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한 푼도 안 내는 정부가 왜 연금개혁 결정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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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운명과 삶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 과제를 국가에 맡겨놓을 수는 없다. 보험료 납입자와 연금수급자가 총회를 통해 자주적으로 보험료율과 급여율 등을 정해야 한다. 연금개혁의 결정권을 당사자들이 가져와야 한다는 뜻이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지난 10월 27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제5차 국민연금 종합 운영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지난 10월 27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제5차 국민연금 종합 운영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현 정부가 국민과의 대화를 통해 노동, 연금, 교육 등 3대 개혁을 제시했다. 세 가지 개혁 과제 모두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시급하고도 절박하다고 하겠다. 특히 연금개혁은 인구의 급격한 고령화 추세와 맞물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다. 당장 변화하지 않으면 미래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암담하다. 지난 10월 27일 정부의 국민연금 개혁안이 공개됐다. 그리고 맹탕 개혁안이라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연금이 도대체 뭐길래 이렇게 국가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걸까, 아니 한쪽에선 인간의 수명이 늘어나고 반대 쪽에선 저출생으로 인구소멸마저 우려되는 상황에서 연금개혁의 방안이 있기는 한 걸까. 대다수가 연금 외에 이렇다 할 노후 대책이 없는 상황에서 연금제도가 안정적으로 작동하려면 논란이 많은 현재 제도는 반드시 개혁해야 한다. 연금제도의 불안은 곧바로 노후 불안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연금개혁은 크게 모수(母數)개혁과 구조개혁의 차원에서 논의된다. 즉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을 얼마나 조정할 것인가, 연금의 구조적 형태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하는 문제다. 얼핏 보기에 둘 중 하나를 선택하면 될 것 같지만,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다. 왜냐하면 연금제도 자체가 계층 간·세대 간 이해관계를 둘러싼 지극히 정치적인 제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동안 쳇바퀴 돌리는 수준의 개혁안만 양산해 왔다. 이러한 정치·경제적 성격을 잘 이해하면서 정치적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 쳇바퀴 돌리는 개혁을 바로 잡기 위해 이제는 혁명적 차원의 전환을 모색해야 한다.

연금제도는 사회보장제도지만 정치적·경제적 맥락과 변수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는다. 세계 최초의 연금제도는 1889년 독일 비스마르크가 도입했다. 극보수주의자로서 ‘철혈 재상’으로 알려진 그가 노동자들의 노후를 위한 연금제도를 도입한 사실은 다소 어색하거나 모순으로 들린다. 당시 독일은 경쟁국인 영국과 프랑스에 비해 근대화가 거의 1세기 정도 뒤처진 낙후 국가였다. 이에 비스마르크는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해 산업화에 박차를 가했다. 급속한 산업화는 노동계급의 급성장을 불러왔다.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한 노동자들의 노동운동과 투쟁이 격화되기 시작했다. 이에 비스마르크는 사회주의자 진압법을 제정해 노동투쟁을 탄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격화된 사회주의 노동운동을 회유하기 위해 세계 역사상 최초로 대대적인 사회보장제도의 도입에 나섰다. 이러한 비스마르크의 정책을 “채찍과 당근”이라고 부른다. 비스마르크는 노동계급을 자신이 속한 지주계급(융커) 편으로 포섭해 신흥 지배계급으로 부상하던 자본가 계급을 견제하려고 했다. 연금보험료를 국가와 자본이 서로 부담하겠다고 경쟁을 벌였다.

