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몸짓 하나하나, 꽃으로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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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대상 인문강좌 수강생들, 성동구청 도서관서 공연

“김춘수의 ‘꽃’ 연상”…문화예술위 “치유·회복 기회 확대”

지난 11월 27일 서울시 성동구청 책마루도서관 1층에서 열린 장애인 인문강좌 ‘주파수를 맞추는 몸’ 수강생들이 공연을 펼치고 있다. 송진식 기자

지난 11월 27일 서울시 성동구청 책마루도서관 1층에서 열린 장애인 인문강좌 ‘주파수를 맞추는 몸’ 수강생들이 공연을 펼치고 있다. 송진식 기자

조용하던 도서관 로비에 차분한 라운지 음악이 흘렀다. 경쾌하지만 경박하진 않다. 스피커 주변으로 동그랗게 진을 치고 모여있던 수강생들의 눈이 반짝였다. 중앙 대리석 바닥에 꽃봉오리 영상이 카펫인 양 깔렸다. 이것으로 무대 준비 완료. 잠시 뜸을 들인다. 서로 눈치 주고받기를 수십 초. 강사가 먼저 바닥에 내려앉아 손을 휘젓는다. 영상 속 꽃봉오리를 쓰다듬는 듯한 모습이다.

망설이던 학생들이 하나둘 강사를 따라 꽃봉오리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이내 음악이 바뀐다. 비트가 더 빠르고 강하다. 바닥을 휘젓던 손들이 허리 위로, 다시 머리 위로 조금씩 올라간다. 몸이 풀린 학생들은 이제 거칠 게 없다. 흥이 많은 학생 A씨가 ‘견디지’ 못하고 무대 중앙으로 나왔다. 아무 말 없이, 미소를 띤 채 손을 움직이며 제자리에서 천천히 한 바퀴 돈다. 그가 모두를 바라보고, 모두가 그를 바라본다. 이곳이 어디인지, 또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기억하려는 듯했다.

■“몸짓 하나하나가 나를 표현하는 것”

지난 11월 27일 오후 서울 성동구청 책마루도서관 1층 로비에서 ‘특별한’ 공연이 열렸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개최한 장애인 대상 인문강좌 ‘주파수를 맞추는 몸, 너와 나의 몸짓’의 수강생들이 공연의 주인공이었다. 이들은 모두 중증 발달 장애인들. 평소 활동지원사의 도움 없이는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거나 외출조차 어려운 이들이다. A씨처럼 기본적인 의사소통이 어려운 수강생이 대부분이다. 이날 공연이 ‘특별한’ 이유다.

강좌는 음악에 맞춰 장애인들이 자신만의 ‘춤’을 추도록 기획됐다. 그것이 춤이든 체조든 손짓이든 발짓이든 상관없다. 평소 자율적인 거동이 어려운 이들 수강생에겐 움직임과 몸짓 하나하나가 자신을 표현하는 길이 된다. 다른 수강생들의 움직임을 보고 그에 따라 자신의 움직임을 맞춰보거나 따라 하는 것도 이번 강좌의 목적이다.

지난 8월 중순 시작한 이 강좌는 지난 11월 30일 15회차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공연은 종강을 사흘 앞두고 약 석 달간 이어진 강좌의 성과를 확인하고, 미리 종강을 자축하기 위한 차원에서 마련됐다. 처음부터 이런 공연을 계획하고 시작한 강의는 아니었다고 한다. 즉흥적인 결정이었다 강좌를 맡아온 신재 연출가는 “매번 강의실에서 진행했는데 조금 갑갑한 면이 있었다”며 “보다 개방된 장소에서 수강생들의 참여를 이끌어내고, 주변 분들에게도 강좌의 성과를 보여드리고 싶어 나오게 됐다”고 말했다. 갑작스러운 장소 섭외에도 취지를 전해들은 성동구청이 흔쾌히 도서관 로비를 내주었다. 공연 시작 전 수강생인 발달장애인 B씨가 마이크를 들었다. 발성이 쉽지 않은 그이지만, “감사합니다. 잘 봐주세요”라며 공연 소감을 밝혔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장애인 인문강좌에서 한 수강생이 강사의 도움을 받으며 손동작을 취하고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장애인 인문강좌에서 한 수강생이 강사의 도움을 받으며 손동작을 취하고 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공연은 수강생들이 천천히 손을 움직이는 것부터 시작해 점차 큰 몸동작으로 나아가는 방식으로 짜였다. 처음엔 다소 긴장하고 낯설어하던 이들도 몸이 풀리자 이내 자신만의 ‘흥’을 드러냈다. A씨가 무대를 한 바퀴 돌며 분위기를 잡자 하나둘 중앙으로 나오더니 자신만의 몸짓을 선보였다. 음악이 점차 빨라지고 분위기가 고조되자 서로 얼싸안고 몸을 출렁이는 수강생들도 등장했다. 신 연출가가 참여하기를 머뭇거리는 한 수강생의 손을 잡고 무대로 걸어나왔다. 둘이 손을 마주 잡고선 빙글빙글 돌았다. 흡사 왈츠를 추는 것 같았다.

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활동지원사들도 함께 무대로 나와 수강생들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함께 ‘몸짓’을 한다. 평소엔 ‘돌봄’을 주고받는 관계이지만, 이날 무대에서만큼은 동등한 ‘친구’가 됐다. 약 30분 이어진 공연이 끝났다. 여기저기서 자축의 박수가 터져나왔다. 몇몇은 서로를 껴안으며 기뻐했다. 마치 “수고했어. 잘했어 우리”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기념촬영이 이어지고, 손에는 공연 뒤 갈증을 달래줄 음료수가 쥐어졌다. 몇몇은 공연을 지켜보던 사람들에게 악수를 청했다. 완벽한 마무리.

