꾹꾹 눌러쓴 슬픔·사과·추모…담고, 나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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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9 이태원 참사 시민대책회의 기록보존팀의 ‘이태원 기억 담기’

159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1년이 흘렀다. 참사의 기억을 지우거나 왜곡하려는 모습이 곳곳에서 보인다. 하지만 기억하지 않으면 참사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과 함께 ‘기억 투쟁’을 벌이는 이들이 있다.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기억해야 할 이야기를 기록한다. 이들은 말한다. “진실과 기억의 힘이 우리를 나아가게 한다”고.

지난 2월 2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골목에서 한 시민이 추모 메시지를 붙이고 있다. / 한수빈 기자

지난 2월 2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골목에서 한 시민이 추모 메시지를 붙이고 있다. / 한수빈 기자

지난해 발생한 10·29 이태원 참사 이후 서울 이태원역 1번 출구 일대는 추모의 공간이 됐다. 정부나 서울시·용산구 등 지방자치단체의 개입이 아닌, 시민 한두명의 발걸음을 시작으로 커다란 추모의 장이 만들어졌다. 꽃, 술, 음식 등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한 물품이 가득했다. 특히 추모의 글이 담긴 포스트잇(메모지)과 편지 등이 곳곳에 빼곡하게 붙었다.

10·29 이태원 참사 시민대책회의 피해자권리위원회의 기록보존팀은 지난 3월부터 추모 메시지를 수거해 분류·보존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십수만장으로 추산되는 방대한 분량이다. 이런 기록보존 활동을 ‘이태원 기억 담기’라고 일컫는다. 100명이 넘는 시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활동을 담당하고 있는 박이현 문화연대 활동가는 “많은 시민이 이번 참사를 사회적으로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지표”라고 말했다.

추모 메시지를 작성한 이들은 희생자의 가족 및 지인, 피해 생존자 및 구조자, 목격자, 참사를 기억·애도하려는 시민 등 다양했다. 슬픔, 미안함, 자책감, 무력감, 분노, 상실감 등 여러 감정이 깃들어 있다. 이번 참사를 “기억하겠다”, “평생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 담긴 내용이 많다. 희생자들을 상대로 한 세간의 일부 왜곡된 인식을 극복하려는 노력, 국가 재난대응시스템의 공백상 등도 엿볼 수 있다. 외국어로 작성한 메시지도 30%가량 된다고 한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159명 가운데 외국인은 26명(14개 국가)이었다.

시간이 흐르거나 비에 젖어 종이와 손글씨가 바래기도 했다. 기록보존팀은 메시지 원본을 분류한 뒤 A4 용지에 붙이는 방식으로 보존하고 있다. 보존 작업은 약 80% 완료됐다. 이렇게 ‘담은 기억’을 추모낭독회나 영상 제작 등을 통해 ‘나누기’도 한다. 향후 디지털화를 진행한 뒤 출판하는 방안 등도 검토 중이다. 추모기념관 등 추모시설에 보관·전시하면 가장 좋겠지만, 아직 그런 공적인 공간이 마련되지는 못한 상태다. 보존 작업 자체도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 없이 이뤄지고 있다.

보이지 않는 시민들의 배려와 정성도 이번 활동의 큰 동력이다. 참사 현장 바로 옆에 있는 편의점주는 분류 작업을 할 공간을 내어줬다. 한 시민은 흩날리는 포스트잇을 모아 서울시청 앞 시민분향소로 가져다줬다고 한다. 박이현 활동가는 “기록물을 수거하고 관리하는 데 국가는 거의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라며 “메시지를 온전히 보존하려면 적정한 온도와 습도 등을 유지해야 하는데, 이곳은 전문적인 공간이 아니어서 혹여 훼손될까봐 걱정스럽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이어 “참사 이후에도 국가의 공적 역할은 여전히 공백 상태”라고 지적했다.

기록보존팀은 참사 현장에 놓인 추모 물품들을 수거하고 주변을 청소하는 작업도 맡고 있다. 박이현 활동가는 “추모와 애도의 메시지가 더 많은 사람에게 닿아 안전한 사회를 위한 기틀을 마련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사진과 그래픽은 서울 서대문구 문화연대 사무실에서 보관 중인 추모 메시지들이다.

꾹꾹 눌러쓴 슬픔·사과·추모…담고, 나누다
꾹꾹 눌러쓴 슬픔·사과·추모…담고, 나누다

세월호 이후 다시 같은 문제가 반복되는 것에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저 즐겁게 보내고 끝냈어야 하는 날이 행정 시스템 때문에 슬픈 날로 기억되게 됐네요. 참사를 사고로, 추모하고 제대로 된 진상조사 없이 애도조차 쉽지 않게 만드는 구조를 직시하겠습니다. 부디 그곳에선 평안하시길.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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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심폐소생술 자격증을 따고 왔어요. 사고 이후로 남 일 같지가 않아 너무 힘들었는데, 이렇게라도 하면 이 무기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해서요.(…) 당신들의 아픔을 막지 못한 이 국가에서 부끄럽게 살아가는 한 국민으로서 앞으로 더 크게 용기를 낼게요. 두려움에 뒷걸음질치거나 우울함의 구덩이에 빠지지 않을게요. 치열하게 목소리를 내고 맞서 싸워서 두 번 다시는 이런 참사가 그 누구도 아프지 않게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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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 후 정신을 차려보니 정신없이 심폐소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조금만 더 빨리 정신을 차렸더라면, 한 분이라도 더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과 속상함이 큽니다. 제 앞에서 살려달라고 절규하던 분의 얼굴이 기억납니다. 구조될 때는 숨이 멎은 상태였습니다.(…) 제가 힘이 조금 더 셌다면 들어올려서라도 살릴 수 있었을까 생각이 듭니다. 죄송합니다. 부디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글·사진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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