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남 문호근과의 '고집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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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서사는 때로 불합리한 길을 따라 걷는다. 산의 정상에 닿기 위해 봉우리를 등지는 내리막을 하산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을 오르막이라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문익환의 중년 세월이 그랬다. 깊고 깊은 생활의 계곡에서 허덕이고 있을 때 그가 과연 모세의 길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든 완전주의자들이 그렇듯이 결벽을 버리지 못해 작은 일로 바둥대는 처량하기 그지없는 소시민적 고투를 세상은 애써 기억하려 들지 않는다.

장남 문호근과의 '고집대결'

땅 위의 인간들이 뿜어대는 모든 시선은 하늘의 별빛처럼 저마다의 자리에서 투사되는 법이다. 인간 하나하나가 오직 만물의 척도이어니. 문익환은 주변의 누구에게도 자신의 그 시절을 납득시킬 수 없었다. 언젠가 그를 도쿄 유엔사령부로 보낸 이가 장면 총리이고, 군사쿠데타로 밀려난 윤보선 대통령이 공덕귀 여사와 선볼 때 박용길의 남편 자격으로 불려나가기까지 한 내자측 최측근이라는 점만으로도 그가 정세의 흐름에서 깜깜하게 살아도 되는 처지는 아니었다. 한 술 더 떠 군사쿠데타의 주역을 맡은 만주군관학교 인맥들은 온통 광명중학의 동창이거나 선-후배였으니(아뿔싸! 목숨을 걸고 혁명공약을 발주한 업체 이름까지도 광명인쇄가 되다니!), 문익환에게 낯선 이라면 박정희와 김종필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만큼 배우고 리더십도 있었다면 무슨 일을 해도 했어야 옳았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복음동지회 친구들과 '조언하기 게임'을 할 때 전택부가 적어준 "야인이 되소서. 험하게 놀기도 하시고..."는 정곡을 정확히 찌른 촌철살인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러나 관심을 막상 문익환의 내면 쪽으로 돌리고 보면 아무리 전택부라 할지라도 그렇게만 말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당시 문익환은 기웃거리지 않는 곳이 없을 만큼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승만 정부가 간간이 저지르던 암살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시절의 재야였지만 그런 동네라 해서 문익환이 피해간 것은 아니었다. 김경재가 쓴 〈김재준 평전〉은 1960년대 후반기를 논하며 "박형규를 비롯하여 장준하-천관우-김관석-한승헌-이문영-서광선-현영학-이극찬-홍동근-안병무-이우정-서남동-문익환-문동환-김용준-신애균-강문규-김찬국-지명관-박상증 등이 김재준이라는 인물을 구심점으로 해서 반독재 지성인 그룹을 형성"했다고 서술한다.

장남 문호근과의 '고집대결'

혹자는 너무도 빨리 거물이 되며 보란 듯 스승이고 말지만 완전주의자 문익환은 너무도 오래오래 소년이길 고집했고 학생이길 희망했다.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끈기 있게 견디며 자신의 작업을 진행할 때 이따금 찾아오던 경제적 빈곤감과 장기간의 신경쇠약 그리고 참기 어려운 불면 속에서 그의 신학 세계는 한 걸음 한 걸음 익어갔다. 그의 동료들이 애독하던 〈기독교사상〉은 거의 한 호도 거르지 않고 문익환의 글을 실었다. 1962년 11월호부터 다섯 차례에 걸쳐 연재되는 '예언운동의 개척자들'은 대표적인 사례였다.

완전주의자! 스스로 납득되지 않는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

세상은 그런 자에게 언제나 두 몫을 맡기고도 쉬이 결실을 안겨주지 않는다. 문익환의 까다로운 한글 사랑은 성서 번역에서 한없이 완성도를 높이되 마침표를 찍기도 어렵게 만들었다. 완전주의의 불완전성이 여기 있었다. 하지만 성서 연구와 한글 연구가 똑같은 비중으로 개진되는 와중에서 그는 중요한 '생의 숙제' 하나를 해치웠다. 함경도에서 북간도로, 북간도에서 남한으로, 이후 서울의 허공에 떠버린 저 어둡던 날의 '19세기로부터의 망명자들'의 공동체를 육신화하는 고구려적 현현체로서의 가족을 수유리 한신대 캠퍼스 안에 무사히 안착시키는 위업을 남기는 것이다. 그런데 위업이라?

한국인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가문에 대한 헌신은 한 가문이 다른 가문과 물질적 부를 다투는 고질병 중 하나였다. 문익환의 가족애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비도덕적 가족주의와 다르지 않게 자녀들의 향학열을 부추기고 각자의 소질을 계발토록 하는 보살핌으로 작용했다. 그것은 그 모습 자체로만 보면 일반적으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언급했던 "햄릿을 읽고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교육받은) 사람들이 이웃집에서 받고 있는 인간적인 절망에 대해 눈물짓는 능력을 마비당하고 또 상실당하는" 결과를 낳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문익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가계사의 존속이 그에게는 남에게 이해시키기 어려운 중요성을 가진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것이 문익환의 역사에서는 반드시 갚아야 마땅한 '지상에 산 대가로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는 커다란 역사의 빚'이었던 것이다. 그같은 인식이 성립될 수 있는 근거를 우리는 다시 문익환의 가계가 하나의 결사체처럼 움직였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명동촌을 지키는 마지막 패밀리라는 의식의 가족주의는 대부분의 명문 가계가 파괴되어버린 후에도 파괴되지 않고 보존된 보기드문 사례에 속한다.