■장애인 대상 강좌 턱없이 ‘부족’

로비를 지나던 시민 몇몇은 발길을 멈추고 공연을 바라봤다. 예고 없던 공연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이들도 있었다. 그랬다. 비장애인의 시선에서 보면 일반적인 ‘공연’의 모습은 아니었다. 부자연스러운 장애인들의 몸짓이었던 터라,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저 손을 잡고 빙글 도는 것이 무슨 공연인가’라는 반문이 나올 수도 있다. 역설적이지만, 그래서 더 ‘공연’다웠다.

현재 사회복지시설이나 장애인을 위한 직장 등이 없어 집에서만 머무르는 발달장애인 수가 20만명을 넘는다. 정부에 등록된 수만 이렇다. 평소에는 이들을 좀처럼 보기 어렵다. 이들이 원해서가 아니다. 밖으로 나와 움직이고 어울리려면 활동지원부터 이동에 이르기까지 여러 지원이 필요하지만 그렇지 못한 탓이다. 해마다 발달장애인들이 ‘지하철 탑승권’을 얻기 위해 차디찬 역사에서 집회 시위를 벌여야 하는 현실이다. 따라서 수강생들이 이렇게 ‘공공의 장소’에 나와 몸짓을 보이고, 집안을 벗어나 다른 이들에게 공개적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행위만큼 ‘공연’의 진짜 의미에 부합하는 일도 없다.

필요한 건 그들의 몸짓에 눈과 귀를 기울이고, 이해와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다. 그래서일까. 공연을 지켜본 한 시민은 “김춘수 시인의 ‘꽃’이 연상된다”고 말했다. 신 연출가는 “특히 의사 표현이 어려운 발달장애인의 경우 몸짓을 통해 아주 기본적인 의사 표현조차 하기 어려워하거나 못 하는 사례가 많다”며 “강좌를 통해 조금이나마 자신이 원하는 것, 말하고자 하는 것을 표현하는 법을 배웠다면 그 자체로 성과”라고 말했다. 이번 강좌를 기획한 단체인 ‘장애인문화예술판’ 관계자는 “실제로 강좌를 들으면서 전보다 표정이 밝아지고, 전에 없던 몸짓을 하며 뭔가 의사 표현을 하려는 수강생들이 늘어난다”며 “본인은 물론 보호자(가족)들도 강좌에 대한 만족도가 높다”고 말했다.

지난 11월 27일 서울시 성동구청 책마루도서관 1층에서 열린 장애인 인문강좌 ‘주파수를 맞추는 몸’ 수강생들이 음악에 맞춰 몸짓과 춤을 선보이고 있다. 송진식 기자

지난 11월 27일 서울시 성동구청 책마루도서관 1층에서 열린 장애인 인문강좌 ‘주파수를 맞추는 몸’ 수강생들이 음악에 맞춰 몸짓과 춤을 선보이고 있다. 송진식 기자

장애인 지원이 부족한 현실 속에서 이 같은 장애인 대상 인문강좌는 더 드물기 때문에 이번 공연은 더욱 빛을 발한다. 장애인 관련 공연기획과 연출 등에 다수의 경험이 있는 장애인문화예술판 측도, 신 연출가도 “이런 강좌는 처음인 듯하다”고 입을 모았다. 신 연출가는 “보통 장애인이 참여하는 공연은 기획 등에 6개월가량 시간을 두고 추진하는데 이번 강좌는 3개월 정도로 다소 짧아서 그 점은 아쉬웠다”고 말했다. 신 연출가와 함께 강좌를 진행한 한혜인 보조강사는 “강의를 하다 보니 장애인들의 활동보조나 원활한 도움을 얻기 위해 보조강사가 더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지원이 더 확대돼 더 많은 장애인이 인문강좌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문화예술위 “인문동행 강좌 확대할 것”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올 한 해 ‘일상이 풍요로워지는 보편적 문화복지’ 실현을 위해 사회취약계층을 대상으로 모두 1200여회의 인문강좌를 열었다. 인문가치 확산을 통한 자존감 회복, 위로와 치유, 사회적 연대감 제고 등을 위해 지난해부터 전개해온 ‘우리가치 인문동행 사업’의 일환이다. 이는 코로나19라는 위기를 겪으며 얻게 된 사회 전체의 상처를 서로 보듬고 치유하며 연대하자는 취지에서 시작한 사업이다. 외국인 이주민, 한 부모 가정, 자립청년, 소방공무원, 교사 등을 대상으로 지난해 연 인문강좌에 이어 올해 들어 노인과 장애인 대상 강좌를 추가했다. 실질적인 강좌 개설과 운영은 문화예술위의 사업 공모를 통해 선정된 16개 민간운영단체가 맡고 있다.

문화예술위 관계자는 “단순히 지식만을 전달하는 강좌가 아니라 인문학을 통해 참여자가 자신을 돌아보고 자존감 회복에 나설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강좌를 지향하고 있다”라며 “사업의 성과와 결과를 평가해보고, 개선할 점은 개선해 앞으로 사업을 보다 확대해나갈 생각이다”라고 밝혔다.

<송진식 기자 truej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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