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걱정 없이 공익소송…‘착한 조례’ 확산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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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광산구 등 5곳 이어 잇단 도입 움직임

공익소송 활성화·재판청구권 보장에 긍정적

공익소송의 소송비용 관련 이미지 / 참여연대 제공

공익소송의 소송비용 관련 이미지 / 참여연대 제공

아파트 등 일정 높이 이상의 건축물 꼭대기에는 ‘항공장애표시등’을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한다. 비행기나 헬기가 장애물을 식별해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이다. 야간에 건물 옥상에 빨간 불빛이 깜빡이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 물체가 바로 항공장애표시등이다. 항공시설법과 군사기지법 등에 근거한다.

광주시 광산구 아파트단지 7곳의 입주자대표회의 등 구민들이 2023년 4월 항공장애표시등과 관련해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표시등을 유지·관리하는 비용은 모두 입주민들의 관리비로 충당하고 있다. 구민들은 “국가가 필요로 하는 시설이기 때문에 유지·관리 또한 국가에 책임이 있다”라며 유지 비용을 자신들에게 떠넘기는 건 부당하다는 취지로 주장한다. 표시등의 유지 비용을 문제로 소송이 제기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구민들이 소송에서 승소한다면, 광산구의 다른 주민뿐 아니라 광주시, 나아가 전국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광산구는 2023년 5월 소송을 제기한 구민들에게 소송에 드는 비용 880만원을 지원키로 결정했다. 광산구는 공익소송의 경우 변호사 선임료 등 소송비용을 지원하는 제도를 2021년 전국 최초로 도입했다. 권리 구제와 불합리한 제도 개선 등 공익을 위한 목적임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인 이유로 소송 제기에 부담을 갖는 구민들을 지원한다는 취지다.

현재 이런 제도를 시행하는 지자체는 광산구를 포함해 모두 5곳이다. 다른 여러 지자체에서도 제도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소송 4건에 2530만원 지원

광주시 광산구는 2021년 7월 ‘공익소송 비용 지원에 관한 조례’를 시행했다. 구민들이 공익성 있는 소송을 제기했을 때 구가 소송비용을 지원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다. 변호사 선임료, 패소했을 때 상대방에게 물어야 하는 소송비용 등을 지원한다. 지원액수는 심급별로 최대 1000만원이다.

신청한다고 해서 무조건 지원하는 건 아니다. 광산구 내 ‘공익소송지원위원회’가 지원 여부와 액수를 심의해 결정한다. 위원회는 구청 직원과 외부 전문가 등 10명 이내로 꾸린다. 무분별한 신청과 소송 남발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다.

지원 대상은 기본적으로 ‘중요한 사회적 이익임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법적인 권리로 인정받지 못한 사건’, ‘해당 사건으로 인해 소송 당사자뿐 아니라 다수의 구민에게 이익이 돌아갈 사건’ 등이다. 다만 구를 상대로 한 소송이나 개인 간 사적인 분쟁은 지원하지 않는다. 조례에는 ‘구는 억울한 피해를 입은 구민에 대한 법적 조력 및 지원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구의 책무를 명확히 함으로써 소송비용 지원 근거를 뒷받침하기 위한 조항으로 풀이된다.

광산구가 제공한 자료를 보면, 2021년부터 현재까지 소송비용 지원 신청건수는 모두 5건이다. 이중 4건에 총 2530만원이 지원됐다. 350만원이 지급된 첫 번째 사례는 아파트 입주민 16명이 주택도시보증공사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이다. 입주민들이 부도가 난 시공사 계좌로 입금한 잔금 일부를 공사가 인정하지 않자 소송을 낸 것이다. 두 번째 사례는 주민 8명이 건설사 등을 상대로 허위·과대 광고에 따른 피해를 호소하며 제기한 소송으로 구는 700만원을 지원했다. 세 번째는 주민 26명이 은행 등을 상대로 아파트 분양과정에서 동의 없이 근저당 설정 등기가 이뤄진 게 부당하다며 제기한 소송으로 지원금 600만원이 지급됐다. 가장 최근 사례가 앞서 언급한 항공장애표시등 관련 소송이다.

이 조례는 공병철 광산구의원(더불어민주당)이 최초 발의했다. 공 의원은 전화 인터뷰에서 조례를 착안한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광산구는 광주 민간·군공항과 인접해 있다. 소음 피해 문제가 지속해서 발생하는 지역이다. 또 공공기관의 개인정보 유출 문제나 하천 오·폐수 방류 문제 등이 발생했을 때 행정적으로 해결하는 데 한계가 있어서 답답했다. 주민들은 소송을 제기하기에는 경제적인 부담과 장시간 소요에 따른 심적인 부담을 토로했다. 개인이 소송을 낼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구민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소송비용 지원을 생각하게 됐다.”

공익소송의 소송비용을 지원하는 내용의 조례를 전국 최초로 발의한 공병철 광주시 광산구의회 의원 / 광산구의회 제공

공익소송의 소송비용을 지원하는 내용의 조례를 전국 최초로 발의한 공병철 광주시 광산구의회 의원 / 광산구의회 제공

이 조례는 2021년 12월 법제처가 선정한 우수 조례 5개 가운데 하나로 선정돼 장려상을 받기도 했다. 공 의원은 “조례를 준비할 때 고민을 많이 했고 제정 과정에서도 법률 전문가 등과 많은 협의를 거쳤다. 중앙정부에서 하지 않는 걸 기초자치단체에서 시행하는 게 녹록지 않았다”라며 “앞으로 지원 액수가 더 늘어나고 지자체가 더 적극적으로 홍보에 나섰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후 2021년 9월~2023년 7월 추가로 지자체 4곳이 같은 내용의 조례를 시행했다. 광주시 남구·동구·북구, 전남 강진군 등이다. 다만 이들 지자체에는 아직 소송비용 지원 신청이 들어오지는 않았다고 한다.