사실 문익환에게서 가족의 문제는 중년의 분발을 주저앉히는 세 가지 장애 중 하나였다. 만성 허약 체질과 체험적 반공주의의 체득 이외에도 북간도에서부터 전해오는 문씨 가계의 유지. 그 중 세번째는 전적으로 장남 몫이었는데, 어쨌든 문익환대에 떠맡겨진 명문의 '가족결사체'는 1960년대에 무사히 완성을 보았다. 문재린 목사와 김신묵 권사의 정착, 자녀들의 눈부신 성장, 아우 문동환의 귀국. 이로써 오랜 떠돌이 가족이 정상화되자 집안 곳곳에서 역동적인 힘들이 떠다니기 시작했다. 문선희가 미국과 캐나다 유학에서 돌아오면서 피아노를 가지고 왔고, 피아노는 다시 문익환의 자녀들에게 훌륭한 음악교사가 되었다. 그 아래 문영환은 연세대 영문과를 다녔는데 연극반을 하면서 개교기념회 때마다 촌극상을 제패했다. 대사도 없으면서 장장 2시간 15분 동안 무대 위에서 견뎌야 하는 장편 〈17포로수용소〉를 열연하고 다시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학사편입해 최불암 등과 함께 제1회 졸업생이 되었는데, 그는 오태석 등과 연극을 하면서 어린이 코러스로 문영금과 문성근 등을 데리고 다니면서 목사의 자녀들에게 저잣거리를 체험시켰다. 막내여동생 문은희는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세브란스 의과를 다녔는데 주로 교회에서 문익환의 설교를 모니터링하는 역을 맡았다.

장남 문호근과의 '고집대결'

문익환의 결벽어린 교육관을 뒤집은 것은 장남 문호근이었다. 문호근의 성장기는 숱한 무용담으로 이루어져 어려서부터 온 집안을 장남타령으로 들썩거리게 했다. 문호근의 권위는 이미 다섯 살 때 확보되었다. 1-4후퇴로 피난을 가면서 목사와 국회의원들이 인천의 어느 교회 앞에서 모이기로 했을 때 문재린 목사가 통솔을 맡느라 경황없는 상황에서 심부름을 간 문호근이 오기도 전에 대열이 모두 떠나와 버린 일이 있었다. 배에 타면서야 어린 문호근을 빠뜨린 사실을 알고 문씨네 가족은 다급해졌다. 부랴부랴 돌아가보니 거기 침착하게 서서 한다는 말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할아버지가 찾으러 올 수 있을 것 같았다는 것이었다. 두 번 들은 노래는 따로 배우지 않고도 그냥 부를 줄 아는 영특함도 있었고, 아버지가 미국에 가 있는 동안 동생들을 지켜내는 어른스러움도 있었다. 학교에 다닐 때도 한 번은 머리에 붕대를 감고 와서 한다는 말이, 놀다가 머리를 다쳐서 혼자 병원에 가서 꿰매고 오느라고 늦었다고 말하더란다.

아버지 문익환과 아들 문호근의 대결은 아무도 막을 수 없는 고집 대 고집의 충돌이었다. 아버지는 학교에서 '문이 쾅'이라고 부르는 제자보다 훨씬 더 난처한 피교육자와 맞닥뜨렸다. 경기고를 마치고 서울대로 진학할 때도 부모 몰래 음대를 선택해버렸고, 학교에 들어간 후에도 납부금을 타다가 가수 조영남과 함께 연극을 한다고 돈을 몽땅 무대 올리는 데 써버리기도 했다. 아들은 낙제시킬 수도 없는 머리 아픈 제자에 속했다. 끝까지 원칙을 강조하는 아버지와 자신의 생각을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 아들의 갈등은 가족공동체에 대해 각별한 가치관을 가진 문동환이라는 교육적 완충지대에서 끝없이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여과되어서야 해결되었다.

장남 문호근과의 갈등으로 문익환은 가족집단 내의 질서에 눈뜨게 되었다. 실로 3대에 이르는 십수 명의 거물이 한 지붕 아래서 공존의 훈련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가정의 민주화를 획득한 것이다. 토의와 자율! 이것은 이후 문씨네 가족과 다른 가족을 가르는 가장 큰 차이점이 되었다. 가족은 매일같이 식탁에 앉아 심포지엄을 방불케 하는 토론을 벌였다.

김형수〈소설가-중앙대 예술대학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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