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조 9호세대 비사

환경운동가 최열 '인생역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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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장기를 두지 않았다면....

사소한 사건 하나가 역사를 바꾸는 수가 있다. 1975년 5월 30일. 최열(현 환경재단 상임이사)이 춘천에 있지 않았다면, 거기서 정성헌(현 남북강원도교류협력단장)과 내기를 하지 않았다면 '세계적 환경운동가' 한 사람이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날짜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6년 전인 1969년 9월 14일 새벽. 국회 제3별관에서 3선개헌안이 날치기 통과되던 날. 그는 자신과 약속했다. "민주화될 때까지 오락을 끊자"고.

[긴조 9호세대 비사]환경운동가 최열 '인생역전'

그랬던 그가 그날 춘천고 3년 선배인 정성헌의 집에서 장기를 둔 것은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었다. 스스로 철석같이 맹세했으니 직접 둘 수는 없었다. 구경하며 훈수나 하던 참이었다. 그러다보니 대국자의 신경을 건드리는 일이 생겼다.

"거, 둘 줄도 모르면서 훈수는..."

"둘 줄 모르는 게 아니라 안 두는 거지."

"에이, 거짓말도... 못 두잖아."

옆에 있던 이들이 약을 올렸다. 이쯤 되면 오기가 발동하게 마련이다. 말로 해서는 믿지 않으니 직접 보여줄 수밖에.

정성헌과의 대국은 이렇게 시작됐다. 오랜만에 대하는 장기판이 낯설었지만 그는 최선을 다했다. 몰입의 즐거움, 장기판의 또다른 매력이다. 치열한 공방전 끝에 스코어는 1-1. 승부는 원점으로 되돌려졌다.

'저승사자'가 나타난 것은 결승대국이 한창 무르익었을 때였다. 춘천경찰서 형사가 그를 찾았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해 2월 이미 학교를 졸업하고 '백수' 생활을 하던 터라 걸릴 게 없었다. 그는 순진하게도 "잠깐 가서 확인만 하면 된다"는 형사의 말을 믿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정성헌에게 말했다.

"형님, 그대로 놔둬요. 금방 올 거니까...."

그가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4년 후였다. 1979년 5월 12일 그는 대구교도소 문을 나섰다. 물론 장기판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대국 중이던 정성헌도 감옥살이를 하고 같은 날 석방됐기 때문이다. 정성헌은 1978년 4월 춘천 가톨릭농민회 사건으로 긴급조치9호 위반사범이 됐고, 그와 출소 동기가 된 것이다.

"그때 그 장기 어떻게 됐어요?"

최열은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유인태(전 청와대 정무수석, 17대 총선 당선자-서울 도봉을-열린우리당)-안양로(현 한강선원 원장)-조성우(현 민화협 상임의장-열린우리당 중앙위원) 등과 함께 춘천으로 직행했다. 정성헌을 만나려는 것이었다. 이들은 청평사로 갔다. 거기서 4년 만에 대하는 정성헌에게 던진 최열의 첫 인사가 이랬다.

"형, 그때 그 장기 어떻게 됐어요?"

그는 지금도 잡기에 손대지 않는다. 비록 민주화는 됐다고 하지만 아직 완결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서다. 완전한 민주화는 통일 이후에야 가능하다는 게 그의 소신이다. 결국 1969년 3선개헌안 통과 후 딱 한 차례 두었던 장기가 그의 '인생'을 바꾸었고, 나아가 대한민국의 '환경'을 바꾼 셈이다.

최열이 환경운동가 된 것은 '운명'이었다. 장기를 두다가 서울로 압송돼 명동성당의 7인 기획위원들과 함께 구속된 것이 그 시작이다. 평생을 환경운동에 헌신하기로 한 그의 결심은 이 사건으로 억울하게 4년을 꼬박 감옥에서 지내면서 다져진 것이다.

사실 최열은 7인위원회 멤버도 아니었고 가칭 전대련의 강원대책인지도 몰랐다. 7인위원회 위원장인 심지연(현 경남대 교수-한국정치학회장)은 1971년 위수령 사태 때 제적돼 함께 강제징집된 '71동지'로서 아는 사이였고, 7인 기획위원 중에 한 사람인 이명준(현 아이마스 회장) 역시 중앙대 '71동지' 남철희(현 사업, 71동지회 사무총장)를 통해 인사를 나눈 것이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었다. 판결문에 적시된 그의 '범죄행위'라는 것도 심지연과 이명준으로부터 "강원대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동의한 것뿐이었다.

