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인 손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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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초대석] "강금실 법무장관 꼭 만나보고 싶어요"

"때론 죽고 싶었어요."

연극인 손숙

그는 고려대 사학과 재학중 같은 학교 출신 연극배우였던 김성옥씨에게 반해 졸업도 하기 전 화촉을 밝혔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끔찍'했다. 화근은 남편의 빚이었다. 남편의 빚은 고스란히 그의 몫이 됐다. 삶을 송두리째 그 빚에 저당잡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열연 중인 [매디슨카운티의 추억]의 여주인공인 40대 주부 프란체스카는 무료한 일상 속에서 낯선 남자와 나흘간의 불꽃 같은 사랑이라도 경험하건만 30대 중반 이후, 배우 손숙의 삶은 그야말로 팍팍하기만 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성장한 탓인지, 제겐 엘렉트라콤플렉스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아홉 살 차이가 나는 남편을 만난 거죠. 돌이켜보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무모함이었어요. 그이는 현실감각 없이 꿈만 꾸는 사람이었어요. 사업을 벌인다며 수억원을 빌려 썼지요. 하나를 막으면 다른 곳에서 터져나오고 또 하나를 막으면 또다른 곳에서 일이 터졌어요. 티격태격하면서 애정도 사라졌어요. 그리고 전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그 빚을 갚기 위해 허우적대야 했어요."

풍문여고 1학년 때 연극을 시작했지만, 결혼 2년 만인 1968년에야 본격적으로 연극판에 뛰어든 것도 순전히 '생활고' 때문이었다. 그는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했다"고 회고했다. 연극계에선 '손숙 너마저...' 하는 원망 어린 시선이 쏟아지기도 했지만, 빚의 중압감에 짓눌린 그에겐 그런 야유를 의식하는 것조차 '사치'였다.

연극을 하는 틈틈이 드라마 출연-방송 진행-원고 집필-강연 등 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쉴틈 없는 나날을 보냈다. 심지어 DJ정부 시절, 장관직을 제의받았을 때도 "전 남편 빚을 갚아야 하는데요"라고 DJ에게 말했을 정도다. 봉급으로는 눈덩이처럼 이자가 불어나는 빚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연극인 손숙

"집안 살림은 전부 가압류돼 빨간 딱지가 붙었어요. 살던 집까지 빼앗기고 작은 아파트로 옮겨온 후에도 매일 빚쟁이들의 독촉전화가 걸려왔죠. 전화벨만 울려도 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어요. 일단 집에만 들어가면 지옥이었죠. 살면서 너무 많이 울어 이젠 눈물도 말라버린 것 같아요. 결국 가방 하나 달랑 들고 집을 나왔어요. 그게 우리 부부의 별거 시작이었죠. 이후 전 원룸과 오피스텔 등을 전전하며 혼자 살았어요."

빚은 이제 다 청산했다. 그러나 오랜 빚잔치를 끝낸 그에게 남은 재산은 거의 없다. 그렇게 억척스럽게 일을 했건만. 지금 살고 있는, 융자를 끼워 마련한 마포의 아파트가 전 재산인 셈이다. 그래도 그는 행복하다고 했다. 더 이상 그의 어깨를 짓누르는 빚이 없으므로. 그리고 말년에 할 일이 있으므로.

손숙은 "고달픈 결혼생활로 얻은 것도 있다"고 말했다. 현실을 잊기 위해서라도 더 몰입해야 했던 연기, 그리고 배우로서의 재능을 자각한 것이 첫째 수확이다. 그는 "연극이 없었다면 힘든 과정을 극복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연극 연습을 하는 동안은 행복했다"고 말했다. 어쩌면 그가 연극무대에서 빛을 발한 것이나 MBC 라디오 [여성시대]에 이어 SBS 라디오 [아름다운 세상]에서 부부를 포함한 서민의 사연을 그토록 구수하고 절절하게 청취자에게 전달할 수 있는 것도 결코 녹녹지 않은 자신의 삶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인지 모른다. 그는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연기를 하고, 방송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안다. 권력의 덧없음도.

연극인 손숙

"당시 김 대통령을 수행한 국내 기업인들은 제 공연을 볼 계획이 없었어요. 그 시간에 김 대통령과 함께 볼쇼이 발레를 관람하기로 되어 있었거든요. 하지만 일이 꼬이려고 그랬는지 극장 사정으로 발레공연이 30분 만에 끝났대요.

기업인들은 시간도 때울 겸 해서 제 공연을 찾은 거였어요. 그날 러시아에서의 [어머니] 공연은 대성황이었어요. 오랜 배우생활 동안 모든 관객이 보내는 기립박수는 처음이었어요. 우리 기업인들은 자국 배우의 그같은 선전에 감동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십시일반으로 돈을 거둬 커튼콜 때 제게 전달한 거예요. 전 러시아 관객에게 '우리나라 기업인들이 금일봉을 주었다'고 소개한 후 극단 대표에게 봉투를 넘겨줬어요. 그 돈은 제게 준 것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수재의연금을 방송사나 신문사를 통해 전달하는 것과 같은 경우였어요."