박정희·전두환 두 독재자가 추진

우리나라는 6·25전쟁 이후 국제사회의 무상원조를 받았다. 하지만 1970년부터 유상원조인 차관으로 전환됐다. 이에 경제개발 비용 확보를 위해 고심하던 박정희 대통령은 1973년 갑자기 ‘국민복지연금법’을 제정했다. 이는 명목상 국민의 노후 소득보장을 하겠다는 명분을 내걸었지만, 실제로는 적립방식의 연금제도를 이용해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본을 동원하려는 내자동원(內資動員) 전략이었다. 즉 연금제도를 도입하면 20~30년 이상 매월 연금보험료를 징수해 적립할 수 있으므로 이를 경제개발에 활용하려는 계산이었다. 외국으로부터 빚을 얻지 않고 국민의 돈으로 경제개발을 해보려는 의도였던 셈이다. 그러나 당시 세계경제를 강타한 오일쇼크(유류파동)의 엄청난 충격이 발목을 잡았다. 1974년을 목표로 시행령까지 제정하며 의욕적으로 추진했으나 결국 연금제도 시행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추진한 연금제 도입은 국제경제의 대혼란이라는 폭풍우에 그만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1985년 2월 12일 제12대 총선에서 전두환의 민정당은 김영삼·김대중 없이 나선 야당(신한민주당)에도 충격적인 패배를 당했다. 이에 재야에서는 대통령 직선제 요구가 확산하기 시작했다. 당황한 전두환 정권은 고심 끝에 1986년 9월 1일 국민연금 도입, 의료보험 전 국민 확대, 최저임금제 도입 등을 내세운 국민복지종합대책을 발표하였다. 이를 근거로 그해 12월 국민복지연금법을 국민연금법으로 전부개정해 1988년 1월 1일 시행할 것을 법의 부칙에 규정해 놓고 법대로 시행에 들어갔다. 박정희가 추진했다가 실패한 연금제도를 전두환이 강력하게 추진해 전격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우리나라 연금제도는 박정희·전두환이라는 두 독재자를 거쳐 실시됐고, 오늘까지 왔다.

김연명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 민간자문위원회 공동위원장이 지난 9월 4일 국회 연금개혁 특위 전체회의에서 의원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김연명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 민간자문위원회 공동위원장이 지난 9월 4일 국회 연금개혁 특위 전체회의에서 의원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박민규 선임기자

선심성 제도로 설계…선천적 부실

정당성 없는 독재권력이 국민의 환심을 사려는 목적으로 국민의 노후를 보장하기 위한 연금제도를 전격적으로 도입하다 보니 합리성이나 책임성보다는 거의 퍼주기 식의 선심성 제도로 설계되었다. 선천성 부실 연금이었던 셈이다. 3%의 보험료율과 70%의 임금대체율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러니까 가입자인 국민이 내는 보험료는 쥐꼬리 수준이고, 그에 비해 연금 급여는 과도하게 많이 받아 가는 구조였다. 그래봤자 연금 급여 역시 푼돈이나 용돈 수준밖에 안 됐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연금기금 고갈 문제와 급여 수준의 적절성 문제가 수시로 부각됐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보험료를 대폭 인상하고 연금 급여는 대폭 낮추자는 논의가 폭탄 돌리기 식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정부와 정치권은 지금도 이 폭탄을 어찌할 줄 몰라 쩔쩔매고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기에 바로 연금개혁의 핵심이 있다. 보험료는 올리고 급여를 낮춰야 하는데, 당사자들은 반대하니 정치권은 눈치만 보며 전전긍긍하는 실정이다.

박정희 정권이 경제개발의 재원 확보를 위해 국민복지연금법을 제정했다고 앞서 언급했다. 김영삼 정부는 한술 더 떠 공공자금관리기금법을 제정해 국민연금기금을 아예 공공자금관리기금으로 강제예탁하도록 했다. 국민연금기금을 정부 차원에서 자유롭게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이후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참여정부의 ‘한국판 뉴딜정책’(2004년)에서 정부 주도의 투자에 국민연금기금을 끌어들였고. 이명박 정부도 ‘뉴스타트 2008’과 ‘일자리 창출과 경기회복을 위한 투자촉진 방안’(2009년)에 국민연금기금을 동원했다. 박근혜 정부와 문재인 정부에서도 국민연금기금을 활용하는 공공투자를 계속해서 시도했다.