청주시의회에서도 2022년 2월 공익소송 비용 지원 조례 제정안이 발의돼 논의를 진행한 바 있다. 그러나 결론을 내지 못하고 폐기됐다. 조례를 도입한 다른 지자체 사례가 많지 않고, 청주시를 상대로 한 소송을 지원할지 여부 등을 두고 검토가 더 필요하다는 등의 이유였다. 해당 조례를 발의했던 박완희 시의원(더불어민주당)은 “2024년 하반기쯤에 다시 발의를 해 볼 예정”이라고 밝혔다.

■경기도·인천시의회도 조례 추진

광주시 동구와 전남 강진군 관계자는 “다른 지자체에서 조례와 관련한 문의가 많이 오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최근 지방의회에서 공익소송 비용을 지원하는 내용의 조례를 제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경기도의회는 2023년 10월 이기인 도의원(국민의힘)이 추진하는 ‘공익소송 비용 지원에 관한 조례안’을 입법예고했다. 조례안에는 공익소송의 정의 등 관련 내용을 광산구의 조례보다 구체화했다. 지원 가능한 대상을 ‘사회적 약자 및 소수자의 권익보호, 공권력의 남용 억제, 불합리한 제도 개선, 건강과 안전, 소비자의 이익, 공정한 경쟁, 환경 등 사회적 이익이 주된 목적과 쟁점인 소송’으로 규정했다. 또 ‘해당 사건으로 인해 소송 당사자뿐 아니라 다수의 도민에게 이익이 돌아갈 사건’도 지원한다. 다만 마찬가지로 경기도를 상대로 한 소송과 개인적 분쟁은 제외한다. 심급별로 최대 2000만원까지 지원 가능하다. 경기도의회 관계자는 “다음 회기 때 발의하기 위해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인천시의회도 2023년 11월 ‘공익소송 비용 지원에 관한 조례안’을 입법예고했다. 공익소송의 정의와 지원 절차 등은 경기도의 조례안과 같다. 특이점은 지원이 가능한 소송 대상을 세부적으로 특정했다. 우선 다른 지자체와 달리 인천시와 그 산하기관을 상대로 한 소송도 지원 가능 대상에 포함했다. 또 ‘시에 주소를 두고 관내에서 영업활동을 하는 기업 등을 상대로 하는 소송’도 해당한다. 중앙정부 등을 상대로 한 소송은 제외된다. 지원 비용도 500만원으로 다른 지자체보다 낮다.

인천시와 의회 일각에서는 조례를 악용해 시를 상대로 한 소송이 남발될 수 있다며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고 한다. 조례안을 발의한 신동섭 시의원(행정안전위원장·국민의힘)은 그러나 통화에서 “소송비용 지원 여부는 공익소송지원위원회에서 결정하기 때문에 위원회에서 의결되지 않으면 시는 지원할 의무가 없다”라며 이런 우려를 일축했다. 또 “지원 비용을 다른 지자체보다 낮게 책정함으로써 지원액보다 실제 소송비용이 더 많은 경우가 생길 수 있다. 그러면 악용 소지도 완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에 발의된 조례안을 그대로 추진하는 건 아니다. 신 의원은 “앞으로 공청회 등을 거쳐 수정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보완을 한 뒤 상임위원에 상정할 계획”이라고 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과 참여연대 등이 2022년 7월 15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패소자부담주의 제도 개선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김세훈 기자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과 참여연대 등이 2022년 7월 15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패소자부담주의 제도 개선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김세훈 기자

지자체와 지방의회가 마련한 이런 조례는 공익소송을 활성화하고 시민의 재판청구권을 보장하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평가된다. 반면 공익소송 비용과 관련한 중앙정부와 국회 차원의 대책 마련은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현행 민사소송법은 소송의 패소자가 상대방의 변호사 수임료 등 소송비용을 지급하도록 규정한다. 하지만 공익소송은 이런 패소자부담주의의 예외로 둬야 한다는 요구가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제기돼왔다. 경제적인 부담을 이유로 권리 구제 등을 위한 소송을 포기할 수 있어서, 패소자부담주의가 공익소송을 위축시키는 걸림돌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것이다. 이지은 참여연대 공익법센터 선임간사는 “돈 때문에 소송을 하지 못한다는 건 국민의 재판청구권이 경제적 사정에 따라 차별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2022년 6월 민사소송법 및 국가소송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인권, 국민의 건강과 안전, 환경, 소비자 이익, 공정한 경쟁 등 공익성이 인정되는 소송에서는 패소자가 부담해야 할 소송비용을 감면할 수 있게 하는 게 핵심이다. 그러나 국회에서 제대로 된 논의가 이뤄지지 않고 계류 중이다. 이지은 간사는 “지자체의 공익소송 비용 지원 조례는 패소자부담주의를 개선하자는 취지와 맥이 닿아 있어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라며 “이런 조례가 확대되고 잘 활용된다면 국회를 압박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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