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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기억하고 또 기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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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이 지켜온 ‘기억과 안전의 길’

10·29 이태원 참사가 곧 1주기를 맞이한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많은 시민이 추모의 발걸음을 이어가고 있다. 애도를 위해 사람들이 찾는 곳은 크게 두 군데다. 한 곳은 서울시청 앞에 차려진 시민분향소이며, 다른 한 곳은 이태원역 1번 출구 앞 참사 현장이다.

참사 현장에는 포스트잇과 조그마한 책상 하나가 마련돼 있다. 이곳을 방문한 시민들은 해밀톤호텔 옆 골목을 따라, 추모 포스트잇을 가득 붙인다. 몇몇은 먹을 것이나 술, 인형과 같은 추모 물품을 남기기도 한다. 우리는 이곳을 ‘기억과 안전의 길’이라고 부른다.

이태원 참사 현장 인근에 있는 편의점 사장이 내어준 휴게공간에서 시민들이 추모 메시지 분류 작업을 벌이고 있다. / 문화연대 제공

이태원 참사 현장 인근에 있는 편의점 사장이 내어준 휴게공간에서 시민들이 추모 메시지 분류 작업을 벌이고 있다. / 문화연대 제공

시민활동가들이 추모 메시지를 아카이빙하고 있다. / 문화연대 제공

시민활동가들이 추모 메시지를 아카이빙하고 있다. / 문화연대 제공

아직도 많은 사람이 기억과 안전의 길을 찾아주고 있는 만큼 벽에는 포스트잇이 쌓여 넘친다. 이 기록들이 헛되이 버려지지 않도록 10·29 이태원 참사 시민대책회의 피해자권리위원회와 문화연대에선 ‘이태원 기억 담기’라는 소모임을 꾸려 활동 중이다. 매달 두 번씩 정기적으로 기억과 안전의 길에 모여 포스트잇을 수거하고, 분류와 보관을 위한 밑 작업을 벌인다.

이태원 기억 담기에 참여하는 시민은 전업 활동가뿐만 아니라 연구자, 시인, 음악가, 대학생, 다큐멘터리 감독, 문화공간 운영자, 고등학교 교사 등 다양하다. 이들 중에는 4·16 세월호 참사 때 사회적 추모를 위해 기록 활동을 해왔던 사람도 있고, 평소 여러 분야에서 사회적 참여를 해왔던 사람도 있다.

물론 이태원 기억 담기 활동에 참여하는 모든 시민이 평소 사회 참여에 적극적이었던 건 아니다. 한 참가자는 세월호 땐 거대한 참사 앞에 무력감을 느껴 아무 활동도 못 했지만, 이번엔 어떻게든 이겨내고자 활동에 함께하게 됐다고 말했다. 다른 참가자는 너무 큰 슬픔에 차마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다가, 다른 시민들도 함께하는 활동이라 용기를 얻어 참여하게 됐다고 했다. 이렇게 용기와 위로를 나누며 매회 10여명이 참가한다. ‘이태원 기억 담기’를 거쳐 간 누적 인원이 어느덧 100여명 정도에 이른다.

서울시청 앞 시민분향소와 달리 참사 현장에는 상주하며 공간을 지키고 돌보는 사람이 따로 없다. 그런데도 공간이 쉽사리 어지럽혀지거나 더러워지는 일이 없다. 주변 상인과 지나가는 시민들이 책임감을 느끼고 같이 공간을 관리하기 때문이다.

참사 현장 바로 옆에 있는 편의점 상인은 자원활동가들이 찾을 때마다, 분류 작업할 공간을 내어주고 마실 음료도 선물해준다. 바람이 드셌던 어느 날에는 참사 현장을 지나가던 한 시민이 흩날리는 포스트잇을 모아 서울시청 앞 시민분향소까지 손수 가져다준 일도 있었다.

미안해하는 유가족, 책임 떠넘기는 권력자

자원활동가들이 수거하고 분류한 메시지가 어느덧 수만 장을 넘어섰다. 수거한 메시지를 살펴보면, 한국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 미국, 일본, 중국, 우크라이나 등 다양한 국적을 지닌 사람들이 그만큼이나 다양한 방식으로 추모에 함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말 드물게 추모와 관련 없이 정치 이야기나 종교 이야기만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애도하는 마음을 고이 담아 글을 남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거나 이에 해당하는 영어의 관용적 표현인 “Rest In Peace”라는 메시지가 가장 많다. 수거 및 분류 작업에 지칠 때면, 남들 다 하는 똑같은 말 말고 조금 더 정성스레 써줬으면 하고 생각한 적도 있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나도 처음 기억과 안전의 길을 찾았을 땐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말만 남겼더랬다. 어떤 추모를, 어떤 위로를 해야 할지 그저 막막하고 마음이 무거웠던 기억이 난다. “R.I.P.” 세 글자만 남기고 간 사람도 그때의 나처럼 똑같은 추모의 마음을 갖고 먼 이곳까지 굳이 찾아오지 않았을까.

