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그가 다리를 놓아서 신동수를 만났고, 김봉우와 연결되도록 해주었다."

이처럼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는 증언이 나오는 까닭은 점조직 형태를 띠기 시작하는 이 시대 학생운동 방식과 무관하지 않다. 증언을 종합하면 두 대학이 각자 따로 '거사'를 모색했고, 자체 역량으로 독자적인 거사가 불가능하다는 인식 아래 연계 대상을 찾고 있었던 점은 일치한다. 그리고 결정적인 연결고리가 박종호라는 점도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서울대-경희대 연합데모 미수사건은 서울대와 경희대가 75년 11월 19일 동시에 시위를 벌이려다 하루 전 관련자들이 대거 구속되면서 불발에 그친 사건이다. 주범들의 1심 최고형은 징역 1년6월(자격정지 1년6월 병과). 긴급조치 9호가 적용된 사건치고는 비교적 가벼운 형량이다.

그렇게 된 데는 까닭이 있다. 무엇보다 수사가 제대로 되지 않은 점이다. 두 학교의 최고 배후세력인 서울대 신동수와 경희대 박종호의 기민한 처신이 사건 자체를 부실(?)하게 만든 점도 있다. 신동수는 경찰에 잡히지 않고 종적을 감춰 버리며, 박종호는 3개월 뒤에 검거되지만 무혐의로 풀려나는 것이다(이들은 지금도 후배들만 고생시킨 데 대한 자괴감을 갖고 있지만 당시 강도 높은 수사를 받았다면 사건 자체가 커져 되레 엄청난 피해를 불렀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문재인이 강삼재를 지지하다

경희대 학생운동은 경희민주총동문회 등이 '애국혁명열사'로 추모하는 이수병(75년 4월 9일 2차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까지 거슬러올라간다. 4-19 학생혁명 직후 경희대 민족통일연맹 위원장으로 활동한 그는 감옥에서 일본어를 배워서 학원 강사를 하고 [민족일보] 기자 시험에 수석 합격하는 등 천재적인 인물로 전해지고 있다.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아까워하는 대목이다.

[긴조 9호세대 비화]'경희'의 손을 잡다

백단학회는 백범 김구 선생을 추앙하는 민족주의 서클로, 한수산(현 세종대 교수-소설가) 등이 중심 인물이었다. 정범구는 이 모임을 통해 의식화돼 71년 교련반대 데모와 73년 반유신 데모에 행동대로 참여하다 74년 10-18데모 때는 비상총학생회장을 맡아 시위를 이끌었다.

학내 문제를 이슈로 한 이 데모는 경희대 학생운동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강삼재(전 신한국당 사무총장, 신방과 72학번)-문재인(전 청와대 민정수석, 법학과 72학번) 등 뒷날 경희대 학생운동과 한국 정치-사회에서 한몫 하는 인물이 이 시기에 형성되기 때문이다. 75년 서울대-경희대 연합데모 미수사건도 이 시위 인맥에서 파생한 것이다.

10-18데모는 4학년 정범구가 주도했지만 이를 뒷받침한 세력은 강삼재-문재인-신현태 등 3학년 그룹이었다. 이 가운데 가장 의외의 인물은 문재인이었다. 부산의 명문 경남고를 졸업하고 고시장학생으로 경희대에 들어온 그는 학내 위치로나 집안 사정으로나 데모를 할 처지가 아니었다. 이념서클과도 무관했다. 하지만 그는 73년 가을 법대가 주동한 반유신 데모에 참여했고, 이 과정에서 신현태와 가까워졌다. 신현태는 데모가 끝난 뒤 법대팀의 뒤풀이 술자리에 합세해 문재인과 의기투합했다.

3학년 들어 문재인-신현태 콤비는 정범구를 앞세워 10-18데모를 성공적으로 주도한다. 학교재단과 관련된 분규로 촉발된 이 시위를 통해 학교측으로부터 얻어낸 가장 큰 소득은 총학생회장 직선제였다. 이들은 그 열매를 거두기 위해 총학생회장 선거에도 깊이 개입, 10-18데모 과정에서 뜻을 같이 했던 강삼재를 밀었다.

75년 4월 2일 실시된 임기 6개월짜리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4학년 강삼재는 64%의 득표율로 당선된다. 경희대 역사상 처음으로 운동권이 총학생회를 완벽하게 장악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문재인은 총무부장, 신현태는 학술부장으로 '입각'한다.

하지만 학내외의 비상한 기대와 경계 속에 출범한 '강삼재호'는 10일도 채우지 못하고 장렬하게 산화한다. 서울대 4-3데모와 고려대 4-7데모, 4-8 긴급조치 7호 발동 등 대학가의 격랑에 휘말려 좌초하고 마는 것이다. 강삼재의 기억을 빌려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하면....

