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피복노조의 '아버지'로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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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피복노조의 '아버지'로 등장

그러한 노동자가 밀집한 청계천의 평화시장은 단테나 엥겔스조차도 질식시킬 만큼 거대한 닭장 모양의 고도 착취사업장이었다. 그들의 하루 임금은 다방의 커피 한 잔 값에 해당했다(〈브루스커밍스의 한국현대사〉 참고). 한 노동자의 외침은 그 속에서 터져나온 것인데 다행히 목격자가 있었다.

"옅은 잿빛 구름이 하늘을 우중충하게 뒤덮은 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 25분경. 서울 음대로 들어가는 골목 평화시장 입구의 사람들 틈에 서 있던 한 청년의 옷깃에서 검은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사람들이 한 광인의 미친 짓이나 아닌가를 생각하고 있는 동안 청년의 몸은 불길에 휩싸이기 시작했고 처음 멍청히 바라만 보던 행인들도 불을 꺼야 되지 않느냐고 술렁댔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작업복 바지에 검은 빛 코트를 입은 청년은 한 일(一)자로 굳게 입을 다물고 선 채 차츰 거세지는 불길 속에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불길이 이미 상체에 붙어 타오르기 시작한 약 2분 후 그를 둘러쌌던 행인 중의 몇 사람이 구경꾼들을 비집고 들어가 입고 있던 점퍼를 벗어 덮어 씌웠다. 점퍼에 덮인 부분은 잠시 불길이 잡히는 듯했으나 점퍼를 떼는 순간 불길은 가쁜 숨을 들이마시는 듯 더욱 기세 좋게 타올랐다. 멀리서 이 광경을 보던 시장 경비원이 평화시장 2층으로 소화기를 가지러 뛰어갔다. 점퍼를 덮는 것이 진화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음을 알자 한 청년은 불타고 있는 옷을 잡아 벗기려 했다.

청계피복노조의 '아버지'로 등장

그제야 구경꾼들은 이 청년이 결코 미친 것도, 장난으로 몸에 불을 지른 것도 아닌, 바로 옆에 있는 시장작업장의 근로조건을 개선해 달라는 필사의 항변이었음을 알아차렸다."(강성재, 〈그 후의 평화시장〉, 〈전태일 평전〉 참고)

그러나 청년은 끝내 그 밤을 넘기지 못했다.

"13일 하오 1시 30분께, 서울 중구 청계천 6가 피복제조상인 동화시장 종업원 전태일씨(23, 성북구 쌍문동 208)가 작업장 안의 시설 개선을 요구하는 농성을 벌이려다, 출동한 경찰에 의해 제지당하자 온 몸에 석유를 뿌리고 분신자살을 기도, 메디컬센터를 거쳐 성모병원으로 옮겼으나 이날 밤 10시께 끝내 숨졌다"([한국일보] 1970년 11월14일자)

한창 성서번역에 몰두해 있던 문익환은 그것을 신문에서 읽었다. 세상에!

삶은 선택을 허락하지 않는다. 생(生)은 명(命)이다. 살려면 살고 말려면 마는 것이 아니라 살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 따라서 생명은 불가피하게 자라려고 하는 힘을 갖는다. 생명의 마음, 생명의 본능은 내일을 지향한다. 생명은 '지금 있는 것'이면서 '장차 있어야 할 것에 대한 꿈'을 내포하고 있다. 전태일이 받아 든 '생'의 '명'은 죽음이었고, 그 죽음은 '죽임'을 파괴하는 부활의 길을 향하고 있었다.(박정철, 〈문익환의 시 세계에 나타난 생명사상〉 참고)

전태일이 책자 〈근로기준법〉과 함께 불타버린 사건은 문익환의 감수성을 한없이 자극하였다. 부활을 관념으로만 이해한 보수교단의 율법주의와 갈등해온 문익환과 그 동료의 눈에 전태일의 죽음은 신학적 기초를 바꿀 만큼 의미 있는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그것은 당시 KSCF 사무총장 오재식이 〈기독교사상〉에 쓴 〈어떤 예수의 죽음〉이라는 추모사에 드러난다.