수만 건 중에 특히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내용은 희생자의 친구와 가족이 남겨준 메시지다. 생전에 함께하며 느꼈던 행복감과 희생자가 떠나며 겪게 된 상실감, 슬픔 등 세상 모든 진한 감정들이 녹아 있는 까닭이다. 그중 하나를 소개한다.

“너무너무 미안하다. 엄마는 네가 있을 때 우리 예쁜 딸이 있을 때 제일 행복했어. 너무너무 고마웠고 너무너무 사랑했다. 사랑해 진짜 진짜. 어디에 있든 행복해야 해.”

이상하지 않은가. 정말 책임져야 할 사람들은 사과하지 않고, 정작 누구보다 가슴 아파하고 있는 사람들이 떠난 이들에게 사과한다. 왜 살아남은 우리만 사과해야 하는 걸까. 이런 메시지를 볼 때마다 슬픔과 동시에 분노를 느낀다.

한 유가족이 딸에게 남긴 미안하다는 내용의 추모 메시지(왼쪽). 지금도 이태원역 1번 출구 앞 참사 현장 벽에는 그날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포스트잇들이 빼곡히 붙어 있다. / 문화연대 제공

한 유가족이 딸에게 남긴 미안하다는 내용의 추모 메시지(왼쪽). 지금도 이태원역 1번 출구 앞 참사 현장 벽에는 그날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포스트잇들이 빼곡히 붙어 있다. / 문화연대 제공

참사 현장 정비에 공적 지원이 필요하다

참사로 인한 슬픔과 충격으로부터 회복하기 위해 사람들은 여러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참사의 진상을 파헤치기 위해 노력하고, 제도적으로 보완할 점을 찾기도 한다. 책임자의 사과를 요구하고, 생존자와 유가족의 심리상담을 진행하기도 한다. 누구는 참사 현장을 찾아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추모 메시지를 작성한다.

그동안 많은 시민이 자신의 시간과 자원을 쏟아가며 추모 메시지와 추모 물품을 정리해 왔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참여 시민의 ‘희생’을 통해서만 참사 현장을 유지하고 보수할 순 없는 노릇이다. 시민들의 참여와 노력을 넘어 관계 당국의 공적인 역할이 절실하다. 이에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와 10·29 이태원 참사 시민대책회의는 지난 8월 8일 용산구청 앞에서 이태원역 1번 출구 ‘기억과 안전의 길’ 조성을 선언하고, 용산구청에 중간 정비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과 용산 주민, 활동가들이 모여 다음의 세 가지 사항을 요구했다.

첫째, 박희영 용산구청장은 이번 참사의 최일선 책임 기관 수장이자 실질적 책임자로 분명하게 책임을 인정하고, 그 죄에 대한 책임을 져라. 둘째, 용산구청은 지금부터라도 적극적으로 대화에 나서고, 지원책을 마련하라. 참사 현장에 제대로 된 기억과 안전이 공존할 수 있도록 적극 참여하고 협조하라. 셋째, 용산구청 참사대책추진단은 적극 나서서 희생자와 피해자, 시민들의 입장에 서서 적극적인 대화와 역할, 지원에 나서라. 그러나 박희영 용산구청장은 기자회견이 끝날 때까지도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10·29 이태원 참사 1주기가 다가오고 있다. 해야 할 일은 포스트잇만큼 쌓여 있다. 한자리하고 있던 사람들은 형식적인 사과만 늘어놓았을 뿐 어느 누구도 실질적인 책임을 지지 않았다. 국회에서 이태원 참사 특별법을 신속처리안건으로 지정했지만, 아직 통과됐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있다.

참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기억하고, 또 기록해야 한다. 무엇보다 기록은 우리 사회가 무엇을 함께 기억할지의 문제와 긴밀하게 맞닿아 있을 뿐 아니라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논거가 된다.

<박이현 문화연대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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