"간부 인선을 해서 총학생회를 출범시키고 워밍업도 채 하기 전에 고려대-외대 등 대학가에서 유신철폐 시위가 벌어졌다. 우리도 4월 10일 시위를 계획하고 있었다. 임원 회의조차 몇 번 하지 못했다. 그런데 더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시위 전날 경찰의 예비검속에 걸려 버린 것이다. 내가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당선되면서 기관에서 경희대 시위사태가 치열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과도하게 대응한 것이다."

시위 전날 강삼재는 이런 사태를 우려해 하숙집으로 가지 않고 간부 2명과 함께 청량리역 앞 여관에 피해 있었다. 이게 오히려 화근이었다.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린 것이다. 그는 청량리경찰서 앞 여관에서 정보과 형사들의 '보호'를 받았다.

[긴조 9호세대 비화]'경희'의 손을 잡다

4월 10일 시위는 강삼재 총학생회장이 '행방불명'된 가운데 문재인 총무부장의 주도로 강행됐다. 변론부장 장경룡(현 광주여대 대학원장)과 박형석-이백희 등 총학생회 임원들이 모두 앞장섰다. 결과는 '크게 한판하자'던 문재인-신현태의 의도대로 대성공이었다. 경희대 데모사상 이날처럼 많은 군중이 운집한 것은 처음이었다. 당시 다른 대학에서는 감히 생각지도 못하던 박정희 대통령 화형식도 벌어졌다.

강삼재가 반 맨발로 여관을 탈출한 것은 시위가 한창이던 오전 11시쯤이었다. 청량리서 정보과 형사 3명의 밀착감시를 받고 있던 그는 시위 사태로 2명이 현장으로 달려가고 나머지 한 명이 우왕좌왕하는 틈을 타 감시망을 따돌리는 데 성공했다. 여관 슬리퍼를 신고 택시를 탄 그는 경희의료원 쪽으로 우회해 담을 넘어 시위대에 합류했다.

강삼재는 잠시 소강상태에 빠진 시위대를 추슬러 2차 시위를 지휘했다. 회기동파출소까지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투석과 최루탄 공방을 벌인 이날 시위는 늦은 오후까지 이어졌다. 상황이 종료된 것은 강삼재를 비롯한 총학생회 임원들이 회기동파출소를 거쳐 청량리서에 연행된 저녁 무렵이었다.

학교 당국은 이날 시위와 관련해 17명을 제적했다. 강삼재를 비롯해 문재인-신현태-장경룡-박형석-이백희 등 총학생회 임원과 최준원(현 홍성 거주)-윤석용(현 천호한의원 원장, 17대 총선 서울 강동을 출마 차점 낙선-한나라당)-권혁종(현 무역업) 등 이들과 뜻을 같이 했던 학생들이 졸지에 무직 신세가 됐다. 강삼재는 이날 저녁 청량리서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자신의 직업이 '무직'으로 기록되는 것을 보고 제적된 사실을 알았다.

경찰은 이들 가운데 주범인 문재인-신현태를 1차로 구속했다. 최준원은 운좋게 피했으나 장경룡이 추가로 연루돼 총 3명이 구속된다. 구속을 면한 강삼재는 "경찰은 내가 없는 사이에 있었던 화형식을 경희대 시위의 포인트로 생각한 것 같다"며 "구속돼도 총학생회장인 내가 구속돼야 했는데 그게 오해의 소지가 되고 늘 마음의 짐이 됐다"고 최근 회고했다. 이 때 제적된 17명은 80년 한꺼번에 복적돼 후배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특히 권혁종은 '경희대의 봄'을 이끄는 주역이 된다.

75년 경희대 학생운동을 만개시킨 강삼재-문재인-신현태는 그 후 서로 판이한 것 같으면서도 비슷한 삶의 궤적을 그리게 된다. 강삼재는 제적 후 마산으로 낙향해 막노동과 다방 잡부 등 온갖 험한 일을 하다가 경남신문사에 입사해 '기자증' 없는 기자 생활을 하며 다소나마 안정을 찾는다. 학교는 80년이 돼서야 복적된다. 그는 학생운동의 연장선상에서 81년 11대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한 게 인연이 되어 12대부터 국회에 입성, 5선 고지까지 오른다.

일견 화려해 보이지만 그의 인생은 학생운동으로 인해 일그러진 것이었다. 신문방송학도로서 기자나 PD가 되는 게 꿈이었지만 그는 시험 한 번 못 쳐보고 정계에 투신했다. '안풍사건'으로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는 순간 스스로 국회의원직을 던지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지금 그의 꿈은 재판에서 무죄를 받아 평범한 생활인으로 제2의 인생을 사는 것이다.

