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삶의 지경을 지키는 거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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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픽사베이

사진 / 픽사베이

외할머니 손에서 컸다. 외할머니와 헤어지는 꿈을 꾸면서 자랐다. 특히 전쟁이 나서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는 꿈을 자주 꿨다.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불안과 두려움이 있었던 듯싶다. 자라서도 두 마디 말을 하지 않고 살았다. ‘하기 싫어요’와 ‘할 수 없어요’다. 관계가 틀어지거나 나에 대한 평판이 나빠질까 봐서다.

나 같은 사람은 두 가지 성향을 띤다고 한다. 하나는 거부 민감성이고, 다른 하나는 착한 아이 콤플렉스다. 둘 다 맥락은 같다. 다른 사람에게 거부당할까 봐 불안해하고, 거부당하지 않기 위해 거절을 잘 못한다는 것이다. 늘 거부당하는 상황을 걱정하고, 거부당했을 때 낙담하고 우울해한다. 심하면 화를 내거나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거절하지 못했을 때도 자책하거나, 부탁한 사람을 원망하기도 한다.

이뿐만 아니다. 불편한 상황에서도 억지로 화를 참고 싫은 내색을 하지 못한다. 명령과 지시에 순종하고, 약속과 규칙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갈등을 피하기 위해 내키지 않는 양보와 사과를 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는 남이 바라는 대로 처신한다. 좋지 않은 평판에 과민하게 반응하고, 이를 위해 손해를 감수한다. 하지만 이 모두 인정받고 사랑받기 위한 몸부림으로, 버림받지 않기 위한 안간힘으로 한다. 한마디로 피곤한 인생이다.

쉰 살을 넘으며 거절하며 살겠다고 마음먹었다. 나는 거부할 권리가 있다. 거절하지 않는다고 착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거절한다고 평판이 나빠지는 것도 아니다. 때론 거절이 승낙하고 후회하는 것보다 백 배 낫다고 되뇌었다.

돌아보면 세상은 나를 수없이 거부했다. 고등학교 입시에 떨어졌고, 대학도 재수했다. 회사에 들어갈 때도 단박에 붙은 적이 없다. 지금 진행하는 KBS 라디오도 교통방송에서 씁쓸하게 물러난 뒤 한참 지나 주어진 기회다.

거절하며 살아야 한다. 거절은 내 삶의 지경을 지키고, 주체적인 결정권자로서 당당하게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수단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거절해야 할까.

첫 번째 거절의 대상은 일이다. 강의하고 글 쓰는 일을 시작하면서 강의 요청이 들어온다. 처음에는 강의 대상이나 거리, 강사료 불문하고 순서대로 받았다. 아내는 좀 가려서 받으라고 성화였다. 받아놓은 일자에 더 좋은 조건의 강의가 들어오기도 하고, 들어오는 대로 받자니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젠 거절할 것은 거절한다.

조직 생활하는 사람은 일을 거절하기 쉽지 않다. 엄연히 업무분장이 돼 있는데도 일이 선을 넘어 자신에게 흘러들어온다. 이런 일을 잘 받아주면 호인이란 소리는 들을망정 일 잘한다는 말은 듣기 어렵다. 이런 사실을 깨달은 후 나는 이런 상황이 생길 때마다 요청받은 그 일은 어렵지만 도와줄 다른 일은 없느냐고 물었다. 혹은 요청한 걸 다 들어줄 순 없지만, 여기까지는 가능하다고 말했다. 일을 거절하는 것은 그 내용과 난이도에 따라 거절하거나 수용하기가 쉽다. 내가 도울 수 있는 일과 그렇지 못한 일의 경계가 비교적 분명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인사나 금전적인 부탁이다. 이런 유(類)의 청탁은 위험까지 감수해야 한다. 두 번째 거절의 대상이다. 인사나 금전적인 부탁은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나눈다. 들어줄 수 없다고 판단하면 단호하게 거절한다. 이때 대안이 있으면 제시한다. 나는 들어주지 못하지만 누구를 만나보라거나, 이런 방법도 있다고 제안하는 것이다. 들어줄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총량 관리를 한다. 총량 관리는 대우에서 광고 업무를 하면서 배웠다. 기업 광고 담당자는 신문, 잡지 등 각종 매체의 광고 제안을 거절하는 일이 업무의 절반이다. 해당 매체가 힘이 있기에 감정 상하지 않게 거절해야 한다. 한 매체의 부탁을 들어주면 다른 매체가 벌떼처럼 달려든다. 그래서 이렇게 했다. 새해가 되면 모든 매체를 불러놓고 1년 광고예산을 공개한 후 매체별로 쓸 수 있는 금액을 배정하고, 연중 필요한 때 쓰라고 언명한다. 이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유효하다. 나는 내가 쓸 수 있는 총량을 정해 놓고 사람과 사안에 따라 안배한다. 안배 기준은 부탁을 들어줌으로써 내가 감당해야 하는 부담과 얻을 수 있는 이익 사이의 무게다. 물론 부탁한 사람과의 친소 정도도 중요한 기준이 된다.

셋째, 지나친 간섭에 ‘No’라고 말하고, 다른 의견에도 ‘아니오’라고 거절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의 생각의 맥락 속에서 산다. 다른 사람의 간섭과 의견에 순응하기만 하면 내 생각이 설 자리는 없다. 생각의 조류에 휩쓸려 조난자 신세를 면하기 어렵다.

넷째, 소박한 삶의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도 거절은 필요하다. 세상은 내게 요구하는 것이 많다. 경제적 윤택과 사회적 출세, 인기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조른다. 이에 불응하면 인생이 망가질 것처럼 겁도 준다. 이런 요구에 휩쓸리거나 타협하지 않고 내게 필요한 수준까지만 하겠다고 다짐하는 삶의 태도가 필요하다.

사람은 누구나 거절하는 입장에만 놓이진 않는다. 부탁해야 할 일도 많다. 이때 거절당하는 걸 겁내지 않는 용기가 필요하다. 고향 후배 중 영업에 발군인 친구가 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영업에 뛰어든 그는 파는 것마다 대박 행진을 이어왔다. <거절을 거절하라>란 책의 저자로 근자에는 의사를 상대로 영업하고 있는데 역시 최고의 실적을 기록 중이다. 그에게 비결을 물었다.

“처음에는 문전박대당하기 일쑤입니다. 저도 처음 6개월은 1200곳을 방문해서 2건을 성사시켰을 정도로 어려웠습니다. 그마저도 1건은 하루 만에 취소됐고요. 하지만 상처받지 않았습니다. 우선 아는 사람을 찾아가지 않으니 거절당해도 상처받을 일이 없지요. 무엇보다 나는 상품을 팔러 간 게 아니라 좋은 정보를 주러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입하지 않으면 그들만 손해라고요. 그만큼 파는 상품에 자신을 가졌습니다. 그게 없으면 팔지 말아야지요.”

후배처럼 거절을 수용하는 자세도 필요하다. 내게 거절할 권리가 있는 만큼 남의 거절도 인정해줘야 한다는 얘기다. 그래야 거절당하는 자신도, 거절하는 상대도 마음이 편하다. 무엇보다 부탁할 때는 거절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 거절당하더라도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결과를 모두 내 탓으로 돌리고,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 그렇게만 한다면 거절당하는 게 더 이상 두렵지 않고, 거절이 발전을 위한 디딤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강원국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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