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선다에 갇힌 ‘가능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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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2번째 수능을 치르는 김형원씨(19·가명)가 지난 9월 24일 경기 성남의 한 고시원에서 공부하고 있다. 김씨는 지난 2월 서울 대치동 학원에 다니기 위해 경남 통영에서 상경했다. / 조태형 기자

올해 2번째 수능을 치르는 김형원씨(19·가명)가 지난 9월 24일 경기 성남의 한 고시원에서 공부하고 있다. 김씨는 지난 2월 서울 대치동 학원에 다니기 위해 경남 통영에서 상경했다. / 조태형 기자

“대치동 친구들은 ‘몬스터’ 마시면서 엄청 조금 자요. 적게 자는 애들은 2~3시간쯤, 저는 4~5시간 자요.”

지난 9월 5일 서울 대치동 학원가에서 만난 중학교 1학년 권모양(13)은 중학교 입학 전 살았던 송파 잠실과 현 거주지인 강남 대치를 비교하며 에너지 음료를 언급했다. 학생들이 오랜 시간 공부하려고 각성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졸음을 쫓으려 고3 때 마시던 게 에너지 음료인데 5년이나 앞당겨졌구나 싶었다.

외고 입시를 준비한다는 권양은 수학·과학·국어·영어학원에 다니고 수학은 과외도 받는다. 초등학교 1·2학년 때는 방학마다 필리핀으로 어학 캠프를 갔다. 언니와 세 차례 캠프를 다녀오는 데 든 비용만 2억원에 달한다고 했다. 입시를 치르며 대치동과 별다른 접점이 없었기에 그날 학원가에서 만난 학생들을 통해 접한 세계가 생경하게 다가왔다. 초등학교 때부터 의대 입시를 준비하는 ‘초등 의대반’이 성행하는 등 사교육 진입 시기가 빨라졌고, 공부 계획을 관리해주는 과외 등이 생겨났다는 사실을 이번 취재 과정에서 확인했다.

대치동에 매몰되거나 이곳을 타자화하는 것을 경계하려고 다른 지역으로 초점을 넓혔다. 충청·경북 등 지역에서 입시를 치르는 학생들, 대치동을 거쳐 간 비수도권 학생들과 서울 강북권 학부모 등도 만났다. 대치동의 유명학원이 출간한 문제집은 지역의 교실까지 파고들었고, 대치동에 진입하지 못한 이들은 뒤처질까 불안해했다.

이들이 들려준 이야기에서 ‘대치동’이 관통되는 이유는 사회가 내미는 잘살기 위한 선택지가 정해져 있어서다. 그저 ‘명문대’면 됐던 때에는 그나마 전공의 다양성이 살아 있었다. 지금은 상위권 상당수가 이공계, 의·약학계열을 바라본다. 인문학에 강세를 보여온 대학들도 AI 등 정부가 강조하는 첨단산업 관련 학과 키우기에 고무돼 있다.

대치동은 이 같은 수요에 맞춰 교육상품을 만들어 낸다. 유명학원에 몰리는 현상은 심해졌고, 재수종합학원 기준 한 달에 200만~300만원을 넘는 비용을 부담할 수 있는 건 소수다. 학원을 거쳐간 몇몇 학생은 학원 모의고사 문항을 개발하거나 검수하는 데 참여한다. 학원의 자산이 되는 입시상품 시장을 키우는 일에 기여하는 셈이다.

학원과 수험생을 탓해야 할까. 개인은 ‘합리적’ 선택을 할 뿐이다. 한 번의 시험이 막대한 수익으로 연결되는 현실에서 많은 비용을 투입해 시험에 올인하는 건 자연스러워 보인다. 돈과 시간을 갈아 넣어 의사가 된 이들은 다시 이익을 거둘 수 있는 피·안·성(피부과·안과·성형외과) 등 특정 전공으로 몰린다. 필수의료 부문 의사는 지역을 가리지 않고 부족하다. 모두 우리의 삶과 엮여 있는 문제다.

교육 문제는 복잡다단하다. 정권마다 바뀌는 ‘입시’ 정책을 넘어 ‘교육’ 정책을 펼쳐야 한다. 문제풀이 중심의 수업, 무엇을 할 때 즐거운지 찾아가는 과정을 차단하는 지금의 교육을 그대로 둔다면 무한 n수, 이공계 쏠림, 지역 이탈, 청소년 자살률 증가 추세는 이어질 수밖에 없다. 정시 확대, 고교 내신 상대평가, 서열화된 고교 체계를 유지하기로 한 정부의 결정은 악순환의 고리를 단단하게 할 뿐이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들’은 그렇게 오지선다 안에 갇혀 있다.

<박하얀 스포트라이트부 기자 whit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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