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대화가 필요해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나이 먹어가며 실감한다. 가까운 곳에 언제든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큰 축복이다. 늘 다정한 관계가 아니어도 말이다. / 픽사베이

나이 먹어가며 실감한다. 가까운 곳에 언제든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큰 축복이다. 늘 다정한 관계가 아니어도 말이다. / 픽사베이

몇 해 전 아내가 퇴직했다. 종일 껌딱지처럼 붙어살다 보니 관계가 늘 살갑기 어렵다. 대화다운 대화는 하루 한 번 이뤄진다. 아침 산책길에서다. 나는 이 시간이 좋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보듬게 된다. 아내를 향한 마음도 너그러워진다. 서로를 환대하는 안온한 시간이다.

관계를 맺는 대표적인 방식이 대화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바란다. 그것이 부모와 자녀든, 상사와 부하든, 부부간이든 마찬가지다. 어울려 살기 위해 우리는 상대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며, 내게 어떤 기대와 요구를 하는지 알아야 한다. 이때 필요한 게 대화다.

대화가 부족할 때 나타나는 부작용은 한둘이 아니다. 상대를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상대가 원하지 않는데, 배려해놓고 알아주지 않는다고 짜증을 낸다. 자신은 속내를 털어놓지 않으면서 상대는 뭔가를 숨기고 있다고 의심하기도 한다. 이따금 대화하더라도 상대에 대한 칭찬과 감사보다는 지적과 탓을 하기 일쑤고,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을 많이 말하게 된다. 감정을 말하지 않고 감정적으로 말하고, 친근하기보다는 권위적으로 말한다. 대화 주제도 가볍고 긍정적인 얘기가 아니라 심각하고 부정적인 내용이 많다. 이런 대화는 십중팔구 싸움으로 번진다. 차라리 말을 말아야지 하면서 대화한 걸 후회하고, 대화를 더 멀리하는 악순환에 빠진다. 가장 큰 문제는 어쩌다 한번 대화하면 마땅히 얘기할 거리가 없어진다는 점이다.

우리가 대화할 때 어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시작하는 말이 잘 떠오르지 않을 때 어렵다. 라디오 인터뷰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도 매번 느끼는 게 첫마디의 어려움이다. 좋은 첫마디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음 말을 이끌어내 대화 자리를 풍성하게 한다. 전체 대화의 기본 방향을 결정하기도 한다. 첫마디에서 대화의 성패가 판가름 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첫 문장이 글의 기조를 좌우하듯 말이다.

일반적으로는 상대방의 근황을 소재로 하면 좋다. 인터넷에서 인물 검색을 하거나 상대방의 관계망 서비스에 들어가 축하하거나 위로할 거리를 찾는다. 상대가 책을 썼다면 목차 정도는 읽어보고 만나야 한다. 필요하면 상대측과 가까운 사람에게 전화해 근황을 묻는 성의도 보여야 한다. 상대의 개인적인 일일수록,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일수록 더 큰 친밀감을 형성할 수 있다.

정보를 제공하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할 수도 있다. 누구나 정보 욕구가 있다. 정보를 주는 사람이 환영받는다. 흔히 말은 즉흥적인 것이니 준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말이야말로 준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헤어지고 나서 ‘아, 이 얘기는 했어야 하는데…’ 하며 후회하거나, ‘괜히 만났어. 시간만 뺏겼네’라는 상대의 불만을 살 수 있다.

대화 자리에는 한두 가지 얘깃거리를 만들어가자. 나를 만나면 뭔가 얻는 게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해야 한다. 나는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길에 주요 뉴스나 어떤 이슈가 있는지 휴대전화로 검색해본다. 온라인 서점에 들어가 책의 목차를 보기도 하고, 칼럼이나 블로그 글을 읽으며 이야깃거리를 찾기도 한다.

감정도 좋은 대화 소재다. 서로가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그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대화가 필요하다. 감정 대화는 상대에게만 하지 않는다. 크게 여섯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진다. 내가 나에게, 내가 너에게, 네가 너에게, 네가 나에게, 내가 그에게, 네가 그에게. 어떤 경우든 공감하면서 들어주는 게 중요하다. 상대와의 감정 대화는 오해와 쌓인 감정을 푸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

이도 저도 아니면 잘 듣는 것으로 대신한다. 경청이야말로 최고의 대화 기술이다. 경청하기 위해서는 말해야 한다는 부담감부터 내려놓아야 한다. 아는 내용, 말하고 싶은 주제가 나올수록 한 호흡 늦추고 대화의 흐름을 지켜보다가 끼어든다. 내 말은 부족하다 싶을 만큼만 하고, 상대 말에 내 말을 보태거나, 상대 말을 ‘이런 뜻이죠?’ 하며 수용하고, 질문하는 방식으로 상대를 중심에 놓고 대화한다. 반박하더라도 먼저 동의해준 다음에 한다.

경쟁이 아니라 협력으로 대화하자. ‘그러나’, ‘하지만’보다는 ‘그리고’, ‘아울러’라는 말로 내 생각을 보태고, ‘그건 아니야.’ 나 ‘이래서 안 돼’와 같이 남의 말을 깎아내리는 뺄셈 대화보다는 그 말을 보완하고 보충해주는 덧셈 대화를 하자. 편을 가르고 나누는 나눗셈 대화가 아니라 연결하고 결합하고 융합하는 곱셈 대화를 해야 한다.

내가 얼마나 많이 말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주도권을 쥐려고 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말을 많이 한다고 설득되지 않는다. 내가 주도권을 잡고 말하면 상대는 반감만 쌓일 뿐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주어야 한다. 상대를 이기기 위해서도 먼저 져줘야 한다. 때로는 알면서도 속아줘야 한다. 대신 진지한 자세로 상대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욕구와 요구를 파악하며 듣는다. 그것이 진정한 주도권을 쥐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길이다.

여럿이 대화하는 자리에서는 소외되는 사람을 배려해야 한다. 이 사람 저 사람 이름도 자주 불러주고 한 사람 한 사람 신경 쓰면서 고루 말할 수 있게 하자. 또 누군가 말했는데 아무도 반응해주지 않아 민망한 상황이 되지 않도록 즉시 호응해주자. 그러면 그 사람은 두고두고 고맙게 기억할 것이다.

대화에는 역할에 따라 다섯 부류의 사람이 있다. 주도자, 협력자, 대항자, 방관자, 희생자다. 당신은 대화 자리에 어떤 역할을 하는가. 대화를 이끄는가, 장단을 맞춰주는가. 아니면 저항하거나 방관하는가. 모두 의미 있는 역할이다. 나는 협력자 역할에 주력하는 편이다. 집에서도 마찬가지다. 주도자는 아내다. 나는 감히 대항할 엄두를 안 낸다. 그렇다고 방관자나 희생자가 되긴 싫다. 남은 역할은 협력자뿐이다.

나는 가정의 평화를 원한다.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무엇보다 공격적인 태도를 버리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다섯 가지를 지킨다. 첫째, 아내가 싫어하는 예민한 주제는 꺼내지 않는다. 둘째, 아내의 말에 대해 판단하고 평가하지 않는다. 셋째, 내 말에 대해서는 그것이 맞는지 스스로 의심해본다. 넷째, 말다툼이 벌어졌을 때는 문제가 확대되는 걸 방지하고 잘게 나눠 하나씩 접근한다. 이때 한 번에 30초 이상 말하지 않는다. 다섯째, 아내의 말을 비판하긴 해도 아내를 공격하거나 비난하진 않는다.

<강원국 작가>

요즘 어른의 관계맺기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