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라는 계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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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CHUTTERSNAP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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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차가 세계적으로 잘 팔리지 않아 재고가 쌓이고 있다. 그런데 정작 전기차 소유자들의 만족도는 상당히 높다. 세간의 여러 부정적 의견은 직접 타보지 못한 이들의 미숙한 기우라고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전기차는 장점이 많다. 동력계통이 단순하기에 공간 활용도가 넓어 내 방 같은 느낌으로 쓸 수 있고, 반자율주행 등 소프트웨어도 충실해 재미가 있다. 게다가 모터는 엔진보다 고장이 잘 안 나 정비할 필요도 별로 없고, 무엇보다 힘이 좋다.

하지만 이 모든 장점을 누리기 위해서는 단 하나 조건이 있다. 그것은 바로 여유다. 전기차 시장은 그 사회에서 여유 있는 사람의 수만큼만 커진다. 여유? 충전 시설이 마련돼 있는 주택 구조에 살고 전기차 주차 공간이 마련된 회사에 다니는 여유가 있는 이들은 겹겹이 주차하기도 벅찬 다세대 주택에서 아랫집 사람을 깨워 차를 비키게 하고 겨우 끄집어낸 뒤 온종일 예측 불가능한 경로를 돌아야 하는 고된 일상을 이해하기 쉽지 않다.

하루를 예측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면 충전도 스트레스가 되지 못한다. 집이나 일터에 매달리지 않더라도 언제든 적당한 충전소에서 책이라도 읽으며 기다릴 수 있는 여유. 여행을 떠나도 충전소 붐빌 일 없는 시기를 고르고 또 미리 충전을 고려해 동선을 짤 수 있는 정신적 여유. 여유가 없다면 모처럼 구매한, 이 비싼 차가 내 생활에 꼭 맞아야 한다. 보조금을 듬뿍 받아도 여전히 그 비싼 차가.

원인은 좀처럼 발전하지 않는 배터리에 있다. 배터리값은 곧 전기차의 값이다. 지정학적 문제마저 품은 희소자원의 가격이다. 이 배터리 때문에 전기차 생산은 내연기관보다 더 많은 탄소발자국을 남기기도 한다. 재활용마저 쉽지 않다. 모든 차가 무게 2t의 사회적 부채를 짊어지고 거리를 누비는 것이 유일한 미래인지 곳곳에서 슬슬 의심하기 시작했다.

‘2035년 탄소를 배출하는 신차 판매를 종료한다’는 유럽연합의 규제는 전기차 산업의 등대 같은 선언이었다. 탄소를 내뱉지 않는 전기차란 지구를 살리는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최근 ‘e퓨얼(합성연료)로 달리는 자동차는 제외한다’는 중대 발표가 있었다. 합성연료란 이미 뱉어 놓은 탄소로 연료를 합성해 그 배출량이 탄소중립이 되는 연료들을 일컫는다. 이 연료를 태워 다시 엔진을 돌리자는 이야기인데, 역시 일본이나 독일, 이탈리아 등 재래식 자동차가 경쟁력인 국가들이 적극적이다.

과거 회귀냐며 다른 나라들은 당장은 시큰둥하다. 하지만 어느 나라나 부품 및 수리 등 재래식 자동차산업 생태계가 있고, 적잖은 고용을 창출 중이다. 이들은 전기차란 일부 신흥 아시아 공업국에나 유리하다, 여유 없는 자국민에게도 별로 유리하지 않다는 등의 스토리에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당황해하고 있다.

기후위기의 압박과 전기차의 정숙성은 심지어 미군에도 수년째 변화를 압박해왔다. 조용하고 힘 좋은 전기 탱크도 연구 중이다. 펜타곤은 그러나 지난해 6월 배터리 용량과 충전 속도가 20배는 좋아져야 한다고 손사래를 쳤다. 후방과 달리 보급이 생명인 최전선은 그런 곳이다. 여유 없는 우리에겐 삶의 현장이 최전방이다. 여전히 들이붓고 출발할 수 있는 연료를 쓰는 차를 선호하는 계급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김국현 IT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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