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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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인생사 수많은 일이 쌓여 있겠지만 그 중 으뜸은 남녀간에 정분나는 문제가 아니겠는가. 이 화두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재용 감독의 세번째 영화 [스캔들]은 상당히 기분 나쁜 영화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인생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작업'이라고 생각하는 '선수'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시대는 수백년 전 조선 말기이지만 정분나는 남녀야 시대가 어느 때든 처음 작업 들어가는 설렘은 여전하고, 숨겨진 비장의 노하우를 이용한 고수의 화려한 초식은 관전자를 몰아의 경지로 몰아넣는다.

[스캔들]을 재미있게 만드는 첫번째 요소는 고수들의 화려한 작업방법이다. 더구나 상대가 8년 동안 수절한 정절녀라면 작업 목표는 드높아지고 치밀한 방법이 동원될 것이며, 만약 목표를 이룬다면 그 성취감은 하늘을 찌를 것이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영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원작은 1782년 출간된 프랑스 작가 쇼테를로 드 라쿨로의 서간체 소설 [위험한 관계]라는 것이다.

[스캔들]의 원작 소설은 이미 로제 바딤의 [위험한 관계](1959년), 스티븐 프리어즈의 [위험한 관계](1988년), 밀로스 포먼 감독의 [발몽](1989년), 로저 컴블의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1998년)으로 시대와 국적을 달리하여 영화화되었다.

이 원작소설의 그 무엇이 시대와 인종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 흥미를 끌어모으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이다. 빔 벤더스가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영원한 삶을 사는 천사들의 입을 통해 술회한 것처럼 공기를 느끼고 쾌락을 맛보고 구체적으로 손끝에서 만져지는 사물의 감촉을 느낄 수 있는 인간의 삶은 유한하지만 위대하다.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스캔들]을 지배하는 정서는 인간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우리의 흥미를 자극할 남녀간의 유혹의 이야기이며, 그 팽팽한 줄다리기의 긴장감을 즐기는 선수들의 이야기이다. 난공불락의 성을 온갖 작업을 동원하여 함락한 뒤 쓸개처럼 버리는, 거짓 사랑과 음모, 배신, 갈등의 이야기는 조금 과장한다면 한 국가의 흥망성쇠 이야기와 견주어 결코 비중이 작지 않다.

[스캔들]은 '조선남녀상열지사'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것처럼 엄격한 유교주의로 남녀칠세부동석을 주장하던 조선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은밀한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18세기 프랑스 원작 소설이 무리없이 번안 각색된 시나리오도 훌륭하다. 후반부에 다소 늘어지는 결점은 있지만 같은 원작을 모태로 하고 있는 다른 영화와 비교해봐도 결코 손색이 없다.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중년층의 나이든 독자라면 어린 시절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아 무정]이라는 제목의 소설로, [집없는 아이]를 [부평초]라는 제목으로 번안된 작품을 읽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또 지난 9월 30일까지 국립극장 별오름 극장에서 공연된 [뮤지컬 파우스트]도 괴테의 원작을 작가 김나영이 한국적 상황에 맞게 번안해 각본을 쓰고 작사를 한 작품이다.

번안 작업은 특히 아동문화 쪽에서 활발하다. 아직 세계를 포괄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아이에게 좋은 외국 작품을 무리없이 전달하는 방법으로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지난 10여 년 동안 대학로 연극무대에서 2,000회 가깝게 롱런하면서 관객의 사랑을 받은 극단 학전의 [지하철 1호선]은 독일 연극 폴커 루드비히의 [1호선]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원작이 1980년대 독일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지하철 1호선]은 몇 차례의 수정을 거친 끝에 IMF 이후의 혼란스러운 한국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한국적 상황에 맞게 대폭 수정되었다.

우리 작품이 외국에서 번안되는 경우도 많다. 최근 뉴스에 의하면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김시습의 [금오신화] 속 5편의 소설 중 2편이 중국어로 번안되어 19세기 초반 출판되었다고 한다. [동해유문]이라는 책에, [이생규장전]을 각색한 [이생]과 [만복사저포기]를 각색한 [양생]이라는 제목으로 [금오신화]가 각각 소개되어 있다.

현재 일본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 보아는 국내에서 [밀키웨이]로 알려진 곡을 [너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일본어로 번안하여 싱글앨범을 출반했다. 또 한류 열풍을 타고 우리 가수들의 많은 노래가 중국 베트남 필리핀 태국 등지에서 번안되어 불리기도 한다.

[스캔들]은 번안 문화의 모범적 사례를 보여준다. 모든 작품이 다 번안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대를 초월하여 인류에 보편적 감동이나 흥미를 자극할 수 있는 작품은 번안으로 또다른 생명력을 획득한다.

하재봉[문화평론가-인하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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