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사는 이야기가 한국문학엔 왜 없나, 거기서 출발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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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사실주의’ 동인 정진영 작가 인터뷰

‘월급사실주의’ 동인 작가 10명과 함께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를 발간한 정진영 작가가 9월 12일 경향신문사 본사에서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 말하고 있다. / 이준헌 기자

‘월급사실주의’ 동인 작가 10명과 함께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를 발간한 정진영 작가가 9월 12일 경향신문사 본사에서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 말하고 있다. / 이준헌 기자

낡은 운동화 밑창을 순간접착제로 붙여가며 일하는 예은, 매일 편의점의 삼각김밥과 생수로 점심을 해결하던 학습지 교사 경진, 회사에는 언제나 껌종이처럼 버릴 수 있는 존재이면서 사원들에게는 ‘꼰대’가 돼버린 관리직 차진혜, 코로나19 한복판에서 무급휴직·권고사직·회사 매각 등을 지켜봤던 여행사 직원 수지….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김의경 외·문학동네)는 지금 한국사회의 노동을 다룬 11개의 작품을 담고 있다. 11명의 작가가 모여 이 책을 만들었다. ‘월급사실주의 2023’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월급사실주의’는 한국사회의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문제 의식을 갖고 ‘지금, 여기’의 이야기를 쓰려는 작가들의 모임이다.

<침묵주의보>(문학수첩), <젠가>(은행나무), <정치인>(안나푸르나)을 통해 언론사·기업·국회 등 한국사회 주요한 조직의 현실을 조명해온 정진영 작가도 이 동인에 참여했다. 책에 수록된 그의 단편 ‘숨바꼭질’은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고 가상화폐 시장이 들끓으면서 노동의 가치가 추락하던 지난 몇 년간의 상황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노동소득으로는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게 치솟았던 부동산 가격과 불안한 주거에 좌절하는 주인공의 모습에 많은 독자가 씁쓸한 공감을 표했다. 지난 9월 12일 경향신문사에서 정진영 작가를 만났다.

-‘월급사실주의’ 동인에는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

“장강명 작가와 잘 알고 지내는 사이다. 지난해 여름 장강명 작가, 김의경 작가, 나 이렇게 셋이 모여 ‘왜 한국문학은 먹고사는 이야기를 안 하나’라는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한국문학이 안 팔리는 이유 중 하나가 현실과 유리돼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간 한국소설이 다뤄온 다양한 소재도 중요하지만, 나는 솔직히 먹고사는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장강명 작가를 중심으로 뜻이 맞는 작가들이 모여 먹고사는 문제, 노동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로 했다. 다만 과거의 노동소설 하면 이념이 중심이지 않았나. 이념을 배제하고 또 판타지를 가미하지 말고 ‘지금, 여기’의 우리가 사는 이야기를 실감나게 써보자고 했다. 그런 취지로 작가들을 모아나갔고, 11명이 모여 작품집을 내게 됐다. 함께하는 작가 대부분이 과거 직장생활을 했거나 지금도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 등 다양한 노동현장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

-‘숨바꼭질’은 부동산 급등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지방에서 올라온 주인공은 내 집 마련의 꿈을 꾸며 알뜰히 돈을 모으지만, 결국 서울 외곽으로 더 밀려날 상황에 처한다. ‘내 모든 노력이 송두리째 부정당한 것 같아 기가 막혔다’는 주인공의 말은 당시 많은 사람이 느꼈던 좌절감을 대변하는 듯하다.

“실제 내 이야기다. 신문사를 세 군데 다녔는데, 첫 직장이 지역 신문사였고 이후 서울로 직장을 옮겼다. 광화문에 있는 회사 근처에 집을 찾다가 경기대 서울캠퍼스 쪽의 언덕 부근에 산 적이 있다. 소설 속 주인공처럼 집주인이 전세금을 많이 올려달라고 해 할 수 없이 이사를 계획하게 됐고, 계약만료일까지 전세금을 돌려주지 않아 집주인과 싸우기도 했다.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화가 많이 났던 순간 중 하나였다. 노동의 가치는 점점 떨어지고 주거환경은 점점 나빠졌다. 노동의 가치를 하찮게 만드는 원인은 부동산 가격 급등이라고 생각한다. 내 경험을 토대로 비슷한 사례들을 취재해 썼다. 읽어본 사람들이 다들 자신의 이야기 같다며 공감하더라.”

