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사치품과 명품, 인간과 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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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이후 한국의 소비문화가 급격히 확장될 때, 나는 탐탁지 않은 마음이 들면서도, 시대의 변화를 인정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경제 규모와 소득이 성장하면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텐데, ‘자본주의 소비문화’를 계속해서 비판만 하는 건 너무 고리타분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럽에서 10년 넘게 생활한 지금은 오히려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한국의 소비문화는 절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나는 소비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후기 자본주의의 정신이 한국만큼 파괴적으로 드러나는 곳도 드물다.

명품의 등장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올해 초 여러 외신이 투자은행 모건 스탠리의 분석을 인용하며, 한국의 패션 명품 소비 경향을 보도한 적이 있다. 한국의 1인당 평균 명품 소비액은 325달러로, 미국 280달러와 중국 55달러를 훨씬 뛰어넘는 세계 1위라고 한다. 한국에서 명품으로 번역한 말은 럭셔리 굿즈(luxury goods)다. 이는 생활에 꼭 필요하지는 않지만, 즐거움이나 만족감을 주는 호화롭고 값비싼 상품을 말한다.

이제는 다들 잊은 것 같지만, 과거에는 이런 상품을 사치품이라 불렀다. 명품이라는 말은 주로 예술품이나 장인이 만든 공예품에 쓰였다. 그후에 다양한 상품 영역으로 확장됐고, 1990년을 전후해서 고급 백화점들이 ‘해외 명품 패션 브랜드’ 따위의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지금 일상 언어를 지배하는 것은 명품이고, 사치품은 특수한 맥락에서 사용하는 말이 됐다. 최근 뉴스에서 사치품을 검색하면, 북한 김정은 일가나 횡령 범죄자의 사치품 구매에 관한 기사가 나온다. 같은 제품을 한국인이 사면 명품이라 부르고, 북한 지배층이 사면 사치품이라 부르는 것이다. 명품은 가치 중립적인 상품 카테고리가 아니라 기업이 만들어낸 마케팅 용어다. 놀라운 것은 기업의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난 이 말이 마치 표준어처럼 사용된다는 점이다. 소비자는 물론 상당수 언론 역시 명품을 공식 언어로 쓰고 있다. 물론 명품과 사치품 중 어떤 말을 쓰는 것이 옳다 그르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중요한 질문은 사치품이 명품이라는 말로 대체된 언어적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다.

명품 소비라는 사회적 현상

명품(또는 사치품)의 종류는 다양하고, 그걸 구입하는 소비자의 이유도 제각각이다. 내가 타인의 소비 행위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는 없다. 이는 전적으로 그의 자유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설사 그런 소비가 쓸모없는 허세나 과시욕 때문이라고 해도, 타인의 소비 취향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훈계하는 것은 무례한 일이다. 하지만 명품 시장의 성장이라는 일반적 현상을 평가하는 것은 당연히 가능하고, 또 필요하기도 하다.

사치품은 경멸과 선망이라는 양가적 감정의 대상이었다. 부자들의 천박한 취미 정도로 취급되는 동시에 부러움과 질투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런데 명품이라는 새로운 이름은 경멸을 최소화하고, 선망을 최대화한다. 보통 사람과 상관없는 부자의 물건이 아니라 보통 사람 모두가 선망하는 훌륭하고 아름다운 물건이라는 의미를 획득한 것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부자들의 취미였던 사치품 구입이 대중문화의 한 부분이 됐다. 몇 달 치 월급을 모아 명품 가방을 사거나, 카푸어로 살면서 고가의 독일 차량을 몰고 다니는 보통 사람들이 등장했다. 명품 샀다고 SNS에 자랑하는 건 부자들만이 아니다. 온갖 미디어가 명품에 관해 떠드는 걸 보고 있으면, 누구나 집에 값비싼 패션 상품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 할 것처럼 느껴진다.

다수가 선망하는 물건을 사는 것은 충분히 합리적인 판단일 수 있다. 요즘엔 어떻게든 다수의 관심을 받으면, 그걸 경제적 이익으로 연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명품 소비 세계 1위는 허세나 과시욕에 빠진 비합리적 소비자가 증가했다는 것이 아니라 명품을 향한 대중적 욕망이 형성돼 있다는 뜻이다. 유의미한 질문을 하려면 소비자 개인이 왜 명품을 사는지 대신 어떤 사회문화적 환경이 명품을 사도록 만드는지 물어야 한다. 사실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한 인간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그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그가 소유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가치

사치품에 대한 이중적 태도는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발견할 수 있지만, 대부분은 경멸이 표면에 드러나고, 부러움은 이면에 숨겨진다. 이는 인간 존재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는 근대 사회도 마찬가지다. 사치품은 값비싼 소유물을 통해 더 가치 있는 인간이 되겠다는 욕망을 상징하고, 이러한 욕망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천박한 ‘부르주아 하위문화’ 정도로 취급된다.

물론 그렇다고 사치품에 대한 자본주의적 욕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욕망이 결코 공동체의 공식적 가치가 되지는 못한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가치를 상품의 가치로 대체하려는 자본주의적 경향이 극단에 이르면, 공동체는 물론 자본주의 자신의 붕괴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인간에게도 가격표를 붙이는 것은 자본주의의 본성이지만, 이는 공동체의 정치적 통제와 도덕적 규범에 종속되어야 한다. 따라서 마음속으로는 재산 수준으로 타인을 평가하고, 경멸과 선망의 감정을 갖더라도, 겉으로는 모든 인간을 인간으로서 평등하게 대하는 것이 교양을 갖춘 사람의 조건이 된다. 다소 위선적으로 보이겠지만, 이런 위선이야말로 공동체를 유지하는 핵심 장치다.

현대 한국사회를 특징짓는 현상은 드러내야 하는 것과 숨겨야 하는 것의 역전이다. 표면에 드러난 것은 더 비싼 물건을 소유함으로써 나라는 인간의 상품 가치를 상승시키겠다는 욕망이고, 숨겨야 하는 것은 소유물이 인간의 가치를 대체할 수 없다는 도덕 규칙이다. 사치품이 아닌 것으로서의 명품은 이러한 욕망의 ‘솔직한 분출’을 상징한다. 하지만 이런 솔직함이 내 삶을 지배할수록 나 자신은 소외된다. 많은 사람이 소유물에 감추어진 자기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기 위해 종교를 찾고, 여행을 떠나고, 서점에 가지만, 이 모든 건 다시 힐링이라는 이름의 상품으로 환원된다. 타인을 대할 때는 그의 소유물이 아니라 그의 인간 존재 자체를 대해야 한다는 말은 오래전에 사라진 종교적 가르침 따위로 취급된다. 이렇게 인간으로서의 인간은 사라지고 상품 소유자로서의 인간만 남는다. 그리고 상품 소유자 그 자신도 상품이 된다. 결국 파괴적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한국사회에서는 인간은 사라지고 상품만 남는다.

<박이대승 정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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