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하다” 전제하에 주장하는 장애인 이동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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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역 승강장에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는 스티커 수백 장을 붙여 공동재물손괴 혐의로 기소된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공동대표가 지난 5월 1일 무죄를 선고받은 뒤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법 앞에서 소감을 밝히고 있다. 한수빈 기자

서울 지하철역 승강장에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는 스티커 수백 장을 붙여 공동재물손괴 혐의로 기소된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공동대표가 지난 5월 1일 무죄를 선고받은 뒤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법 앞에서 소감을 밝히고 있다. 한수빈 기자

“먼저 제가 그날 버스를 막아서 불편했을 시민들께 죄송하다는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지난 5월 22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항소심 재판에서 발언에 나선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대표의 첫 마디였다. 박 대표가 말한 ‘그날’은 2021년 4월 8일이다. ‘저상버스 100% 도입 약속 이행’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여 기소됐다. 박 대표에겐 전장연 회원 20여명과 버스 운행을 23분간 방해하고 미신고 집회를 연 혐의(집시법 위반·업무방해)가 적용됐다.

박 대표의 사과는 왜 ‘굳이’ 출퇴근 시간대에 당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느냐고, 그 방식은 또 왜 ‘굳이’ 그렇게 폭력적이어야 하느냐며 힐난한 얼굴 모를 시민들에게 건네는 말이었다. 그런데 이날 방청석에는 사건 관련자 몇몇과 기자 두 명뿐이었다. 사과를 받아내겠다고 재판정에 쫓아온 이들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는 사과했다. 거의 비어 있는 방청석과 대비돼 그의 사과가 선명하게 법정에 퍼졌다.

박 대표는 거듭 사과하면서도 시위에 나설 수밖에 없는 배경을 설명했다. 그의 말 일부를 옮긴다.

“시민들이 저희에게 많은 욕설을 한 것도 사실입니다. 정치인들은 제 역할을 하지 않고, 경찰청장은 지구 끝까지 찾아가서 저희를 처벌하겠다고도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저희는 계속 집회에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2006년 교통약자법이 제정됐고, 그에 따라 5개년 계획을 세웠는데도 저상버스 도입 이행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재판장님, 재판장님. 저는 이것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구 끝까지 찾아가서 처벌하겠다는 엄포에도 벌인 시위였다. 전장연은 늘 집회에 나서면서 “시민들께 불편을 줘서 죄송하다”는 말로 시작한다. 그리고선 왜 ‘굳이’ 시위에 나서게 됐는지 설명한다. 피고인 위치에서도 이 패턴을 반복하는 걸 보는 마음이 저렸다. 전장연의 요구에도 올해 저상버스 도입 보조금은 1674억9500만원으로 지난해보다 11.6% 줄었다.

‘법대로’ 모든 걸 해결하려는 분위기 속에서 포용이 설 자리가 없다. 박 대표는 해당 사건 외에도 용산 대통령실 인근의 삼각지역 승강장 벽면과 바닥 등에 장애인 이동권 등을 요구하는 스티커와 래커 스프레이를 뿌린 혐의에 대해서도 재판을 받고 있다. 1심에선 무죄가 나왔다.

‘달을 보라고 가리켰더니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본다’는 말이 있다. 사안의 본질을 보지 않음을 나타내는 비유적인 표현이다. 전장연이 주장하는 권리는 공격적인 방식에 대한 비난으로 쉽게 묻힌다. 그런데 장애인들이 목소리를 낼 기회조차 갖기 어렵다는 점, 장애인 이동권 문제는 늘 후순위로 다뤄진다는 점을 따져본다면 전장연에게만 모든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는 건 가혹하다는 생각이다. 책임을 묻는 것 자체를 마냥 문제라고 하는 것도 신중해야겠지만, 대화나 이해가 실종됐다는 비판을 거두기는 어렵다.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면서도 사과를 해야 하는 게 우리 사회의 현주소라면 여기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건 뭘까, 생각해본다. 적어도 재판정에서 빈 방청석을 향해서도 사과하는 박 대표의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다.

<유선희 기자 y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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