문재인은 제적된 뒤 강제징집돼 공수부대에서 군생활을 한다. 80년 복학한 그는 학생운동과 관련해 또 다시 수배자 신세가 된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그는 청량리서 유치장에 있었는데, 이때 사법시험 최종 합격 소식이 전해져 경찰 간부들의 축하를 받으며 풀려난다. 그러나 시위 전력 때문에 사법연수원 성적에서 수석을 차지하고서도 원하던 판사 임용이 좌절돼 변호사 개업을 하고, 그 인연으로 노무현 변호사와 '동업자' 관계가 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장학금이 끊기면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시위에 앞장섰고, 판사 대신 검사 임용 제의를 뿌리치고 지방 민권변호사의 길을 택했다. 그런 그가 청와대 민정수석 직을 미련없이 던지고 17대 총선 출마마저 사양한 것은 특별한 처신이라기보다 그냥 '문재인다운' 것으로 보는 게 자연스럽다. 그를 한 마디로 평가한 게 있다. "나보다 나이는 적지만 언제나 냉정하고 신중하며 권세나 명예로부터 초연한 사람"(노무현, [여보 나 좀 도와줘], 새터, 2002년).

[긴조 9호세대 비화]'경희'의 손을 잡다

그는 80년 복학해서는 한의학과로 진로를 바꾼다. 한의사가 돼서도 학생운동가로서 품었던 '뜻'을 펼치려 했던 꿈이 여의치 않게 되자 그는 세상에 나서기를 극력 거부한다. '제대로 한 일이 없다'는 자괴감과 그로 인해 많은 동료들의 삶을 일그러뜨렸다는 자책감에 번민하는 긴급조치 9호 세대 특유의 성정을 대변하고 있는 셈이다.

이론가 김봉우 수면 위로

다시 75년 상황으로 돌아가면 4-10데모로 쓸 만한 인재는 깡그리 쓸려간 경희대에 또 하나의 인물이 등장한다. 71년 교련반대 투쟁 국면에 군대에 갔다가 복학한 김봉우였다. 문재인의 경남고 선배인 그는 특별한 전과도 없었고 기관원의 요주의 인물도 아니었다. 4-10데모 때도 그는 움직이지 않고 뒷전에 있었다.

그는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평범한 학생은 아니었다. 학내에서 '책을 열심히 읽고 이론 구축을 많이 시도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나이가 있어 후배도 많이 따랐다. 하지만 시위를 조직할 만한 인맥은 갖고 있지 않았다.

지하운동을 꿈꾸며 잠행하고 있던 그가 계획을 바꿔 시위 조직에 나선 것은 긴급조치 9호 국면이 너무 숨막혔기 때문이다. 학생운동의 씨가 말라버릴 상황에서 지하운동은 차후의 일이었다. 어떻게든 불씨를 살리는 게 더 시급했다.

"4월 데모는 공개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서울대의 독자적인 오둘둘데모와 연합세력인 6-3사건(전대련 사건을 지칭) 둘 가지고 사람을 싹 쓸어갔다. 그래서 내가 찾아보자고 나선 것이다. 마침 서울대 쪽에서도 신동수가 사람을 찾고 있어서 그 쪽과 연계가 됐다. 그 뒤에 서울 시내를 이리저리 뛰어봐도 할 사람이 거의 없고, 전국 어디고 꼼짝을 안 했다."

경희대 팀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6월 하순 4-10데모로 구속된 신현태가 집행유예로 석방되면서다. 두 사람은 대규모 거사 기반을 만들기로 합의하고 각자 조직 작업에 들어갔다. 물론 김봉우와 마찬가지로 신현태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신현태는 제적된 신분인 데다 이미 찍혀 있어 학내에는 얼씬할 수 없었다. 바깥 쪽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4월 시위 때 서울구치소(현 서대문독립공원)에서 만났던 각 대학 구속자들을 접촉했다. 하지만 상당수는 총학생회 임원이라서 학내 시위사태에 책임을 지고 구속된 터라 손톱도 들어가지 않았고, 나머지는 연락이 되지 않거나 소극적인 반응이었다.

신동수가 경희대의 움직임을 포착한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매개자로 등장한 박종호와 물밑 채널이 가동되면서 상황은 급진전됐다. 절대 열세의 전세를 뒤집을 만한 천군만마가 나타난 것도 이 때였다. 서울대 4월 데모팀 원혜영(전 부천시장, 17대 총선 경기 부천오정 당선자-열린우리당)-박원배(현 민예총 기획실장) 등이 집행유예로 석방된 것이다. 75년 9월 하순이었다.

신동호 편집장 hud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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