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교양은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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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자료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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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안에서 담배를 못 피우게 됐어요.” 까마득한 옛일이다 싶기도 하지만,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아빠(남성 가장)들은 집 안에서 예사롭게 담배 피우며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아이가 항의한다. ‘아빠는 다른 사람을 배려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왜 스스로는 그렇게 하지 않아?’ 꼼짝없이 밖으로 쫓겨난 그들은 “아이가 ‘고래가그랬어’ 보고 변했다”며 웃곤 했다. 그들은 고마워하고 있었다.

우리는 지식이 내 상품 가치와 스펙을 높여 좀더 편하게 살게 해주는 도구라 믿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본디 지식은 나를 더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다. 못 보고 모르고 지나갈 일들을 보고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고 알게 된 것과 내 삶과 연관성, 즉 지식과 현실에서 실천 사이의 갈등으로 끝없이 고통받게 된다. 하지만 그 고통이야말로 지적 인간만이 누리는 환희이며 세상을 바꾸는 힘의 원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지식과 실천이 하나임을 전제하는 교양 교육은 꽤 위험한 일이다. 내가 가르치고 내가 당하기에 십상이다. 집 안 흡연을 포기하는 정도라면, 민망함을 오히려 ‘민주적인 아빠’를 과시할 기회로 돌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와 아이 관계 안팎엔 심각한 주제가 많다. 민망함을 넘어 인격적 존중이 훼손될 수도 있다. 배운 게 많고 진보적인, 그래서 말과 실천이 분리할 여지가 많은 부모일수록 더 그렇다.

이를테면 사회적으로는 진보와 평등을 설파해 존경을 얻는 부모가 제 아이 입시 경쟁에선 특권과 편법을 동원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고 해보자. 아이와 부모 사이에 심각한 긴장과 갈등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부모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할 수도 있다. 아이와 인간적 존중을 유지하기 위해 행동을 교정하든가, 인간적 존중을 잃더라도 ‘아이의 미래를 위해’ 밀고 나가든가. 나는 이런 상황에 부닥친 고등학생이 보낸 편지를 받은 일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 이런 사례는 적으며, 현실에서 이런 상황을 피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아이의 ‘두 사회’를 분리하면 된다. 아이는 두 사회를 살아간다. 하나는 생활 전반에 절대적인 영향과 결정을 받지만, 아직 사회 성원으로서 책임이나 권리는 유보된 ‘성인 사회’다. 또 하나는 사회 성원으로 일정한 책임과 권리를 갖는, 동무들과 관계를 중심으로 하여 가족, 학교, 학원 등도 일정하게 포함하는 ‘제 사회’다. 아이가 사회에 관해 배울 때 그 지식 대부분은 ‘성인 사회’에 관한 것이다. 1) 아이는 성인 사회의 사회와 역사를 배우고 2) 배운 지식을 제 사회에서 적용하고 실행해보며(시행착오의 기회를 받으며) 성인으로 성장한다. 교양 교육의 위험은 1)과 2)의 연결에 있다. 그걸 끊어주면 위험도 사라진다.

성인 사회 문제에 지식이 많고 기득권 세력에 비판적이며 피억압자를 옹호하는 아이가, 제 사회에서 행동에선 딱 제가 비판하는 기득권을 좇는 작은 억압자인 경우는 실재한다. 이 아이는 앞서 말한 부모의 이중성과 긴장을 일으킬 가능성이 작다. 오히려 이해관계에 따라 부모를 옹호하거나 ‘당사자로서’ 변론할 수도 있다. 교양 교육은 내가 가르치고 내가 당하는 위험한 일이다. 서로 배우는 일이라는 뜻이다. 위험이 제거된 교양 교육은 배움이 아니라 세대 간 공모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김규항 ‘고래가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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