이것이 조작이 아닌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가 6년 징역형을 받은 건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7인 기획위원 수준의 중형이기 때문이다. 운동 경력이나 나이로 보면 그는 7인 기획위원과 동급이다. 하지만 재판부가 그를 주범으로 예우(?)한 배경은 다른 데 있었다. 바로 재판 거부였다.

아마 정상적으로 재판을 받았으면 그의 혐의가 상당 부분 벗겨져 형량이 훨씬 줄었을 것이다. 하지만 재판 거부, 항소 거부를 주도하면서 그는 거꾸로 검사로부터 항소를 당했다. 형이 확정돼 수감된 뒤에도 '반성문' 쓰기를 거부해 주동자보다 더 긴 수형생활을 자초했다. 명동성당의 7인위원회가 감옥에서는 그의 가세로 8인위원회가 된 격이었다.

교도소 동기 '8인위원회'

학생운동의 벽지였던 강원대에서 최열이라는 거물이 나온 데는 나름대로 내력이 있다. 그의 정치-사회적 관심은 어릴 때 이미 훈련된 것이었다. 그는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대구에서 살았다. 2학년 때 야당 대통령후보의 유세가 수성천변에서 열렸다. 한창 연설 중인데 소방훈련 사이렌이 울렸다. 그것을 보고 "왜 유세를 방해할까"라고 의문을 품었다. 그의 문제의식은 이때부터 자라기 시작했다.

"6학년 4-19혁명 때는 [경향신문]과 [동아일보]가 시커멓게 지워져 나왔다. 집이 경북고 길 건너 있어서 2-28의거도 직접 보았다. 6학년 2학기 때 춘천으로 가서 춘천중에 들어갔는데 곧바로 5-16이 났다. 혁명공약 못 대면 집에 안 보내주었다. 민정이양 약속도 안 지켰다. 중3 때는 박정희-윤보선 후보가 맞붙은 대통령선거 개표 방송을 밤새 들었다. 그때부터 박정희를 인정하지 않았다. '안 좋은 사람이구나'하고...."

최열의 최근 회고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경리장교를 하다가 예편해서 군납 일을 하고 있었다. 그가 문제의식의 날을 더욱 벼릴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었다. 그의 부친은 [경향신문]을 스크랩하고 [사상계] [신동아] [중앙공론] 등 국내외 종합지를 탐독했다. 그것을 같이 보며 그도 자연히 정치-사회문제에 눈을 떴다.

춘천고에 진학한 그가 한일회담 반대데모에 적극 가담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1~2학년 시절 그는 도청 앞까지 가두시위를 경험했다. 이때 그의 인생을 결정할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다. 고려대에 진학한 3년 선배 정성헌의 구속이다. 교양과정부 학생회장으로 시위를 주도하다 투옥된 그가 뒷날 최열을 학생운동의 맹장으로 키우게 된다.

춘천에는 '거멀못'이라는 이념서클이 있었다. 거멀못이란 나무 그릇 따위의 벌어진 곳에 박는 ㄷ자 모양의 못을 말한다. 남과 북을 하나로 잇는다는 뜻을 담은 이름이다. 정성헌-박용수(현 강원대 총장) 등 춘천고 또는 강원대 출신으로 구성된 학외 비등록 서클이었다. 최열은 대학 2학년 때인 1969년 고려대 대학원에 다니면서 정외과 조교를 하는 정성헌을 만난다. 그리고 '거멀못'의 일원이 된다.

그는 정성헌이라는 든든한 선배를 통해 학생운동의 모든 것을 빠르게 습득해나갔다. 데모하는 방법부터 서울 인맥 구축에 이르기까지. 특히 고려대로의 '원정 실습'이 잦았다. 이때 만난 인물이 고려대 67학번으로 3선개헌반대전국투쟁위원장인 윤준하(현 서울환경운동연합 의장)와 1971년 한사회 회장으로서 고려대 교련반대투쟁에 앞장서는 69학번 오흥진(현 삼성물산 상무)이다. 최열이 1969년 3선개헌 반대투쟁 때 강원대 본관을 점거해 단식농성을 하고 71년 강원대 교련반대 데모를 주동한 것도 이러한 인적 네트워크와 무관하지 않다.