청계피복노조의 '아버지'로 등장

과연 전태일의 죽음은 엄청난 에너지로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가 던진 일파만파로 한국의 정치-사회 정세는 갑자기 격동하기 시작했다. 죽은 지 사흘째 되던 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서는 학생 100여 명이 모임을 갖고 전태일의 시체를 인수하여 서울법대 학생장(葬)으로 장례식을 거행하겠다고 주장하였다.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생 400여 명은 무기한 단식투쟁에 돌입했으며, 1970년 11월 20일에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생 200여 명, 문리과대학생 100여 명, 이화여자대학 30여 명이 '추도식'을 갖고, 기업주-어용노총-지식인-사회인을 고발하는 항의시위에 나섰다. 연세대학생 200여 명, 고려대학생 300여 명도 항의집회를 열고 '국민권리선언문'을 채택하였다. 이내 서울대학교에 무기한 휴교령이 떨어졌으며, 야당까지 나서서 노동정책에 항의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교회 학생부에서 금식(禁食) 기도회가 열리고, 이 대학 저 대학에서 성토대회를 열었으며, 교인들도 신-구교 합동으로 추도예배를 가졌다. 그 자리에서 김재준 목사는 "우리 기독교도들은 여기에 전태일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라, 한국 기독교의 나태와 안일과 위선을 애도하기 위해 모였다"고 말했다. 그 밖에도 사회 여론의 움직임 속에, 신문과 잡지들의 보도와 논설 속에, 정치인들의 구호와 선전 속에, 종교인들의 참회와 기도 속에, 그리고 노동자들과 학생들의 부르짖음과 가슴속에, 쉴새없이 전태일의 이름이 떠올려졌다. 어떤 시민들은 조의금을 보내면서 이름을 밝히지 않았고, 어떤 단체는 기념비와 동상을 건립하겠다고 모금을 추진하였다.

전태일의 파장은 이렇게 컸으나 그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아마도 그가 죽은 바로 그 달에 결성되어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주도 아래 혹심한 탄압을 견뎌낸 청계피복노조였을 것이다. 문익환은 자신을 그 노조 곁에 세웠다. 처음에는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익명의 시민으로!

많은 사람들은 문익환이 1976년 3-1구국선언으로 재야에 등장했다고 말하지만 이소선 여사는 '전태일이 죽은 후'라고 답한다. 하긴 아무도 알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전태일 평전〉은 첫 장에 짤막한 문익환의 글을 싣고 있는데, 당시의 모습이 그랬다.

청계피복노조의 '아버지'로 등장

아직은 땅속을 흐르는, 민족사의 물줄기가 되어야 할 물방울 하나!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은 삼엄한 감시와 탄압 때문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형편이었다. 당신은 물정에 어둡고 열사의 친구들은 아직 어리고, 전화는 도청되고 방문자들은 불이익을 당하고.... 그러한 상황에서 청계노조를 지켜줄 용기 있는 구원자는 두 사람뿐이었다. 어머니는, "장기표 선생은 우리를 가르치는 담임이 되고, 문익환 목사님은 우리를 보호하는 아버지처럼 행동했다"고 말한다.

이후 문익환은 이틀이나 사흘 걸러 한 번씩 반드시 청계노조를 방문하여 밥을 사 먹이거나 뜨거운 격려의 말을 주고 갔다. '역사의 발'이라 할, 밑바닥 사람들을 섬기기 위한, 소위 문익환의 하방(下方)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문익환이 1971년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고 애써 강조하는 데는 이유가 없지 않다. 그해 1971년에 그는 만 53세였다. 그 해 첫날을 '현재형'으로 노래하는 시 [53]은 내용상 처녀작에 속한다. 그 이듬해의 시 [덤]이 말하듯 "'쉰까지만 살았으면'/하는 폐병 들린 허약한 소원이/꺾일 듯 꺾일 듯하다/지나치"고 나서 3년 만에 맞는 새해 아침. "하늘까지 적시는 이슬비가/가만가만" 내리고, "극성스런 태양은 숨어버렸는데/내 뜨락은 환하기만 하다"고 노래한 소생의 분위기 속에는 문익환의 생이 U턴을 시작한 전기(轉機)가 숨어 있다. 문익환은 아마도, 이제부터 존재의 기원(起源)을 아버지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두기로 하고 그에 대한 기념으로 아호를 지었을 것이다.

늦봄, 그렇다, 늦봄! 그는 봄을 좋아했지만 "철도 없이 지레 나온/풀 포기/두셋/길섶에서 오들오들"(〈너무 이른 봄〉) 떨거나, "그리 따뜻하지도 않은/봄볕에/허겁지겁 쫓겨 들어온/한기"(〈이른 봄의 단상〉)의 시간들을 포근해 하지 않았다. "어차피/너는/봄의 선구자다"라고 말할 때는 삶의 태도가 그렇듯이 피안의 불을 보는 듯한 거리감도 느껴진다. 그래, 늦봄으로서 이제 세상에 처음 태어나기나 한 것처럼 노래하는 것이다. "생소한 골목길들을 지나/아름다운 노을이 비낀 저/낯선 문짝을 열고 들어서면/처음 만나는 얼굴들이 또/나를 반겨줄 테지"(〈새삼스런 하루〉). 그러나 한없이 여린, 이 독백의 서정 속에는 그가 소승적인 신학자에서 대승적인 구도자로 탈바꿈하려는 예비동작이 담겨 있었다. 아무도 모르는 시간에, 문익환이 전혀 다른 사람으로 재탄생해 버린 것이다. 그것은 가족들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김형수〈소설가-중앙대 예술대학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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