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번역 책임위원에 위촉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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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남겨서는 안 된다! 쌀 한 톨이 나오려면 1년 농사일을 해야 한다! 북간도 명동촌에서 들었던 말을 문익환은 수유리의 자녀에게 고스란히 옮겼다. 밥 한 숟갈을 50번씩 씹으라는 말을 얼마나 열심히 했으면 식구들이 하나같이 어느 식사에 가나 자신의 가족을 만나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을까. 밥 먹는 속도가 유난히 느리고 식사시간이 긴 것은 문익환네 가족의 특징이 되었다. 그 긴 식사시간 안에 그들의 가정 문화가 담겨 있었다.

성서 번역 책임위원에 위촉되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세계의 모든 언어는 문명의 우열과 약육강식의 논리에 의해서 모든 약소국의 문자가 강대국의 문자에 흡수되면서 소멸의 길을 가는데 한글만은 가히 독보적인 존속을 과시하고 있었다. 다른 나라에서 차용한 문자도 아니고, 또 보기 드물게 소리 글자였다. 세종조의 학자들이 만들었다던 자음과 모음은 발음의 연결만으로도 옳은 소리를 낼 수 있어서 아무리 낯선 문화를 가진 민족도 단기간에 배울 만큼 과학적이었다. 하지만 15세기 당시의 현실과 지금이 같은 것은 아니니 필기구의 변화, 인쇄술의 발달, 기록매체의 변질에 따라 한글의 표기도 바뀌어야 하건만 표기상의 문제 하나가 해결되지 않고 있었다. 소리글자를 마치 한자처럼 조합하는 것이 당시의 한계였다면 이제는 한자꼴의 틀에 가둘 필요 없이 철자를 알파벳처럼 횡으로 정열하면 된다는 것이 문익환의 주장이었다. 소위 풀어쓰기 이론을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문익환은 훗날 방북했을 때 김일성 주석에게도 같은 주장을 한다.

문익환의 막내여동생 문은희는 가끔 친구들이 와서 보고 나이 든 오빠가 친구처럼 마주앉아 그런 토론을 하는 것이 무척 부럽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은 그러한 삶을 통해 평화를 배우기도 했지만, 더욱 중요하게는 삶의 원칙을 배웠다고 술회한다.

"우리는 기독교도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정에서 배웠다. 남들이 일방적으로 쓸려가더라도 혼자 제 길을 가는 것처럼 중요한 일은 없다. 그렇지 않고서 나중에 하느님 앞에서 뭐라고 변명할 것인가."

하지만 토의와 자율이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인간의 공동체는 때로는 객관적 능력에 상관없이 겸양의 미덕이 큰 자를 희생시키기도 한다. 그런 일은 문익환의 집에서도 있었다. 아버지와 장남의 격정적인 개성에 비추어 남은 동생들의 생활은 한없이 평화롭고 고요하기만 하였다. 그러나 문영금은 1967년 연세대학교 차석합격자였으며, 문의근은 이듬해 서강대학교에 수석합격을 했다. 두 자녀는 각자 문 밖을 나서면 소문난 수재임을 과시했지만 집에서는 늘 거물 가족을 수발하는 조연 역에 불과했다. 가족 내에 주연이 너무 많아 전국을 누비며 말없이 선교활동에 전념하던 할아버지도, 가계를 책임지되 북간도 문화의 살아 있는 현 주소이던 할머니도, 구약을 파고드는 학문적 탐구열에 빠져 있는 아버지도, 사회적 활동에 가장 앞서가던 어머니도, 그리고 기독교가 아니라 예술을 향한 열정에 사로잡힌 장남도 송두리째 주연일 수가 없었다. 특히 영금과 의근은 아버지도 목사요 할아버지도 목사인 기독교 집안의 자녀로서 교회도 열심히 나가고 학교에서도 모범생이었지만 가족으로부터 특별한 주목과 배려를 받기에는 한 지붕 아래 자신들을 압도하는 경쟁자가 너무 많았다. 두 사람이 부모님의 관심을 온전하게 집중시킨 적이 있다면 문영금이 놀다가 다쳐서 어깨가 탈골됐을 때와 문의근이 수레바퀴에 발이 끼어 병원신세를 졌을 때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방치되었던 사람은 막내 문성근이었다. 형이나 누나들이 모두 두 살 터울인 데 반해 자신은 세 살 터울이요(그 때문에 4남매 중 3명이 대학생일 때 자신만 중학생이었다), 사춘기를 겪든 대학의 학과 선택에 고민하든 집안에서 왕성하게 토론되는 것은 모두 누나와 형의 일이었고, 자신이 정작 부딪쳐가는 주제는 언제나 토론이 끝나버린 식상한 문제가 되어 있었다. 자연히 그는 집안의 토론문화에서 한 발 밀려난 채 동네 아이들을 이끌고 놀아야 했다. 서울 시내와 교통이 두절되다시피 한 수유리 산속, 한국신학대학 캠퍼스 사택은 그가 아이들의 왕국을 만들어낸 하나의 동화 같은 세계였다. 학교 건물 앞 넓은 잔디밭과 숲을 지배하며 문성근이 이끄는 아이들의 공동체는 한신대 교직자 모두 그리워하는 추억이 되었다. 어른들이 교회 가고 없을 때 문성근이 나무에서 떨어져 팔이 휘어지는 바람에 훗날 배우가 되어 성형수술을 할 때까지 반소매 옷도 못 입게 되고, 화약물이 터져 서남동 목사의 아이가 장님이 되는 불상사가 있었지만 수유리 공동체는 유구했고, 그 속에서 문익환은 훌쩍 50세의 나이를 넘겼다.

