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51세, 시에 빠져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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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나이 51세. 성서 공동번역의 책임위원이 되는 순간 문익환은 정확히 생의 전환점에 서 있었다. 삶은 흐르는 물과 같다. 삶의 현실은 어디선가 끝없이 샘솟는 강물처럼 흘러와 잠시도 쉬지 않고 세상의 관계를 재편해놓는다. 자만에 찬 전위들은 낙오의 길을 가고 선지자를 뒤쫓던 이가 홀연히 전위가 된다. 그는 어느날 종로2가 대한성서공회로 출근하면서 자신이 비로소 한글 성서번역에서 명실상부한 정상에 도달한 것을 확인했다. 그때 그가 얼만큼 설레었는지 증언할 사람은 없다.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에 자신의 감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 다들 감쪽같이 속았을 것이다. 항상 누군가를 동경하고 부러워하는 것을 취미로 알던 사람이었다.

그는 이 시기에 맞는 수다를 하나 발견했는데 그것은 바로 시인들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일이었다. 김현승을 존경하고, 박목월을 흠모하며, 황금찬과 어울리노라! 하지만 그가 시에 처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때가 언제인지를 증명할 사람은 없다. 구약의 40%가 시이기 때문에 성서번역상 공부하게 되었다는 말에서는 공동번역 일을 하다가 시를 시작한 듯한 느낌을 주는 애교스런 엄살을 걷어내야 된다.

나이 51세, 시에 빠져들다

그 옛날 문익환 목사가 설교하던 한빛교회에서 지금 목회활동을 하고 있는 유원규 목사는 그를 무화과에 비유한다. 무화과는 아무도 몰래 열매를 맺는다. 사람들은 무화과가 꽃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해서 꽃이 없는 과일이라고 이름붙였다. 그러나 무화과는 열매 안에 꽃을 감추고 있다. 그것이 자신의 내부에서 꽃을 틔우고 열매를 발육시키는 것을 외부에서는 보지 못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농축되고 농축되어 마침내 터져버린 다음에야 사람들은 무화과에 깃든 훌륭한 결실의 서사를 이해하는 것이다.

성서 번역에 돌입하자 문익환은 곧 자신감이 솟았다. 학교에서의 모습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은 그의 내부에서 생명이 약동하고 힘이 분출하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지만 그 모습은 분명 그 시대를 살아온 자들의 기억 속에 새겨져 있다. 김용옥은 이렇게 쓴다.

"까만 두루마기를 입은 어떤 노신사가 우뚝 서 있었다. 흰 동정에 옅은 뼈테 안경을 쓴 얼굴에서 발하는 빛의 느낌이 나를 어지럽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키가 훤칠했고, 얼굴은 웃음이 만면하고, 추운 겨울이었지만 화색이 화창한 봄 날씨보다 더 환했다. 옆에서 누구와 유쾌히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그 노신사의 모습에서 나는 신앙인의 삶의 어떤 영감 같은 것을 읽고 있었다. 그때 나는 그분이 누구인 줄도 몰랐고 감히 말을 걸 생각도 못했다. 그렇지만 그 순간 그 얼굴에서 받은 해맑은 느낌이 나로 하여금 신학대학 입학의 결심을 굳건하게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 (...) 당시 그 선생님은 구약성경 공동번역판 원고 집필에 몰두하고 계셨을 때였다."(김용옥, 〈노자와 21세기(1)〉)

나이 51세, 시에 빠져들다

"20세기 초반에 접어든 오늘 이 민주적인 시대의 '바람직한 지도자상'을 논하는 마당에 2,000여 년 전 팔레스타인 땅의 지도자상을 더듬어본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시대착오라고 느껴진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역사를 쓰거나 역사소설을 쓴다는 것은 내가 지금 감행하려는 모험-시대착오에 빠질 위험을 뛰어넘는-을 감행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시대착오에 빠질 위험을 뛰어넘는 모험! 거기에 그는 기꺼이 빠지고자 했다. 성서 때문에 시에 눈뜨기 시작했다고 말하는 것도 그러한 도전적인 암시의 하나였다. 근대를 지배하는 시대정신, 즉 '과학'은 세상의 모든 현상에서 '이유'를 찾고, 땅 위의 모든 것이 설명될 수 있으며 예측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당대의 지식인은 지상의 어디에서 살든 모두 그 근대의 신념을 머리에 이고 살았다. 자신의 삶이 의미 있는 것이기를 바라는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서 자꾸만 이유와 목적이 없는 것은 제거해버린다. 그리하여 손익계산에 밝은 산문적인 인간이 양산되는 것이다. 세계를 이처럼 사건의 인과적 연속으로 축소시키는 것에 맞서서 시는 정신의 자유로움과 탈선을 부추기는 불온한 것이었다. 문익환이 시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시의 불온성이 예언자 정신의 본질이라 본 까닭이었다.

