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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디에이고에 첫선 보인 한국 채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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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생의 찬미>전

<코리아 인 컬러>전으로 재탄생

샌디에이고미술관 입구가 있는 정면부 모습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샌디에이고미술관 입구가 있는 정면부 모습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미국인이 가장 살고 싶은 도시를 꼽으라면, 다섯 손가락 안에 반드시 들어간다는 도시 샌디에이고. 그 도심과 인접해 발보아 파크(Balboa Park)라는 엄청난 규모(485만6000㎡·축구장 약 680개 크기)의 녹지공원이 들어서 있고, 다시 그 공원의 중앙에 미술관·박물관이 밀집한 구역이 있는데 이 중에서도 샌디에이고미술관은 단연 독보적 위상을 자랑한다. 굳이 샌디에이고미술관의 성격을 규정하자면,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영국의 대영박물관 급에 속하는, 즉 시간적으로는 고대에서 현대, 공간적으로는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종합 미술관이다. 1926년 개관한 이래 약 100년이 돼가는 역사도 역사려니와 지오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1267~1337), 엘 그레코(El Greco·1541~1614) 등의 옛 대가들부터 클로드 모네(Oscar-Claude Monet·1840~1926),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Picasso·1881~1973) 등의 근대 대가들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2만2000여 점 이상에 이르는 소장품을 언제든 만날 수 있는 미술관으로 여러 의미에서 이 지역의 문화적 중심이라고 할 만하다.

전시 개막을 앞두고 열린 VIP 초청 리셉션 행사 모습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전시 개막을 앞두고 열린 VIP 초청 리셉션 행사 모습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미술관 파사드에 호랑이 현수막

이 미술관의 인상적인 정면부(파사드)에 거대한 호랑이 그림 현수막이 최근 걸렸다. 한국인들에게는 익숙한 민화풍으로 그려진 이 호랑이 이미지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제작된 조자용(1926~2000)의 소장품 <대호도(大虎圖)>(19세기 말~20세기 초)를 조계종의 종정이자 그 자신이 예술가이기도 한 성파스님이 본인의 스타일과 철학으로 재해석한 작품 <수기맹호도(睡起猛虎圖)>(2012)에서 따왔다. 잠에서 깨어나는 호랑이를 묘사한 원작은 ‘벽사’(신성한 이미지로 불길한 액을 막는다는 의미)라는 본래의 의미에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이 깨어나길 바라는 기원을 덧붙여 그린 그림이다. 샌디에이고미술관의 파사드는 흔히 유럽식 성당 건물이라면 성인들이나 성경의 구절을 형상화한 조각이 있을 법한 위치에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Rodriguez de Silva y Velazquez·1599~1660), 무리요(Bartolome Esteban Murillo·1617~1682) 등 위대한 서양미술 대가들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장식돼 있다. 우연하게도 한국에서 온 호랑이가 세로로 서 있는 이 서양미술의 기념비적인 작품을 마치 가로지르듯 혹은 보듬어 안는 듯한 동작을 지금 취하고 있다.

샌디에이고미술관 내부의 전시 풍경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샌디에이고미술관 내부의 전시 풍경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이 현수막은 <Korea in Color: A Legacy of Auspicious Images>라는 전시(2023.10.28~2024.3.3)가 지금 이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음을 나타낸다. 2022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열린 한국의 채색화 특별전 <생의 찬미(Prayers for Life)> 전시를 원형으로 하되 샌디에이고 전시에 맞춰 재구성했다. 이 정도 규모의 한국미술품 전시가 샌디에이고에서 열리는 것은 이번이 최초다. 국립현대미술관으로서도 해외 기관과의 공동 기획이나 해외전시를 위한 맞춤형 기획이 아니라 미술관 자체의 기획전시가 그 본래 주제를 그대로 유지한 채 해외로 진출한 드문 사례이기도 하다.

국립현대미술관 관계자가 미국 관람객들을 대상으로 작품 설명을 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관계자가 미국 관람객들을 대상으로 작품 설명을 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LA문화원, 미술관 간 연결고리

이번 전시는 두 미술관의 의도가 마치 샌디에이고미술관의 파사드처럼 서로 교차하던 와중에 한국 정부가 적절하게 연결고리 역할을 잘해준 덕분에 성사됐다. 먼저 한국 해외문화홍보원에서 해외 주재 한국 문화원들의 네트워크를 통해 한국 문화를 본격적으로 해외에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발족했다. 이에 교민들이 다수 거주하는 캘리포니아의 LA문화원이 적극적으로 호응해 미술관 간의 연결고리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70주년(한미동맹 70주년)이라는 문화 외적인 맥락도 어느 정도 작용했으리라고 본다. 여기에 직접 기획한 주요 전시를 해외 유수의 미술관에 선보이고 싶은 국립현대미술관의 바람과 최근 한류 열풍에 따라 급격히 높아진 한국 문화에 대한 미국인들의 관심에 부응하고 싶었던 샌디에이고미술관의 의도까지 삼박자가 적절히 맞아떨어졌다. 마지막으로 접경 지역이라는 특성으로 미국과 멕시코 문화의 활발한 접목이 이루어지는 샌디에이고 특유의 이질적인 문화에 대한 호기심과 개방적 분위기까지 한몫을 담당했다.