-장강명 작가는 책 서두에 쓴 ‘기획의 말을 대신하여’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먹고사는 문제를 사실적으로 그리는 한국소설이 드물다. 우리 시대 노동현장을 담은 작품이 더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정진영 작가의 전작들은 한국사회의 주요 조직, 노동현장에 대한 이야기를 다뤄왔다는 점에서 이러한 생각과 맞닿아 있는 것 같다.

“<침묵주의보>는 소설이 처음 나왔을 때는 반응이 별로 없었다. 당시 나도 현직 기자이다 보니 언론사를 다룬 소설을 써놓고 대놓고 광고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2020년에 <침묵주의보>가 드라마 <허쉬>로 방영되면서 나중에 화제가 됐다. 그러면서 언론사 종사자뿐만이 아니라 일반 기업의 직장인들도 ‘우리 회사 이야기 같다’면서 많은 공감을 표했다. 생각해보니 한국에는 직장이나 조직, 노동현장을 다룬 소설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작사로부터 드라마 제안이 왔을 때도 ‘왜 이 작품을 드라마로 만들 생각을 했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침묵주의보>가 히트작도 아니었고, 내가 유명작가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유가 궁금했다. 제작사는 언론을 주제로 드라마를 만들고 싶은데, 관련 작품이 내 소설밖에 없었다고 대답했다. 지난 5월 출간한 <정치인>도 드라마로 제작될 예정인데, 이것 또한 내 작품밖에 없다고 하더라. 사실 ‘정말 흔한 소재인데, 왜 작가들이 안 쓸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건 좀 문제가 있지 않나’ 싶었다. 한편으로는 ‘그만큼 쓰는 작가가 드무니 내가 경쟁력이 있구나, 계속 써도 되겠다’는 자신감이 생기기도 했다.”

-전직 기자였다. 저널리즘의 연장으로 소설을 쓴다고도 보여진다.

“그렇게 쓴 소설도 있고 아닌 소설도 있다. 기사와 소설의 차이는 분명히 있다. 기사는 금방 휘발되기 때문에 깊이 있게 쓰기가 어렵다. <젠가>는 2013년 한국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은 원전 비리를 다뤘다. 한국사회의 부조리를 총체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라고 생각해 소설로 썼다. 그런데 사실 그 사건이 끝이 아니었다. 그 이후에도 비슷한 사건이 계속 일어나지만, 언론은 새로운 뉴스를 찾는 관성상 그 이후에는 그만큼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 소설은 그렇지가 않다. 그러다 보니 기획기사 이상의 사회적인 파급력을 갖고 저널리즘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소설은 기사처럼 완전히 팩트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진실을 담고 있다.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이나 공지영 작가의 <도가니>는 소설이 저널리즘 이상으로 사회를 움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로 시작된 ‘월급사실주의’ 동인 작품집도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월급사실주의’의 향후 활동 계획이 있다면.

“이번 책이 잘되면 멤버를 충원해가며 ‘월급사실주의 2024’, ‘월급사실주의 2025’, ‘월급사실주의 2026’ 등으로 작업을 계속 이어나가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개인적인 바람인데, 내년에는 새로운 작가들이 또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줬으면 좋겠다. 장강명 작가에게 새롭게 ‘월급사실주의’에 참여하고 싶다고 연락하는 작가도 여럿 있다고 들었다. 그런 분들이 또 새로운 작품을 보여준다면 나는 다음 작품집에서는 빠져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려면 첫 책인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가 잘돼야 한다. 2쇄를 찍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더 잘돼서 쭉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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