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괴도-몰락한 J호러, 부활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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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호러 붐을 대표하는 <주온>과 <링> 시리즈가 관객들의 눈과 귀를 뺏는 몰입력을 자랑했다 하지만 시미즈 다카시 감독의 최신작 <기괴도>는 난삽하다. ‘시미즈 다카시가 맞나’ 생각이 들 정도로 총체적 난국이다.

/㈜도키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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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나카타 히데오 감독의 영화 <링>(1998)을 처음 봤을 때가 기억난다. ‘일본에서 끝내주게 무서운 영화가 나왔다’는 소문만 횡행하던 지난 세기말, 서울 홍대의 한 카페 밤샘 상영 자리였다. 시네필(영화광)을 자임하던 카페 주인 부부는 일본에서 그 작품을 공수해왔고, 이미 테이블이 꽉 차 바닥에 스티로폼을 깔고 앉은 기자를 비롯한 손님들은 이내 영화가 뿜어내는 강렬한 공포에 빠져들었다. 이른바 ‘J호러 붐’의 시작이었다.

시미즈 다카시 감독의 영화 <주온>(2002)은 영화 개봉 전 동명의 ‘비디오판’(2000)이 먼저 입소문을 탔다. VHS로 재생된 조악한 화질은 툭툭 끊기며 희생자들의 사연을 끊임없이 나열하는 스토리텔링 방식에 오히려 어울려 보였다.

J호러 붐을 이끈 것은 이 두 시리즈의 주인공 격인 ‘괴물들’이었다. <링> 시리즈의 사다코, 그리고 <주온> 시리즈의 가야코와 토시오 모녀. 시리즈가 반복되면 아무리 악당이라도 모에화(萌え化: 특정한 대상에 열광한다는 뜻의 B급 장르 용어)하는 것이 장르 불문 일본 문화의 특색이다(일본 대표 SF 판타지인 <고지라>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1956년 판에서 처음 등장해 도쿄를 때려 부수며 가공할 공포를 보여주던 <고지라>가 속편을 거듭하면서는 다른 방사능 변종 괴물들에 맞서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 사다코와 가야코도 결국 그 길을 걸었다. 새로운 시리즈가 개봉할 때마다 두 주인공 ‘괴물’은 부지런히 여러 PPL 이벤트 협찬을 뛰었고, 아예 프로레슬링 타이틀 매치처럼 <사다코 대 가야코>(2016)라는 작품까지 나왔으니까.

‘J호러 붐’을 이끌던 <링>과 <주온> 시리즈

서설이 길었다. J호러 붐의 두 시리즈를 연출한 두 감독의 영화가 한꺼번에 개봉했다. 나카타 히데오 감독의 영화 <금지된 장난>과 시미즈 다키시 감독의 영화 <기괴도>다. 수입사가 같다. 영화사의 배려로 두 영화를 모두 볼 수 있었다. 결론은? 한숨이 나왔다. 왜 이리도 처참하게 망가졌을까.

한 IT 벤처회사가 있다. VR 전문회사다. 본사는 특이하게도 외딴 섬에 있다. 통신환경이 괜찮다면 보안 관점에서 차라리 사방이 막혀 있는 외진 섬 같은 장소가 좋다는 것이 이 회사의 논리다. 이 회사는 섬 전체를 스캔해서 메타버스를 구현하는 신세계프로젝트라는 걸 굴리고 있다. 섬 전체뿐 아니라 사용자 경험 데이터도 VR 속 신세계에 포함된다. 영화는 의문의 사고로부터 시작한다. 어느 달 밝은 밤, 자기 방에 누워 VR헤드셋을 쓰고 가상현실체험을 하던 섬에 살던 피험자에게 어떤 사고가 생긴다. 감시하던 여성 팀장은 신세계를 초기화해 사고를 막으려고 하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둘 다 죽는다.

경찰은 두 사람의 사망사고에서 특이점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런데 신세계 데이터에 이들이 죽기 직전 목격한 무엇이 남아 있다. 팀장의 후배로 섬을 찾은 천재 뇌과학자 토모히코와 아버지가 죽어 장례를 치르러 들어온 딸 타마키가 한 조를 이뤄 죽음의 비밀을 추적한다. 마을에 오래 거주하던 무속인의 예지를 바탕으로 마을에 구전돼온 이야기 속 여자, 차별당한 뒤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이마조’의 ‘원념(怨念)’이 사태의 원인이라는 걸 밝혀낸다. 극약 처방으로 메타버스를 초기화하려는 시도를 하지만 저주는 멈출 수 없다.