샌디에이고미술관 내부의 전시 풍경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샌디에이고미술관 내부의 전시 풍경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코리아 인 컬러>라는 전시 제목은 여러 의미를 갖는다. 먼저 ‘한국 채색화의 역사적·문화사적 기능에 대한 재고’라는 전시 본래의 주제와의 연관성을 강조하고 싶었다. 이 주제는 일제강점기를 지나 20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전통미술 중에서도 수묵채색화와 문인화의 전통에 관심이 집중되면서, 결과적으로 한국 현대미술의 주류에서 슬그머니 밀려난 채색화의 흐름을 미술의 기능이라는 새로운 잣대를 통해 재조명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샌디에이고를 비롯해 미국의 관객들이 한국에 대해 가지고 있는 흐릿하고 단편적인 인상을 넘어 한국미술의 다채로운 특성을 제대로 경험하게 하고 싶다는 뜻도 담았다.

<코리아 인 컬러> 전시가 열리고 있는 샌디에이고미술관 내부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코리아 인 컬러> 전시가 열리고 있는 샌디에이고미술관 내부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미술관에 입장하면 로비 공간에 설치된 김상돈 작가의 조각 작품 ‘카트’(2019~2020)를 처음 만나게 된다. 한국인들에게는 익숙한(젊은 세대에게는 생소할지도 모른다) 전통 상여를 재해석한 바로크적인 조각과 흔한 철제 쇼핑 카트를 결합한 작품이다. 건물 입구의 호랑이 이미지로 ‘벽사’를 체험한 관객들에게 이 조각은 전통과 현대가 혼재하는 이번 전시의 특성을 시각적으로 재차 강조하는 길잡이의 역할을 한다. 상여를 꼼꼼히 수놓은 수많은 미니어처 형상은 150년을 훌쩍 넘는 시대적 편차를 오르내리며 선정된 50여 점의 다양한 작품 속에서 끊임없이 다시 소환된다.

샌디에이고 미술관 내부의 전시 풍경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샌디에이고 미술관 내부의 전시 풍경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전통에 기반하되 자유로운 시각으로 현재를 재해석해낸 작가들의 태도가 전시 전체를 관통하는 특성이다. 19세기 말의 작호도(까치호랑이) 민화에서, 오윤의 민중 판화에서, 오순경의 사신도에서, 처용무를 재해석한 미디어 설치작업에서, 옛 책거리 그림에서, 모란 병풍에서, 김종학과 김용철의 꽃그림에서, 안상수와 이진경의 문자그림에서, 이흥덕의 현대판 지옥도나 박생광·이영실 등의 불교적·무속적 이미지에서, 심지어 전시 마지막에 설치된 안성민의 현대적 부적 설치에 이르기까지, 이 전통적이고 ‘상서로운(Auspicious)’ 이미지들은 반복적으로 변주되며 등장한다. 마치 서로 다른 목소리들이 합쳐져 하나의 화음으로 합창을 하는 듯한 느낌이다. 이렇게 시대와 세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공명하는 이미지들을 통해 우리는 이 독특한 전통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가지는 영향력을 가늠해볼 수 있다.

샌디에이고 미술관 내부의 전시 풍경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샌디에이고 미술관 내부의 전시 풍경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미국 전역 한국미술 전시 이어져

샌디에이고 전시에 맞춰 지난해 과천 전시를 벽사, 길상, 교훈, 감상 등 4개의 소주제로 나눠 한국의 옛집을 방문하는 손님의 시각에서 재구성했다. 예컨대 벽사를 기원하는 문구와 그림들이 붙어 있는 대문을 지나 가정의 화목과 번영을 기원하는 화초들이 피어 있는 정원을 거쳐 실내로 들어서면 장수와 부귀를 기원하는 십장생도를 만나는 식이다. 십장생도와 함께 화조화가 장식된 안방과 교훈을 주고자 기획된 글자 그림과 책거리 병풍들이 놓인 서재에서, ‘차경’(借景·자연의 경치를 빌리다)의 뜻을 담아 제작한 산수화를 함께 감상하고 집을 나서면 다시 자연이 우리를 반긴다는 가상의 스토리가 완성된다.

샌디에이고미술관 내부의 전시 풍경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샌디에이고미술관 내부의 전시 풍경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관객이 달라지면 같은 전시라도 전혀 다른 울림으로 나타난다. 한국의 전통미술에 대한 이해가 없는 샌디에이고 관객들에게 이 가상의 이야기는 과연 어떻게 다가갈 것인가. 아무리 한국 음악, 음식, 패션 등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시대라지만 이런 전통적 이미지가 외국인들에게 얼마나 이해되고 경험될지 지금으로서는 짐작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궁금하기도 하고 기대되기도 한다. 사뭇 설레기까지 한다. 샌디에이고의 삶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다채로운 미국과 멕시코의 혼성 문화 현상을 체감하고 있는 이들이기에 미국의 다른 지역 관객들과는 또 다른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서다. 우연히 미술관 파사드에 펼쳐진 서구미술과 한국미술의 교차가 또 하나의 독특한 혼종의 씨앗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최근 미국 전역에서 이어지고 있는 한국미술품 전시 열풍이 반짝 수준에 머물지 않고 앞으로도 꾸준히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임대근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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