이처럼 국민연금은 보수 정권이 추진·도입했다. 정권의 정당성 확보 차원이었다. 문제는 선심성에 치중하다 보니 부실 연금 시행으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IMF 외환 위기를 극복하려 분투했던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는 정치적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연금개혁에 나섰다. 김대중 정부는 연금의 소득대체율을 60%로 낮추고 연금 수급 개시 연령을 순차적으로 늦추는 개혁을 단행했다. 노무현 정부도 보험료율 인상엔 실패했지만, 연금 급여의 소득대체율을 연차적으로 40%까지 낮추는 개혁을 이루었다. 그래서였을까? 이명박 정권으로 권력이 넘어갔다. 어떻게 보면, 일은 ‘보수 정권’이 저지르고, 설거지는 ‘민주 정권’이 비난을 무릅쓰고 해온 셈이다. 이번 정권은 어떨까. 이명박 정권, 박근혜 정권, 문재인 정권은 국민연금 개혁에 손도 대지 못했다. 윤석열 정부가 제시한 개혁안은 수치가 빠져 있어 ‘맹탕 대책’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있는 정부·여당이 과연 젊은 세대의 보험료 부담 문제를 비롯한 세대갈등 요소까지 안고 있어 치명적인 폭탄이나 다름없는 국민연금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뤄낼 수 있을까.

노동·시민·사회단체들로 구성된 공적연금강화국민운동(연금행동) 관계자들이 지난 9월 1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국민연금 재정계산위원회 공청회에서 재정계산위를 규탄하는 피켓팅을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노동·시민·사회단체들로 구성된 공적연금강화국민운동(연금행동) 관계자들이 지난 9월 1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국민연금 재정계산위원회 공청회에서 재정계산위를 규탄하는 피켓팅을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국민연금은 누구의 것인가

국민연금은 가입자들이 낸 보험료를 재원으로 한다. 세금은 아니지만 의무가입에 따른 보험료 납입이라 세금처럼 보인다. 연금을 포함해 건강보험, 고용보험 등 사회보험의 비용은 사용자, 피용자, 자영업자의 공동 부담이 원칙이다(사회보장기본법 제28조 제2항). 따라서 정부는 한 푼도 부담하지 않는다. 다만 국민연금공단 운영비의 일부 또는 전부를 부담할 뿐이다(국민연금법 제87조). 이는 모든 국민의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헌법 제34조 제1항), 사회보장·사회복지의 증진에 노력할 국가의 의무(헌법 제34조 제2항) 등을 규정한 헌법 조항에 위배된다. 국민 노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보험료를 징수하고 연금을 지급하는 제도를 운용하면서 국가는 부담을 지지 않는다면 국민이 낼 보험료와 받을 연금 수준도 국민이 정해야 한다. 실상은 정반대다. 국민의 부담(보험료)과 수급(연금 수준)을 국가가 일방적으로 정하고 있다. 자신의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사항을 결정하는데, 정작 국민은 소외된 채 한 푼도 내지 않는 국가가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꼴이다. 전문가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더 내고 덜 받아야 하는지를 제각각 계산하고 제시하며 논쟁만 벌일 뿐, 정작 국민은 꼬박꼬박 보험료를 내면서도 정책 결정 과정에서 철저히 소외돼 있다.

노후를 위해 얼마를 부담할 것이며 얼마를 받을 것인지를 놓고 가입자 전체와 수급권자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치열하게 토론해야 한다. 미래 운명과 삶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 과제를 국가에 맡겨놓을 수는 없다. 주주총회나 노조총회에서 주주와 노동자가 자신들의 이해관계 및 몫과 관련해 주요 결정을 내리듯이 보험료 납입자와 연금수급자가 총회를 통해 자주적으로 보험료율과 급여율 등을 정해야 한다. 연금개혁의 결정권을 당사자들이 가져와야 한다는 뜻이다. 전문가들의 분석과 전망은 참고만 하고, 최종 결정은 당사자들이 토론과 투표를 통해 내려야 한다. 언제 어디서 그 많은 사람이 다 모일 건가, 소수의 전문가도 평행선을 달리는데 분분한 의견의 접점 찾기가 가능은 할 것인가, 지금으로선 다소 막연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국가가 권한을 내려놓는 동시에 온라인 공간을 활용한 상세한 정보 공개와 더불어 책임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국민연금 가입자 및 수급권자들과 진정성을 가지고 열린 토론에 임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일견 돌아가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그게 가장 빠른 길이다.

<윤찬영 전주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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