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주머니 속 돈을 놓을 수 없는 라오메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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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세이돈과 아폴론에게 보상을 거부하는 라오메돈’(17세기경, 패널에 유채, 헌터리안 아트 갤러리 소장)

‘포세이돈과 아폴론에게 보상을 거부하는 라오메돈’(17세기경, 패널에 유채, 헌터리안 아트 갤러리 소장)

직장인들은 임금 받는 날을 가장 기다린다. 가정의 행복이 돈에 많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가난이 앞문으로 들어오면 사랑은 뒷문으로 빠져나간다는 말이 있다. 우리가 살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역시 돈 아닐까. 그런 점에서 돈은 가정의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주는 최고의 선물이라 할 수 있다.

가정의 행복을 위해 일하는 많은 노동자는 통장에 찍히는 숫자를 보면서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고 있다는 만족을 느낀다. 하지만 탐욕에 눈이 어두워 주머니에 있는 것을 움켜쥔 채 놓지 못해 남의 가정의 행복을 짓밟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세상의 눈을 등지는 이들이다.

그리스신화에서 돈에 집착해 노동의 대가를 주지 않는 바람에 자식을 죽음에 이르게 한 왕이 라오메돈이다. 라오메돈이 트로이의 왕위에 올랐을 때 아폴론과 포세이돈이 그의 종이 됐다. 종이 된 이유는 헤라와 함께 제우스에게 반항해 쿠데타를 일으킨 탓이다. 제우스는 그들의 반항을 가까스로 제압한 뒤 1년간 신의 지위를 박탈하고 라오메돈의 종노릇을 하도록 벌을 내렸다.

이에 라오메돈은 두 신에게 트로이 성벽을 쌓도록 명령하면서 성벽이 완성되면 큰 보상을 해주겠다고 약속한다. 두 신은 아이기나섬의 왕 아이아코스의 도움으로 난공불락의 트로이 성벽을 완성한다.

하지만 성벽이 완성되자 라오메돈은 그들에게 약속한 임금을 주지 않았다. 두 신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라오메돈에게 격노했다. 아폴론은 트로이에 전염병을 퍼뜨렸고, 포세이돈은 수시로 바다 괴물을 보내 트로이를 괴롭혔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라오메돈을 그린 작품이 요하임 폰 잔트라르트(1606~1688)의 ‘포세이돈과 아폴론에게 보상을 거부하는 라오메돈’이다. 파란색 옷을 입은 라오메돈이 왼손에 자루를 움켜쥔 채 어깨 뒤에 있는 남자를 곁눈질로 바라보고 있다. 그의 앞 탁자에는 돈이 가득 든 향로가 놓여 있다. 머리에 월계관을 쓰고 있는 남자는 아폴론을, 삼지창을 들고 있는 백발의 남자는 포세이돈을 의미한다. 월계관과 삼지창은 두 신을 나타내는 상징물이다.

아폴론이 라오메돈을 향해 손을 벌리고 있는 것은 돈을 달라는 것을 의미한다. 라오메돈이 자루를 움켜쥐고 있는 것은 자신의 돈을 놓지 못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탁자 위의 향로는 나폴리에 전염병이 창궐했음을 암시한다. 가득 들어 있는 돈은 두 신이 노동을 통해 받을 돈을 뜻한다.

요아힘 폰 잔트라르트의 이 작품에서 라오메돈이 입고 있는 파란색 옷은 기만을 나타낸다. 전통적으로 파랑은 기만, 가난, 질병을 상징하는 색으로 라오메돈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임을 의미한다.

돈이든 권력이든 움켜쥔다고 움켜쥘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운이 맞지 않으면 놓고 싶지 않아도 놓아야 한다. 미련이 남더라도 과감하게 손에서 날려버려야 살 수 있다.

<박희숙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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