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를 되찾자

북간도 민족교육 산실 은진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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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나라 남경터에 흑룡강을 등에 지고

태백산을 앞에 놓은 장하다 은진..."

올해로 개교 84년을 맞은 북간도 용정 은진중학의 교가다.

[간도를 되찾자]북간도 민족교육 산실 은진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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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선교회에서 학교 이끌어

개교 당시 6명의 학생으로 초라하게 시작했지만 은진중학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다. 다른 학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민족교육을 거침없이 실시했다. 일제가 금지하던 우리말 교육은 물론 영어-성경-국사 등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지식인을 양성하는 수업이 이뤄졌다. 은진중학 총동문회 김근화 고문(23회)은 "당시 용정에 있던 동흥중학도 민족재단에서 세운 학교지만 민족교육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모든 것이 캐나다 선교회에서 세웠다는 '프리미엄'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학교의 주요 직책은 캐나다 선교회에서 파견한 교역자들이 맡았다. 캐나다 선교회의 교역자들은 우리 민족을 진실한 마음으로 대했다. 이름도 한국식으로 고쳐불렀다. 그리슨(Grierson)은 구례선, 바커(Barker)는 박걸, 스콧(Scott)은 서고도.... 이와 같은 교역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은진중학은 명실상부한 용정 최고의 신식근대교육기관으로 이름을 높였다.

간도 못 잊는 동문들 동문회 결성

은진중학의 자랑거리는 그 뿐만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보기 힘든 3층 벽돌집에 스팀 보일러로 난방을 했다. 22회 졸업생인 안철호 박사는 "인근의 광명중학은 일제가 세운 학교지만 은진중학에 비하면 옹색한 초가 수준"이었고 "청소도 기름걸레를 이용했는데 인부들이 있어서 학생들은 공부에만 열중했다"고 회상했다. 좋은 환경에서 민족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민족의식이 남달랐다. 김근화 고문은 "만주국이 세워진 후 군관학교에서 지원자를 뽑으러 수차례 왔으나 한 명도 응하지 않았다"며 동문들의 민족의식을 자랑했다.

은진중학이 있던 곳은 '영국덕이' 또는 '영국데기'로 불렸다. '덕이'는 언덕이라는 뜻으로 '영국덕이'는 영국사람들이 사는 언덕이라는 뜻이 된다. 캐나다를 영국의 식민지로 여긴 사람들이 잘못 붙인 이름이었다. 은진중학 근처에는 역시 캐나다 선교회가 세운 제창병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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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진중학은 학생들의 다양한 특별활동도 지원했다. 당시로선 파격적인 브라스 밴드를 조직해 운영하는가 하면 현미경을 갖춘 실험실에서 생물반이 활동했다. 미션스쿨이라 진화론을 언급한 교사가 학생들의 항의를 받는 웃지 못할 사건도 벌어졌다고 한다.

일제의 대륙 침략이 본격화하고 괴뢰정부인 만주국이 세워지면서 은진중학에 대한 핍박도 심해졌다. 1941년 일제는 강제 퇴거령을 내렸고 급기야 캐나다 선교회는 간도에서 철수하게 된다. 은진중학에 일본인 교장이 부임하면서 우리말 사용이나 교육이 전면금지되고 체육활동 대신 군사훈련이 실시됐다. 교회 지하에서 비밀리에 한글 교육이 시작된 것도 이 즈음이다.

은진중 후신 '용정제5중'에 장학금 전달

은진중학의 교장이던 부례수 선교사는 "우리는 지금 가지만 지구는 365일 돕니다"라는 말을 재학생들에게 남기고 귀국길에 올랐다. 그의 말은 지구가 돌고 있는 한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는 예언과도 같았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1971년 기적과 같은 만남이 이뤄졌다. 부례수 교장과 편지를 주고받던 강원룡 목사의 주선으로 서울에서 상봉행사가 개최됐다. 당시 부례수 교장은 졸업생들의 얼굴을 앨범과 일일이 대조해보고는 말문이 트이더니 통역도 없이 감격의 대화를 나눴다.

은진중학은 1946년 다른 5개 학교와 통합되면서 '용정 제3국민고등학교'로 재편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아직 간도를 잊지 못하는 은진중학 동문들은 1960년대 중반 총동문회를 결성했다. 총동문회는 단순 친목모임이 아니다. 벌써 5년째 은진중학의 후신인 용정 제5중학교에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지난 3월에는 컴퓨터 50대를 기증했다. 같은 캐나다 선교회 재단이던 용정 명신여학교 동문회도 뜻을 같이 하고 있다. 조선족 학교를 지원함으로써 그들이 배워온 민족정신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윤동주와 문익환이 전학 간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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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대학 진학을 위해서는 5년제 학교를 졸업해야만 했다. 은진중학은 처음 5년제로 개교했으나 중간에 4년제로 학제를 개편했다. 그래서 이들은 전학을 해야만 했다.

용정에 5년제 학교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제가 세운 광명중학도 5년제였다. 그런데도 이들이 굳이 은진중학에 입학한 것은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식민교육은 받지 않겠다는 의지가 반영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이 대학 입학 전 최종으로 졸업한 학교는 아이러니하게도 광명중학이었다. 숭실학교가 신사참배 거부 문

제로 폐교되면서 용정으로 돌아와야 했고, 유일한 5년제 학교인 광명중학 외에는 별다른 선택이 없었던 것이다.



'은진 파수꾼' 김근화 총동문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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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할 때마다 간도 곳곳의 유적지는 제 모습을 빠르게 잃어갔다. 용정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일송정에 세워졌던 선구자 노래비는 시멘트를 덧발라 가사를 알아볼 수 없게 훼손됐다. 제대로 평가받지도 못한 간도의 독립운동 유적들이 파괴되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용정거리에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 있던 한국은행의 전신인 조선은행 용정지점을 보존하려고 백방으로 뛰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조선은행 용정지점 건물은 중국의 무분별한 보수공사로 타일을 바른 채 광대 몰골로 변해버렸다.

그는 아직 용정에 살고 있는 은진중학 동창과 의기투합, 유적지들을 복원하는 일을 본격화했다. 그 결과 3-13 만세운동 묘역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 은진중학-명동학교-서전서숙 등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 옛터에 역사의 현장임을 알리는 비석을 세웠다. 올해는 용정에 있는 아버님의 묘를 모셔오려다 마음을 고쳐먹었다. 간도와 완전히 인연을 끊는 것보다 한 번이라도 더 찾아가 역사를 되살리는 평생의 '업'을 충실히 해야겠다고 생각해서다.

유병탁 기자 lum35@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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