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적 정열가로 변해가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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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적 정열가로 변해가던 시절

사실 그는 속박에 매이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충동이란 억누를 수가 없는 것, 존재의 저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생명의 분출은 억누른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프로이트의 해석에 의하면 그것은 고작해야 '억압되어 무의식층으로 옮겨질 따름'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위험하게 구부러진 충동'이 되어 '영혼의 방 안에 갇혀서 끊임없이 들끓고 신경불안-장애-질병'을 만드는 쪽으로 귀결된다. 때문에 충동을 삭이지 못하는 사람은 지구상의 모든 도시와 마을과 촌락마다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들이 다 문익환 같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내부의 욕망을 분출하는 방식은 참으로 독특했다. 세련된 교양과 선량함, 구도자적 수양으로 다져진 최상급 지식인이 온통 서울거리를 누비며 동화적 에피소드를 퍼뜨리는 것이다.

"문학작품 중의 문학작품이라는 구약성서를 어떻게 훌륭한 작품으로 옮겨내느냐는 생각이 처음부터 나의 가슴을 무겁게 눌렀소. 특히 그 시들을 어떻게 하느냐, 처음에는 한국시단을 총동원할 심산이었는데, 그것이 뜻대로 안 되더군요."

여기서 그는 충동적으로 '한국시에 머리를 처박는' 것이다. 당시 그의 별명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둥근 달'이었다. 둥근 달이라니! 소녀적 향기로 가득 찬 습작을 든 50대의 신학자가 인기 시인들을 찾아다니는 모습이란 퍽 엽기적이었을 것이다. 당시 문익환의 추앙을 받아보지 못한 문인은 없다시피 했다. 윤동주가 살아 있었더라면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 황금찬-조병화-박목월 등 문학소녀를 몰고 다니던 시인들은 '자신의 팬'으로서의 문익환 이미지를 오랫동안 수정하지 못했다.

그러나 자기 안에 축적된 모든 능력을 오로지 한 방향으로만 투입하는 사람이 가장 강한 법이다. 단 하나의 믿음에 몰두하는 것처럼 꺾기 어려운 힘은 없다. 문익환은 그런 모범적인 편집증 환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정신은 오른쪽도 왼쪽도 궁금해하지 않고 '앞으로! 앞으로!' 한 방향으로만 나아갔다. 그리하여 오직 성서를 전파하는 일에 감사하면서 문청(文靑) 기질을 발휘한 것이 미친 영향은 컸다. 그토록 갈망했던 '탈(脫)영토화(?)'의 꿈이 자신도 모르게 달성돼버린 것이다.

"저는 어려서부터 교회의 울타리 속에서 자랐습니다. 과거 몇 년 동안 이 울타리 밖으로 나가보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할 때마다 너무나 딴 세계의 사람이 되어서 어울리지 못하는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백면서생의 육신에 잠재된 강력한 천성이 솟구쳐나왔고 활동적인 재능도 살아났다. 감상적인 성향의 시인 지망생이 하룻밤새 정력적이고 능숙한 시인으로, 피로에 지친 병자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강한 정열가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 놀라운 변화를 이웃이 눈치채지 못한 것은 순전히 '섬김'의 자질 때문이었다. 남을 섬기고 세상을 섬기는 일이야말로 그가 어려서부터 타고난 자랑할 만한 소질의 하나였다. 한 사람의 목회자로서 그가 평생 감내했던 숱한 설교와 집필활동에서 그것은 구구절절 드러난다. 언제나 예술과 곡예의 불꽃을 뿜는 감각적인 시인들의 도취한 산문과 비교해보면 문익환의 산문은 냉정하고 침착하고 아무 색채가 없었다. 누구도 선동하지 않고 구애(求愛)하지 않으며, 시적인 밑그림도 음악적인 율동도 포기한 문체! 자신이 그렇게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 그는 어느 수필에서 설명한 적이 있다.

활동적 정열가로 변해가던 시절

그제야 나는 김 목사님이 기념비적인 저서보다는 낱글을 즐겨 쓰시는 심정을 좀 알 것 같았다. '내 글을 읽고 잊어버리는 거야' 이런 담담한 심정으로 쓰신 글이니 글치고는 샘물처럼 맑은 글이 아니겠는가."

콩나물에 물주기! 그 무렵에 그것을 익히고 있었다. 그는 과연 그 콩나물에 물주기 같은 문체로 자신이 발견한, 구약에 펼쳐지는 광활한 대지를 사람들 앞에 내민다.

"이스라엘 민족과 한국 민족은 지리적으로 너무나 상통하는 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남방에 이집트, 북쪽에 시리아-바벨론, 동쪽에 페르시아, 서쪽에 헬라와 로마 같은 강대국 틈바구니에 끼여서 이리 찢기고 저리 밀리고 하면서 독립을 유지하기 겨우 500여 년. 이스라엘 민족사는 그대로 수난사였습니다."