환경운동? 팔자좋은 소리!

ROTC였던 최열은 1971년 위수령 사태 때 제적돼 군에 끌려가 전방에서 말단 소총수로 복무했다. 이른바 '71동지'의 일원이 되면서 인맥은 더욱 넓어지고 깊어졌다. 그 바람에 민청학련 사건에도 연루될 뻔했다. 1974년 1월 잠시 휴가나와 서울 동숭동 학림다방에서 유인태를 만난 것이다. 최열의 말을 들어보자.

[긴조 9호세대 비사]환경운동가 최열 '인생역전'

1974년 가을 복학한 그는 다른 '71동지'들과 마찬가지로 후배들의 유신철폐 시위를 지원했다. 강원대에는 거멀못 후배이기도 한 원영만(현 전교조 위원장)과 최문순(현 MBC 보도제작국 CP, 전 노조위원장) 등이 있었다. 이들이 구류를 살게 된 것은 보이지는 않지만 최열에게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서울의 동지들과도 접촉해 우이동 심지연의 집에 자주 드나들었다. 정성헌-최열 등 춘천팀은 서울로 원정을 가기도 하고 서울팀을 춘천으로 초청하는 등 모임을 자주 가졌다. 1975년 5월 정성헌의 집에서 장기를 둔 것도 서울팀을 초청해 춘천에서 모임을 가지는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에서였다.

이날 서울로 압송돼 호된 감옥살이를 하게 된 그는 이듬해 7월 안양교도소로 이감됐다. 거기에는 이부영(현 열린우리당 상임중앙위원)-이강철(현 열린우리당 영입추진단장)-이호웅(17대 총선 인천 남동을 당선자-열린우리당)-김용석(전 청와대 시민사회비서관) 등 긴급조치 위반자 40여 명이 수감돼 있었다. 이들이 그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최열아, 반갑다!"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 후배인데 반말을 하는 것 아닌가.

"어, 후배가 왜 반말이지?"

"형이 확정돼 공민권을 박탈당했으니까 다 같은 처지잖아... 그렇게 부르기로 했어."

긴급조치 위반자들은 약 0.7평밖에 안 되는 비좁은 공간에 3명씩 수용됐다. 그 안에서도 재미를 찾을 수는 있었다. 누가 어느방에 들어가든 교도관들은 머릿수만 확인하기 때문에 서로 바꿔서 자면서 대화를 나눴다. 이때 서로 말을 트고 지낸 것이 나중에 공민권이 '회복'된 뒤에도 그대로 굳어졌다.

옥중 토론의 주제는 나가서 뭘 하느냐는 것이었다. 당시 학생운동권의 최고 인기 품목은 노동운동이었다. 1980년대 학생운동 내부의 격렬한 이론투쟁의 출발점이기도 한 이 시기의 화두는 '정치투쟁론'과 '현장론'이었다. 노동운동은 이 가운데 '현장론'에 선 이들에게 가장 유망한 진로로 꼽혔다. 정치투쟁론과 현장론의 논지는 다음과 같다.

"정치투쟁론=지금처럼 탄압이 극심한 시기에 학생운동마저 정치투쟁을 하지 않는다면 결국 전체 운동은 자기 패배에 빠지고 말 것이다. 학생운동은, 철저하게 정치투쟁을 해나감으로써 학생대중을 정치적으로 각성시키고 그들이 다시 투쟁의 선두에 나설 수 있을 때 발전할 수 있다.

현장론=학생운동이 시위만 강조해 학생대중으로부터 고립되고 운동 역량을 잃어버릴 뿐 독재정권의 기반에는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지 못했다. 학생운동만으로는 한국사회의 모순을 해결할 수 없으니 노동현장에서 노동대중을 의식화-조직화해야 한다." -편집부 지음, [학생운동 논쟁사], 일송정

옥중 토론도 이러한 논쟁의 연장선상에서 전개됐다. 최열도 고민했다. 모두 노동운동으로 간다면 운동은 어떻게 되는가.... 그는 결론을 내렸다. 안양교도소에 이감된 지 두 달 남짓되던 1976년 9월이었다.

"나는 공해추방운동을 한평생 하고 싶다."

