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한대행' 아닌 '고난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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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건 대통령권한대행이 4월 6일 출입기자들과 '호프미팅'(4월 12일)을 하고 싶다고 하자 기자실에는 작은 술렁임이 일었다. 고 대행은 '귀하신 몸'이 되고 난 후 공식적인 회견은 물론 기자들과 단 한 번의 비공식접촉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탄핵가결 직후 두 차례 대국민담화를 발표하면서 기자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일문일답 없이 담화문만 발표하고 자리를 뜰 만큼 언론과의 접촉에 강박증을 보여왔다. 그런 그가 총선을 코앞에 둔 시점에 공식경호나 의전이 무리가 가는 줄 알면서 기자들과 첫 간담회를 '호프미팅'으로 자청했으니 의중이 궁금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호프미팅은 총선 이후로 미뤄졌다.

고 대행은 대행체제 출범 초기 몸이 10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3월 12일 이후 한동안 안보관계장관회의-경제장관회의-국무회의 등 1시간 차이로 공식회의가 밤 10시까지 이어졌다. 지난 한 달 동안 대통령권한대행으로 소화한 공식일정만 76건. 삼청동 총리공관에 들어간 뒤에도 청와대와 총리실, 각 부처에서 올라온 보고서가 산더미처럼 그를 기다렸다.

오전 5시에 공관 2층 침실에서 눈을 뜨자마자 그는 'YTN 뉴스24시'와 10개 조간신문을 통해 간밤에 들어온 뉴스를 챙기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날 주재할 회의 주요안건 및 참고자료를 챙기고 나면 미처 밥을 먹을 사이도 없이 공관 앞에는 총리실로 출발할 관용차량이 대기하고 있다. 총리실까지는 2~3분 정도 거리. 잠깐 눈을 붙일 짬도 없이 오전 8시 20분쯤 집무실에 도착하면 한덕수 국무조정실장, 김대곤 비서실장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한 실장이 '대통령보좌역'으로, 김 비서실장이 '총리보좌역' 자격으로 간단한 브리핑이 끝나고 나면 오전 9시부터 대통령과 총리로서 전쟁과도 같은 1인 2역이 시작된다. 그나마 공식오찬이 없는 날 혼자 집무실에서 도시락을 먹은 뒤 토막휴식을 취하는 게 유일한 낙이다.

이동시간을 줄이기 위해 총리공관에서 고 대행이 회의를 주재하는 날은 공관이 회의장으로 변한다. 그러다보니 예상 못한 해프닝도 일어난다. 반기문 외교부 장관은 "공식 음향시설이 없다보니 맞은편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안 들려 강금실 장관처럼 가는 목소리를 낼 때는 상대방의 입모양을 유심히 봐야 한다"고 고민을 털어놨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관운이 좋은 사나이'로 통하는 고 대행의 심정은 어떨까. 고 대행은 3월 22일 박원순 변호사 등 시민사회단체 대표들과 간담회에서 "1주일간 목욕탕도 못갔다. '권한대행'이 아니라 '고난대행'이다"며 살짝 속내를 내비치기도 했다.

실제로 지난 한 달 동안 고 대행의 앞길은 산너머 산이었다. 탄핵 가결 직후에는 대외신인도 유지가 최우선 과제였고 급한 불을 끄고 나자 이번에는 탄핵반대 촛불집회와 공무원들의 집단시국성명 사태 등이 터져나왔다. 고 대행의 말 한마디에 따라서 정국이 살얼음 정국에서 정면 파국으로도 치달을 수 있는 순간들이었다.

고 대행이 이 순간 택한 것은 몸사리기로 비칠 만큼 '신중한 언행'과 '여론저울질'이었다. '살아있는 민심'에 대한 그의 집착은 남다르다. 고 대행이 빼놓지 않고 보는 TV 프로그램 중 하나가 'MBC 100분토론'과 'KBS의 심야토론'이다. 비서실에 전화해서 녹화를 떠놓으라고 지시한 뒤 나중에 꼭 챙겨서 볼 정도다.                               

강진구〈정치부 기자〉 kangj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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