시미즈 감독의 연출력 부활, 가능할까

복기해보면 이야기 구성은 간단하다. 아니 J호러 붐을 가능케 했던 두 시리즈가 엇비슷하게 바탕에 깔고 있는 초현실적인 이야기 전통을 따르고 있다. “‘흉가’를 찾는 이들은 반드시 가야코와 토시오에게 당하고 만다(<주온> 시리즈)”라든가 “사다코의 저주가 씐 비디오테이프를 재생해본 사람들은 일주일 후엔 반드시 죽는다(<링> 시리즈)”는 것처럼 섬 주민들에게 학대·타살을 당해 죽은 ‘이마조’가 메타버스 버그로 부활해 현실 세계에서도 무차별적인 복수한다는 것이 기본 줄거리다. J호러를 대표하는 <주온>과 <링> 두 시리즈물이 관객들의 눈과 귀를 뺏는 몰입력을 자랑했다. 하지만 시미즈 다카시 감독의 최신작은 난삽하다. ‘시미즈 다카시가 맞나’ 생각이 들 정도로 총체적 난국이다. 생각해보면 감독이 만들어낸 괴물 토시오가 깜짝 출연하는 전작 <사나: 저주의 아이>(2022) 때도 혹평이 없지 않았다. 1972년생인 감독은 이제 50대다. 지난해 <사나: 저주의 아이> 포스터의 홍보문구 “레전드 호러 <주온> 시미즈 다카시 감독 작품”처럼 평생 <주온> 연출 경력만 팔아 먹고살 수는 없지 않은가. 감독의 부활을 기대한다.

제목: 기괴도(忌怪島, Immersion)

제작연도: 2024

제작국: 일본

상영시간: 109분

장르: 공포

감독: 시미즈 다카시

출연: 니시하타 다이고, 야마모토 미즈키 외

개봉: 2024년 6월 12일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수입: ㈜도키엔터테인먼트

배급: 와이드릴리즈㈜

J호러 붐 이전의 일본 공포 영화들

/㈜도키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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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된 장난>으로 돌아온 나카타 히데오 감독도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천년돌(천년에 한 번 나오는 아이돌)’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배우 하시모토 칸나는 만화 원작 영화 <은혼> 시리즈에 출연하면서 망가지는 길로 갔다. <은혼> 시리즈의 우주최강 전투민족 야토족 소녀 카구라 캐릭터 이미지는 너무 강렬해서 그 후 출연하는 다른 작품들까지 피해를 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잘못된 캐스팅이다.

이 영화도 그렇다. 특별한 정보 없이 영화를 봤다. 원작 만화를 못 봐 어디까지 나카타 히데오의 창작인지 모르겠는데 ‘그로테스크’를 넘어 공명할 만한 공포감을 주는 데는 실패했다. 어이없는 결말에 ‘뭐 이런 영화가 있나…’ 생각하는데 엔딩크레딧 끝부분에 ‘연출: 나카타 히데오’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고 충격에 이은 연민을 느꼈다. 이 감독, 왜 이리 망가졌을까. 그런데 그 느낌이 처음은 아니었다. 바로 전작인 <그것이 있는 숲>(2022) 역시 아무런 정보 없이 보다가 나카타 히데오 감독 연출인 걸 알고 비슷한 상념을 느낀 적이 있다.

사실 <링>과 <주온> 시리즈 이전 일본을 대표하는 선구적인 공포 영화들이 있다. 라프카디오 헌의 단편들을 각색해 고바야시 마사키 감독이 만든 <괴담>(1964)이나 유명한 공포담인 오이와 이야기를 각색한 <토카이도 요츠야 괴담>(1959·나카가와 노부오 감독) 같은 영화들이다. 나카가와 노부오 감독의 영화 <지옥>(1960)이나 <망령의 괴묘 저택>(1958) 같은 영화는 1970~1980년대 몇 안 되는 한국 공포영화에도 영향을 줬다.

대중적으로는 <링>과 <주온> 시리즈가 J호러 붐을 일으켰지만, 그전에 B급 공포 장르 쪽에서는 ‘악명 높은’(장르에 한정한다면 좋은 뜻이리라) 영화가 없지 않았다. <이블데드 트랩>(1988)이나 미국 영화배우 찰리 쉰이 진짜 스너프 필름(실제 살인이나 자살 장면을 담은 영상)으로 오인해 경찰에 신고한 거로 악명(!)을 떨친 <기니어 피그> 시리즈 같은 작품들이다. 물론 이런 작품들이 소수장르 팬들의 ‘숭배’를 넘어 수면 위로 올라올 가능성은 거의 없긴 하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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