그렇다. 문익환의 50세! 초라한 인생이었다. 그렇게 많은 기대 속에서 자랐지만 이루어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도대체 이 민족은 왜 이렇게 가족에 대한 헌신이 중요한가. 이 나라 사람은 모든 위대한 헌신을 가족에게 바치고 남을 괴롭힐 때도 가족에 대한 사랑을 볼모로 잡는다. 대통령이 되어도 가족이 문제시되고 대부분의 민중은 자신의 지도자뿐 아니라 그 자식에게까지 경애감을 갖는다. 그 같은 문화전통을 그대로 받아서 문익환의 집안에서도 먼 옛날 두만강을 건너갔던 선조들의 뜻이 오랜 세파에도 바래지 않고 구전돼갔다. 문익환은 어른이 되어서도 아버지에게 조상 이야기를 들었으며 어머니로부터 거기에 스민 훈시를 들었다. 문익환이 채록한 〈어머니와 아버지의 간도 이야기〉가 증명하듯이 그는 계속해서 통일운동에 나서라고 떠밀렸던 것이다. 가령, 아버지가,

성서 번역 책임위원에 위촉되다

이렇게 말하면 어머니도 거들었다.

"네 두 어깨에도 그 책임이 짊어져 있는거구."

이제 아들은, "책임이 정말 무겁군요."라고 답할 수밖에.

그러나 50세가 되어서도 그는 그 길을 아직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를 말할 수 없이 위축시켰으며 의기소침하게 했다. 후쿠오카 감옥에서 요절한 송몽규나 윤동주에 비추어서도 그러했고, 안병무-강원용 등 용정에서 은진중학교를 나온 민족주의적 기독교도의 지성에 비추어서도 그러했으며, 김재준 목사의 다른 제자나 장준하 등 도쿄신학생 출신과 견주어도 그러했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했고 성적이 우수했으며, 프린스턴 신학교까지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초라한 것은 그였다.

그같은 비교 속에서 형제간의 우애어린 경쟁이 있었다. 문씨네 가계가 빚어내는 장남 편애의 일화는 문익환 형제가 어른이 된 후에도 극복되지 않았다. 문익환이 건강상 포기한 박사학위를 문동환이 받아서 한신대에 봉직하고자 했을 때 어른들이 염려한 것은 문동환이 아니라 문익환이었다. 문동환이 귀국하면서 계획한 한신대 옛 동료와의 결합을 부모님이 불편하게 여긴 사실은 문동환에게 상당한 상처를 주었다. 사실 당시의 분위기에서 사회적 기여의 가능성은 문익환보다 문동환 쪽에 더 크게 열려 있었다.

4-19 이후에 형성된 김재준 목사를 둘러싼 기독교적 지성인 그룹의 역할 안에서도 문익환보다 문동환의 권위가 더 컸다. 나이는 비록 다르지만 강원용 목사도 문동환의 동창이요, 장준하도 문동환의 친구였다. 이후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서 배태된 재야활동에서 리더 그룹을 형성하게 되는 박형규 목사도 문동환의 동지였다. 학교에서 수업을 받는 학생도 문익환의 수업은 싫어하지만 문동환은 가장 인기 있는 교수에 속했다. 그런데도 한신대에 들어갈 때 정작 조바심을 친 것은 문동환이었다. 부모님의 염려가 엄연했던 탓이다.

"한 학교에 형제가 같이 있는 게 이상하지 않을까?"

차남이 공부를 많이 해서 얻어가는 교직을 막을 수는 없지만 행여 장남에게 불이익이 올까봐 부모님은 그다지 축하해주지 않았다.

이처럼 불편한 상황에서 문익환에게 위안되는 게 있다면 그것은 그가 성서 번역에서 거두고 있는 선구적 성취였다. 문익환은 과연 스승 김재준의 뒤를 잇는 구약학의 대가였으며, 복음동지회가 눈부시게 매진하고 있는 성서번역에서 핵심적인 지위를 점하고 있었다. 〈한국 기독교대백과 사전〉은 이렇게 설명한다.

"한편 대한성서공회는 이에 자극을 받아 1960년부터 신약성서 새 번역에 착수, 그 번역의 전문위원으로서 전경연-김철손-박창환 세 사람을 요청해왔으므로 복음동지회는 이를 승낙했다. 한편 복음동지회는 이 방대한 사업을 강력한 재정적 뒷받침 없이 한다는 것은 무모하다는 판단 아래, 만약 대한성서공회와 같은 비영리적인 기독교 기관이 적극 추진한다면 대환영한다는 뜻에서 문익환마저 구약성서 번역의 전문위원으로 파견하는 동시에 나머지 신약성서 번역도 중단하게 되었다."

성서 번역! 바로 여기에 문익환의 삶이 진정으로 이루고자 하는 숨은 뜻이 있었다. 여태까지의 교회 역사에서 많은 개혁자가 성서를 연구하면서 개혁의 기치를 닦았던 것처럼 문익환도 한국 기독교 사회에 대한 기여를 성서 번역에서 찾으려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러한 기회는 왔다.

1968년 신-구교가 함께 하는 성서공동번역의 구약 책임위원으로 문익환이 위촉되었다. 그는 자신이 부름 받은 것을 "영광이라기보다는 이루 다 말로 할 수 없는 축복이요 즐거움"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 세 가지 측면에서 '여리고성(城)'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첫째 신교와 구교의 벽이 허물어지는 경험, 둘째 신학적인 편견이 걷히는 경험, 셋째 히브리인들과 한국인들 사이의 벽을 허물고, 교회와 사회를 갈라놓는 말의 담을 허무는 경험. 이상 세 개의 담을 허물고 나서 그가 어떠한 폭풍을 일으킬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김형수〈소설가-중앙대 예술대학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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