장관 이임식날 그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 자리에 더 이상 미련이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돈 때문에 힘겨운 나날을 보냈던 그에게 다른 무엇도 아닌 '돈'의 굴레를 씌운 데 대해선 가슴에 커다란 멍이 맺혔다. 훗날 DJ가 동교동으로 돌아온 후 인사차 찾아갔을 때 DJ는 손숙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미안하다. 당시 분 것은 미친 바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건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다."

몇날 며칠을 한밤중에도 깨어 벽을 치며 통곡하던 그에게 힘이 되어 준 것은 소녀 시절부터 친하게 지낸 친구들과 "배우는 극장에 있어야 한다"며 "빨리 무대로 돌아오라"고 호통을 친 임영웅 산울림소극장 대표였다.

"이임 이틀 후쯤인가. 새벽에 미국에 사는 친구가 전화를 했어요. 무조건 지금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 오라는 거였어요. 결국 이튿날 미국행 비행기를 탔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사흘간 먹고 잠만 잤어요. 그런 후 1주일간 그랜드캐니언 등 미국 곳곳을 여행했어요. 완전히 [델마와 루이스]였죠. 그런데 그 친구는 단 한 번도 제게 '왜?'라고 묻지 않았어요. 제가 '넌 왜 나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지 않니?'라고 하자, 친구가 그러는 거예요. '네가 하는 일인데 물을 게 뭐 있니. 넌 잘했어. 난 네가 내 친구라는 게 자랑스러워'라고요. 그때 제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다 풀렸어요."

연극인 손숙

이야기 사이 사이 그는 강금실 법무장관을 화제에 올렸다. 강 장관과 자신이 삶이나 취향면에서 너무도 흡사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실제로 두 사람은 남편의 빚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던 것부터 시작해 여러 모로 닮았다. 그는 "강 장관과는 공감대가 잘 형성될 것 같다"며 "꼭 한 번 만나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고 말했다.

손숙의 세 딸 중 위의 두 딸은 현재 호주로 이민가 살고 있다. 셋째딸도 곧 언니들이 있는 곳으로 갈 계획이다. 언젠가 엄마를 만나고 돌아간 후 둘째딸은 이런 편지를 보내왔다고 한다. '엄마가 늘 즐겁게 사는 줄 알았는데, 그동안 가족을 위해 엄마 자신을 희생하면서 살아온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고. '그래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내내 울었다'고. 아이들에게만은 항상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려 했던 손숙은 딸의 편지를 받아들고 눈시울을 붉혔다.

삶에 지칠 때마다 입 밖으로 소리내어 '엄마' 하고 부른다는 손숙. 그 단어만으로도 평온을 얻는다는 그는 무대 위에서나 무대를 내려와서도 한결같이 빛을 발하는 사람이다. 인생의 숨가뿐 고비를 여러 번 넘어선 까닭일까. 결 고은 잔주름이 안온한 표정을 만들고 있는 그의 얼굴에서 깊은 울림이 있는 여백이 느껴진다. 고단한 몸을 그 어깨에 기대고픈 '엄마'의 따뜻한 '정'이 배어나온다.



'아름다운 가게'서 아름다운 말년

손숙이 말한 '말년에 할 일'이란 2002년 10월 박원순 변호사와 함께 문을 연 '아름다운 가게' 운영을 말한다. 아름다운 가게는 기증품 판매수익으로 자선사업을 벌이는 재활용품 전문매장이다. 서울에만 10개의 매장이 문을 열고 있고, 지난해 12월엔 광주에도 매장을 오픈했다. 손숙은 "1월 7일 명동점 개장을 비롯해 2004년 안에 매장 수를 50개로 확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연말에 150명에 달하는 점장이 모여 송년회를 했어요. 비상근 자원봉사자로 꾸리기 때문에 한 점포당 10여 명의 점장이 있거든요. 그 분들을 보면서 우리나라는 희망이 있는 나라라고 생각했어요. 부유층이라고 다 이상한 강남족만 있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이웃을 돕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에요."

그는 "박관용 국회의장도 2004년엔 정치 그만두고 아름다운 가게의 점장이 되겠다고 했다"며 "박 의장처럼 지도층이 사회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 우리나라 전 대통령들이 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무위도식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설령 총칼로 정권을 잡았다고 해도, 퇴임 후 사회봉사활동을 하면 영향력이 큰 데다 말년도 평온할 수 있을텐데 말예요. 전직 대통령들이 국가의 어른 역할을 제대로 하게 되면 좋겠어요."

그는 아름다운 가게만 떠올리면 '행복'하다고 했다. 기자는 10년 후 이웃사랑 실천의 장인 아름다운 가게에서 '아름다운 노후'를 맞이할 손숙을 연상하며 더불어 행복해졌다. 

<인터뷰 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사진 김석구 기자 sg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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