하지만 그때 저 가파른 1970년대로 진입하는 한국을 개선하려는 실천적 의지가 과연 있었는가. 1960년에서 70년까지 문익환의 설교는 온통 분단현실을 한탄하는 일에 몰두하지만 출구를 찾는 혜안은 없었다.

모든 지식인은 자신의 인식으로 세계를 투사한다. 인식의 힘은 대상에 떨어지는 빛과 같은 것이다. 책상은 어두운 공간에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있건 아니면 불빛에 노출되건 여전히 책상이다. 빛은 책상이 거기 있는 것을 감각적으로 알아보게 만들지만 그렇다고 빛이 책상을 낳지는 않는다. 문익환이 내쏘는 인식의 빛이 투사되건 말건 당대의 현실세계도 어둠 속의 책상처럼 그렇게 놓여 있었다. 수십 년에 걸친 식민지 체험과 민족분단, 정치적 소요, 무참한 전쟁, 수백만 인구의 죽음과 이동 그리고 절망적인 분단과 가난.... 한반도는 이미 세계적인 갈등의 박물관이 되었건만 민족사적 전망을 기대할 곳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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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의 길을 가기는 북측도 마찬가지였다. 구(舊)식민지 지위에서 정치적 독립을 획득한 후에 경제적-군사적 자립을 열망하는 대부분의 신생 후진국들이 갖는 최고의 관심사는 과연 약소국이 미국의 지배권 밖에서 정치-경제-군사적으로 독자의 길을 가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점인데, 당시의 북은 그것을 실증하는 산 견본이요 모델의 하나였다. 중국이나 소련 어느 쪽에도 예속되지 않고 그 나름의 자립체제를 확립시켰을 뿐만 아니라, 베트남의 민족해방 세력을 지원하고, PLO의 편을 들며, 프랑스를 상대로 독립전쟁을 하고 있는 알제리에 한국전쟁 때 포획한 미제 무기와 탄환들을 주어버리는 기염을 토했던 것이다. 그것이 비동맹 제3세계 국가들에 준 공감과 인상은 강렬했을 것이다.

이제 막 자본주의적 성공의 가능성을 엿보기 시작한 남측도, 주체적 사회주의의 길이 가능하다고 판단한 북측도 서로 멀어지지 않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국경도 아니고 행정구역의 분할선도 아닌 휴전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전혀 다른 길을 가는 한 민족의 두 세력은 이렇게 분발할수록 더욱 곤혹스러워지는 냉전의 딜레마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오직 제1세계만 동경하여, 값싸고 훈련받은 노동자, 재능 있는 기술관료, 높은 GNP 성장률, '양키 고 홈'을 한 번도 외치지 않는 시민들을 가진 나라가 박정희 치하의 한국이라면, 끝없이 제3세계화의 길을 가며 비동맹 국가들과 연대하여 미국의 불쾌감과 적개심을 자극하는 나라가 김일성이 이끄는 북조선이었다.

그렇다고 남이 와서 돕나? 당시 미국은 자본주의 진영에서의 리더십에 부하가 걸려 심히 어려운 상황이었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팽창은 과잉될 대로 과잉되어 각 대륙의 지역방어를 위한 다섯 개의 조직에 참여하는 것도 부담이었고, 30개 동맹국의 공개된 기지에 있는 1백만 명 이상의 병사들을 유지하는 것도 힘겨웠으며, 소련의 남하를 막는 '봉쇄선'에 위치한 42개국과 방어조약을 체결하여 게릴라에 대응하거나 소련의 핵무기를 억제하는 정책을 준비하는 것도 벅찼다. 그런 와중에서 베트남전쟁의 실패로 각종 작전들에 의문이 증폭되고 대학들이 동요되어 반전-반미 정서가 유럽의 도시들로 확산되고 있었다.

그같은 현실을 문익환은 알고는 있지만 등한히 하거나 침묵 속에 방관했다. 그 점은 동생 문동환과 대비되었다. 그 무렵이면 한국의 교회들은 박정희 독재에 저항하는 주된 성지가 되어 있었다.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는 대학교 정문쯤이야 부술 수 있지만 교회를 무너뜨리는 일은 할 수 없었다. 와중에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이 건너왔으며, 기독교인들이 운영하는 도시산업선교회가 맹활약을 펼쳤다.

"나는 성서번역에만 몰두해 있었죠. 그것이 나의 평생의 일이라고 생각되었기도 하지만 그때에는 동환이가 인권운동의 일선에 나서 있었기 때문에 나는 마음놓고 성서번역에만 정력과 시간을 쏟으면서도 별로 마음이 괴롭지 않았던 거죠."

그러던 어느날 놀라운 뉴스가 들려온다.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노동자 전태일이 분신한 것이다.

김형수〈소설가-중앙대 예술대학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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