나날이 축복과 감사의 기쁨이 넘치기 시작했다.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민족사에 기여하겠다는 것은 명동촌 시절부터 꿈꾸던 일이었다. 한글성서와 그리스도 교회가 겨레문화에 미친 영향에 대해 문익환 등이 가졌던 자부심은 컸다. 세월이 흘러 재야활동에 묶였을 때 그가 성서번역에서 손을 놓은 것이 민족사적 손실이라고 전택부가 항변했던 데에는 이유가 없지 않았다. 한글성서는 배우기 어려운 한자문화권 안에 갇혀 있던 겨레의 어문학을 해방하여 민중과 여성계의 문맹을 퇴치한 민족사의 교사였다. 그로부터 공공집회에서의 남녀동참, 인간 평등사상 고취, 반상동석(班常同席), 민주적 회의법의 훈련, 한글전용 문화의 정착, 새 음악운동에 공헌한 찬송의 보급, 정치와 언론에서 보인 선각자적 공헌, 일제 때부터 이어진 민족주의적 계몽운동, YMCA 실내체육관을 모임의 장소로 한 시민체육운동의 육성 등 실로 눈부신 변화들이 파생되었다. 한글성서와 기독교가 이렇게 우리 겨레의 신문화 건설에 이바지한 사실을 회고하며 김재준 목사는 훗날 어느 축사에서 "성서가 일반 민중의 책으로 번역되었다는 것과 그것이 지극히 싼값으로, 바닥 민중에게까지 제공되었다는 것은 그것 자체가 일대 문화혁명이었다"고 증언한다.(〈한글성서와 겨레문화〉)

성서번역에는 바로 그 같은 의의가 숨어 있었다. 그렇다! 그것은 기독교의 역사가 증명하는 바였다. 교회가 성장해서 로마의 국교가 될 때부터 하느님의 말씀으로서 성서의 권위야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곧 성서를 해석하는 사람의 권위를 반영했다. 성서는 일단 그것을 읽을 수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 성서를 읽고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교회에서 지도자 역할을 했다. 이렇게 해서 성서해석자의 권위는 점차 성서보다 우월하거나 성서만큼 신빙성 있는 것이 되었다. 그 불합리한 권위체계를 파괴하는 자리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난다.

나이 51세, 시에 빠져들다

똑같은 비유가 문익환에게도 가능할 것이다. 문익환은 번역가로서 성서의 이미지를 가능한 한 한국적 표현으로 옮기려 했다. 그가 가톨릭측 번역자인 선종완 신부와 상의하여 내세운 원칙은 "한국인 전체가 읽을 수 있는 번역" 그리고 "한국인의 생각을 무리 없이 움직여 생의 궤도를 바꿀 수 있는 번역"이었다. "한국인 전체가 읽을 수 있는 번역"이란 교회 안에서만 통하는 번역이 아니라 교회 바깥에서도 통하는 번역을 의미했다. 구교의 장벽 안에서만 통하는 말이나 신교의 울타리를 못 넘어서는 말은 아낌없이 버리기로 했다. 더군다나 신학자만 아는 말은 금물 중의 금물이었다. 한국말을 하면서도 서구적인 사고에 젖어 있는 지식인이나, 한국말은 토씨 정도요 중요한 말은 다 한자어를 쓰는 학자의 말이 아니라 우리나라 서민 대중이 쓰는 말로 번역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한국인의 생각을 무리 없이 움직여 생의 궤도를 바꿀 수 있는 번역"이란 곧 번역된 글이 번역투를 말끔히 벗어버린 극히 자연스런 우리말이기를 원한다는 뜻이었다. 원문을 충실하게 재현시킨다는 이유에서 외국의 문법과 문장론적 형식을 그대로 우리말로 바꾸는 것이 종래의 번역이었다. 문익환은 이같은 번역으로 성서의 어떤 부분이 우리나라 기독교인에게 의미없이 겉도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히브리어는 구문이 간결하지만 섬세하지 못함에 비추어 우리말은 아주 세밀해서 생기는 현상이었다. 이를 그는 톱니바퀴에 비겼다.

"이를테면 히브리어 톱니는 굵고 한국어의 톱니는 잘아서, 굵은 히브리어 톱니를 그대로 남겨두면, 그 번역은 한국인의 사고에 들어맞지 않아 겉돌고 만다. 그러므로 한국인의 사고, 한국인의 생과 문화와 역사를 돌리려면 히브리어의 굵은 톱니를 분해해서 한국말의 톱니처럼 절게 다시 구성해야 한다. 번역한다는 것은 바로 이 일을 하는 것을 말한다."

히브리어와 한국어가 부딪칠 때 깨어져야 하는 것은 한국어가 아니고 히브리어여야 한다! 그의 이같은 주장은 번역의 정신을 넘어 선교의 정신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김형수〈소설가-중앙대 예술대학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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