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바다 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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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바다 남해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 이성복 [남해 금산]

이락(李落)의 바다에서

남해대교를 사이에 두고 하동군 노량마을과 남해군 노량마을이 마주 서 있다. 그 사이를 급하고, 힘겹게 노량해협이 빠져나간다. 1598년 11월 19일,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이곳에서 생애의 마지막 싸움을 벌인다. 그리고 마침내 관음포에서 배꽃은 떨어지고, 칼의 노래는 그쳤다. 그러나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서울에서 6시간 거리. 아무리 대통(대전-통영)고속도로(지금은 진주까지만 완공되어서 대진고속도로다)를 타고 달린다 해도 삼남의 끝 남해는 그렇게 멀기만 하다. 그러고 보면 전란의 급한 장계가 오르락내리락하던 길을 내내 거슬러온 셈이다.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호남이 없었으면 나라도 없었다)'. 호남 민초들의 끈질긴 저항정신에 힘입어 실낱 같던 국운을 지탱하던 해신(海神)은 영남의 바다에서 그 장엄을 마감한다. 그래서일까, 한려해상에 숱하게 널린 어떤 승전의 자취보다 차라리 이곳 이슬다리(露梁) 앞바다가 화려하다.

들뜬 젊음들과 밀려온 관광버스로 가득한 충렬사를 벗어나 관음포로 내려가면 이곳에서부터 이락의 바다다. '이충무공 전몰유허'라는 꽤 권위로운 공식 명칭을 외면하고 굳이 이락사(李落祠)라고 부르는 이곳 사람들의 마음을 나는 좋아한다. 조그만 비각과 유허비를 지나 야트막한 동산을 오르면 노량 앞바다가 일시에 내려다보이는 첨망대가 있다. 그러나 나는 이곳에도 오래 서 있지 못한다. 이락의 바다에는 이제 양식장의 말뚝들과 가두리, 기껏해야 멀리 광양제철소의 굴뚝 따위가 펼쳐져 있을 뿐이니.

관음포이든 이락포이든, 떨어진 넋을 기리려면 아무래도 이락사를 내려와 골안마을 갯가로라도 나가야 한다. 물빠진 한적한 갯벌 위로 떠나지 못한 배들이 닻줄에 묶여 있는데, 고작해야 '남은 12척'에도 이르지 못한다. 일 나가지 못한 나이든 어부는 배 밑창을 청소하기에 여념이 없고, 작은 선착장에는 언제 죽었는지 알 수 없는 수달 한 마리가 썩어가고 있었다.

고요한 관음 바다, 아련한 물결 위로 무색의 햇살은 반짝이고, 자꾸만 나는 눈꺼풀을 누르는 졸음과 싸우고 있었다. 적들은 보이지 않았다.

남해 바다 남해

"전쟁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戰方急 愼勿言我死, 이순신 장군 유언)

"숫자적으로는 졌으나, 정치적으로는 지지 않았다"(〈조선일보〉 김대중 칼럼 4월 16일자)

하늘과 바다 사이, 다랭이계단

남해 바다 남해

이런 남해만의 독특한 풍광은 남면의 가천마을에서 절정을 누린다. 응봉산 자락은 어김없이 바다로 급격히 떨어지면서 사람이 발붙이고 살 만한 땅뙈기를 쉬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도 그 비탈에라도 달라붙어 기어이 삶을 이루고야 마는 사람들을 채 떨구지는 못한다. 어차피 바다는 벼랑끝에 면해 있으니 기댈 곳 없는 사람의 살림살이는 필사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도 나는 보았다. 여느 바닷가 마을답지 않게 많은 아이들이 비탈지고 좁은 골목길을 활기차게 뛰어다녔고, 경운기에 쇠풀을 가득 싣고 돌아온 젊은 농사꾼을 맞는 아기 업은 아내는 연신 살가운 미소를 보냈다. 노인들조차 지게를 지거나 지팡이를 짚고서라도 부지런히 고샅길을 오르내리고 있다. 강파른 터전은 그렇게 억척스러운 삶을 촉발해냈다.

남해 바다 남해

성(性)과 식(食),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이 여기 다 있다. 시들지 않는, 결코 시들 수 없는 인간의 삶은 이렇듯 비탈진 곳에서까지 터전을 이루었고,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눈물겨운 시선은 다랭이계단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TIP '남해 똥배기질'이라는 말이 있다. 살기 어려웠던 시절, 남해 사람들은 여수까지 배를 끌고 가 여수 사람들의 분뇨를 수거해다 거름으로 사용했다. 그때 풍랑으로 똥을 가득 실은 채 가라앉는 배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 놀라운 근면성과 억척으로 남해 사람들은 살아남아왔다. 무릇 똥배라도 내밀고 살 만하게 되려면 그 정도의 억척스러움은 필히 갖추어야 하는 법이다.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남해 바다 남해

날이 흐려서 더 풋풋한 신록을 타고 산에 오르니, 보리암 뒤편의 망대가 선뜻 가까워 보일 즈음, 이번에도 산은 급하게 바다로 쏟아져내린다. 제발 이성계의 일화 따위는 잊어버렸어야 했는데. 태조 이성계는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서 백두산과 지리산에 가 천운을 빌었다. 그러나 두 산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보광산(금산의 옛 이름)에 올라 마지막으로 빌었더니, 산신은 연민으로 허락해주었다. 감복한 이성계는 자기의 뜻이 이루어지면 산 전체에 비단을 둘러 보은하겠다고 약속했다. 막상 나라를 차지한 후 어떻게 약속을 지킬지 고민하는 이성계에게 한 신하가 지혜를 냈다.

"산 전체를 비단으로 둘러싸기는 어려운 일이니, 대신 산 이름을 금산(錦山)으로 바꿔 부르면 어떻겠습니까?"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산을 비단으로 둘러치지 않아도 발밑으로 펼쳐진 산자락은 온통 비단이었고, 금산이라 부르지 않아도 산은 이미 비단 산이었다. 울울한 난대림은 드문드문 측백나무의 짙푸른 음영으로 수를 놓았고, 바위마저 아련한 바다물결 따라 침묵으로 넘실거렸다.

금산이었다. 해수관음상이 아니더라도, 아유타국에서 온 불사리가 모셔졌다는 심층석탑이 아니더라도, 쌍홍문의 움푹한 두 눈이 아니더라도, '그 여자 사랑' 담은 상사바위가 아니더라도, 산은 그저 아무 말없이 거기 있어 금산이었다.

남해 바다 남해

TIP 금산에서 내려와서는 창선도 쪽으로 길을 잡아야 한다. '서불과차'의 상주리 석각, 미륵이 도운 미조포구, 물건리 방조어부림, 지족해협 죽방렴, 창선도 왕후박나무, 창선-늑도-초양-삼천포를 잇는 연륙교로 이루어진 다리 전시장 건너 삼천포로 빠지기까지 아직도 보아야 할 거리들이 무척 즐비하다. 그런데 물건리라. 동행은 가천마을에 이르기 전에 보았던 임포리 표지판을 떠올리며 속되게 배시시 웃고 있었다.

글-사진 유성문〈여행작가-편집회사 투레 대표〉 rotack@lyco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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