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댓말도, 반말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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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어 실험 현장을 다녀왔습니다. 최근 나온 책 <말 놓을 용기>(이성민·민음사)가 계기였습니다. 50대 교수와 20대 학생들이 서로 동등한 위치에서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고 ‘평평한 말’(평어)을 쓰며 상호 토론을 벌이는 수업이 있다 했습니다.

[편집실에서]존댓말도, 반말도 아니다

경희대학교 서울캠퍼스 청운관 620호 강의실. 김진해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가 진행하는 ‘의미의 탄생: 언어’ 수업이 한창이었습니다. 강단에 선 교수, 이를 바라보고 앉아 있는 학생들, 여느 교실과 별반 차이가 없었지만,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분명 달랐습니다. 이 수업의 규칙은 일단 ‘학생들끼리도, 교수와 제자들 간에도 무조건 평어를 사용한다’입니다. 지난해 가을학기부터 평어 모험을 시작했다는 김 교수는 “자유로운 의사소통과 진정으로 수평적인 관계 맺기를 위해 수업 중은 물론, 밖에서도 학생들과 평어를 쓰며 대화하려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평어란 나이 차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두루 쓸 수 있는 ‘예의 있는 반말’입니다. “야, 똑바로 안 해?”가 아니라 상대의 이름을 부르며 “이렇게 해보면 어때?”라고 말하는 식입니다. 현실에선 반말과 거의 동급으로 치부되기 십상입니다. 이날 수업도 이런 흐름에서 완전히 비껴나 있지는 않았습니다. 김 교수는 끊임없이 학생들에게 말을 걸었지만, 기대만큼 창의적이고 원활한 질의응답이 이뤄지지는 않았습니다. 아직까지 학생들은 많이 어색해 보였습니다. 비교적 활발하게 격의 없는 토론에 나서는 이도 있었지만, 대다수 학생은 말끝을 흐리거나 얼버무리는 식으로 상황을 피해갔습니다. 고개만 끄덕이거나 아예 침묵하는 손쉬운 방법을 택하는 학생도 많았습니다.

또래 외엔 편한 대화를 하기 어렵고 한 살만 차이 나도 형, 동생을 구분 지으려는 대한민국 사회의 습성은 이처럼 공고합니다. 존댓말과 반말이라는 존비어 체계가 불러오는 각종 부작용의 심각성에 누구나 공감하지만, 선뜻 대안을 제시하고 나서는 이는 드뭅니다. 직장 선후배, 스승·제자 간 소통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없애겠다며 서로 존칭을 쓰는 사회 일각의 흐름이 있긴 합니다. 유교 사상이 깊숙이 밴 한국사회에서 반말은 너무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까닭에 차선책으로 끌어들인 방편입니다. 이마저도 공식 모임이 끝나면 원상 복귀하는 사례가 많습니다. 사석에서도 존댓말을 이어가면 ‘나랑 거리를 두려는 건가?’ 오해를 삽니다. 본질을 파고들어도 모자랄 판에 곁가지에 매몰돼 잠을 뒤척입니다. 사회 전체적으로 볼 때 이만저만한 낭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존댓말도, 반말도 아닌 평어는 유의미한 실험입니다. 서로 존댓말을 쓰고 있지만, 실상은 전시를 방불케 하는 여야의 극한대립, “왜 반말이냐?”, “OOO씨가 뭐냐”며 티격태격 얼굴을 붉히는 국회와 정부 관료들의 모습을 보더라도 평어 실험은 더 확산될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 또 압니까. 어느 순간, 대한민국에서 평어 사용이 대세로 자리 잡게 될지요. 그 순간을 상상해 봅니다.

<권재현 편집장 jaynew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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