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죽일 수 없는 손님’ 벨레로폰의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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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마이라를 퇴치하기 위해 떠나는 벨레로폰’(1829년,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키마이라를 퇴치하기 위해 떠나는 벨레로폰’(1829년,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인생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시작되고 끝난다. 내가 한 행동이 아닌데도 상대방에게 오해를 사면 신뢰는 걷잡을 수 없이 깨진다. 신뢰가 깨지면 언제 어디서든 위험해질 수 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불리한 상황에 빠진 사람이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영웅 벨레로폰이다. 벨레로폰은 코린토스의 왕 글라우코스의 아들로 실수로 형제 벨레로스를 죽인 뒤 조국에서 추방당한다.

조국에서 쫓겨난 벨레로폰은 티린스 왕 프로이토스를 찾아가 몸을 의탁한다. 얼마 후 프로이토스의 아내 안테이아가 벨레로폰을 보고 첫눈에 반해 유혹한다. 하지만 벨레로폰이 거절하자 그는 남편을 찾아가 겁탈당할 뻔했다고 누명을 씌운다.

프로이토스는 아내의 말만 믿고 복수심에 불타올랐지만, 손님을 죽여 복수 여신의 분노를 사고 싶지는 않았다. 깊은 고심 끝에 프로이토스는 봉인된 편지와 함께 벨레로폰을 소아시아 리키아의 왕이자 장인인 이오바테스에게 보낸다. 이바오테스는 벨레로폰을 9일간 극진하게 대접한 뒤 10일째 되는 날 봉인된 사위의 편지를 뜯어본다.

편지에는 “이 편지를 가지고 가는 자를 죽여 주십시오. 그는 바로 저의 아내이자 장인어른의 딸인 안테이아를 겁탈하고자 한 자입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프로이토스가 벨레로폰의 손에 들려 보낸 봉인된 편지에서 ‘벨레로폰의 편지’라는 고사가 유래됐다. ‘벨레로폰의 편지’는 자신도 모르게 몹시 불리한 편지를 직접 가지고 가는 경우를 말한다. 이 고사는 후에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똑같은 모티브로 등장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편지를 읽은 이오바테스도 같이 밥을 먹은 손님은 죽일 수 없다는 풍습 때문에 벨레로폰을 죽일 수 없었다. 그는 벨레로폰에게 사람들을 괴롭히는 괴물 키마이라를 죽여달라고 부탁한다. 키마이라는 머리는 사자, 몸통은 염소, 꼬리는 뱀의 모양을 한 괴물로 이오바테스가 벨레로폰에게 물리쳐달라고 부탁한 이유는 자신은 그를 죽일 수 없지만, 괴물과 싸우다 죽으리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벨레로폰이 이오바테스의 부탁을 받는 장면을 그린 작품이 알렉산드르 이바노프(1806~1858)의 ‘키마이라를 퇴치하기 위해 떠나는 벨레로폰’이다.

화면 중앙에 창을 들고 있는 남자가 벨레로폰이며, 앉아서 그와 악수를 하는 남자가 이오바테스다. 두 사람이 악수를 하는 건 벨레로폰이 부탁을 들어주고 있음을 의미한다. 시선을 이오바테스에게 두고 있지 않은 건 스스로 원하는 행동이 아님을 뜻한다. 벨레로폰 뒤로 페가수스와 무장한 아테나 신이 보인다.

이바노프의 이 작품에서 이오바테스 뒤에 등을 돌리고 있는 여인은 프로이토스의 아내 안테이아로, 그 자신도 이 일이 떳떳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와 달리 벨레로폰은 밝게 표현했다. 정정당당하게 맞서고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다.

좋지 못한 일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해내더라도 그 일은 결국은 훗날 자신의 목을 겨눈다. 자신을 대신해 그 일을 한 사람은 항상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박희숙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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