동료들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이구동성으로 그를 설득했다. 정치운동이나 노동운동이 아닌 다른 분야는 한가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공기가 이렇게 좋은데 웬 공해냐"며 "그것이라도 배불리 먹었으면 좋겠다"고 비야냥거리기까지 했다. 그의 생각을 지지한 사람은 김지하와 이부영 정도였다. 이부영은 "그게 앞으로 매우 중요해질 것"이라며 그를 격려해주었다.

환경운동 현장활동가의 길로

최열은 우선 가족에게 공해 관련 서적을 보내달라고 했다. 하지만 한글로 된 책이 없었다. 처음 들어온 게 일본 책이었다. 일본어를 모르는 그는 가나부터 배웠다. 그렇게 해서 제일 먼저 뗀 책이 미야모토 겐이치의 [일본의 환경문제]였다. 도쿄대 공학부 조교 우이준의 [공해원론], 미나마타병을 구명(究明)한 하라다 마사즈미 교수의 책도 읽었다.

[긴조 9호세대 비사]환경운동가 최열 '인생역전'

감옥에서 환경전문가가 되어 출소한 그는 청평사에서 정성헌 등을 만나 "환경공해단체를 만들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하지만 그의 뜻은 조성우의 한마디에 꺾였다.

"지금이 어느 땐데... 민주화해놓고 해야지."

그는 환경운동가의 꿈을 잠시 접고 조성우가 이끄는 민주청년협의회(민청협) 부회장을 맡는다. 그러나 햇빛을 본 지 6개월 만인 1979년 11월 YWCA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구속돼 또 다시 영어의 몸이 된다. 1981년 3월 출소할 때까지 약 1년 3개월 동안 감옥에서 2차 공해공부를 했음은 물론이다.

최열이 본격적으로 환경운동에 뛰어든 때는 2번째 감옥살이를 하고 나와 1년이 지나서다. YWCA 위장결혼식 사건 조사 과정에 그는 지독한 고문에 시달렸다. 그를 발길질하던 조사관의 구두가 찢어진 것이 와전돼 "최열의 입이 찢어졌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아무리 매타작을 해도 실신을 하지 않아 '플라스틱 인간'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런데 나와 보니 함께 조사받은 백기완(현 계간 [노나메기] 발행인)은 더했다. 거의 폐인이 돼 있었다. 최열은 그를 강원 추곡약수터와 양양 바닷가 등지에 요양시킨 뒤 1982년 공해문제연구소를 차렸다. 마침내 한국 최초의 환경운동단체가 탄생한 것이다.

시작부터 그는 이론운동보다 오염현장을 폭로하는 현장 활동가의 길을 택했다. 안양천 오염 실태 조사와 울산-온산-여천 지역 공해실태조사는 그 서막에 불과했다. 그의 활동이 쌓이면서 차츰 공해문제가 사회적 관심사로 대두돼 다른 단체도 생겨났다. 그는 1988년 이들 단체와 공해문제연구소를 통합해 공해추방운동연합(공추련)을 발족시켰다. 1993년에는 공해추방운동을 좀더 포괄적인 개념인 환경운동으로 전환하면서 환경운동연합으로 발전시켰다.

1975년 발동된 긴급조치9호는 '세계 15대 시민운동가'중 한 명을 만들어냈다. 그로부터 20년 후 최열은 '환경 노벨상'으로 불리는 골드만환경상을 수상하는 등 세계가 인정하는 환경운동가로 자리잡았다. 그를 '배지 없는 7선 의원'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당선 가능한 국회의원 자리를 7번 거절했기 때문이다. '평생 환경운동에 헌신하겠다'는 옥중 맹세를 지키려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이 주도한 개발독재로 금수강산이 파괴될 것을 예견하고 그를 감방에 보낸 셈이다.

"내가 징역을 살지 않았으면 과연 환경운동을 했을까... 과거 모든 운동은 관이 선점해 주도했다. 일제시대와 독재시대를 거치면서 농민운동, 노동운동, 심지어 문화운동까지 관변단체가 먼저 장악했고, 그 뒤에 개혁적인 단체가 나와서 싸우고 경쟁했다. 그러나 환경운동은 그렇지 않았다. 처음부터 관변성이 없었다. 우리가 먼저 장악한 것이다."

긴급조치9호가 없었다면, 최열이 그날 장기를 두지 않았다면, 그래서 그가 4년 동안 감옥에 갇히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의 환경은 더 망가졌을지 모른다.

신동호 편집장 hud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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