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크리트 유토피아-대재난 후 남은 유일한 아파트 속 집단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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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면서 아파트 주민들은 외부에서 아파트에 침입하려는 사람들을 ‘바퀴벌레’라고 칭하며 이 ‘바퀴벌레’들을 도우려는 주민들도 색출해 처단한다. 대재난 직후 자멸해가는 인간군상을 시니컬하게 그리고 있는 영화다.

제목 콘크리트 유토피아(Concrete Utopia)

제작연도 2021

제작국 한국

상영시간 129분

장르 드라마

감독 엄태화

출연 이병헌, 박서준, 박보영, 김선영, 박지후, 김도윤

개봉 2023년 8월 9일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제작 클라이맥스 스튜디오

공동 제작 BH엔터테인먼트

제공/배급 롯데엔터테인먼트

롯데엔터테인먼트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를 보며 수년 전 읽은 책 한 권이 생각났다. <휴먼카인드>. 저자가 누구였더라,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뤼트허르 브레흐만이다. 책은 인간의 ‘악한 본성’을 파헤친 것으로 알려진 여러 심리학 실험의 ‘진실’을 추적한다. 예컨대 필립 짐바르도 교수의 1971년 스탠퍼드대 감옥실험(대학생들을 임의로 죄수와 간수로 나눠 역할을 부여하자, 간수 역할을 맡은 대학생들이 필요 이상의 ‘가학성’을 드러내 결국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는 결과를 보여줬던 실험. 이 실험 이야기는 영화(<엑스페리먼트>(2001)로도 만들어졌다)의 경우 한 프랑스 사회학자가 ‘팩트체크’를 해보니 실험을 생각해낸 사람은 짐바르도가 아니라 한 학부생이었고, 아무런 규칙도 없는데 자연스럽게 간수역 학생들이 가학적 규칙을 떠올린 것도 아니었다. 책에 따르면 규칙 중 상당수 역시 그 학부생이 고안해냈다. 거기다 그런 규칙이 고지됐을 때 간수역을 맡은 학생 중 3분의 2는 참여를 거부했다는 사실도 스탠퍼드 기록보관소에 보관된 문서를 통해 규명해냈다. 나머지 3분의 1조차 죄수들에게 친절하게 대함으로써 짐바르도 교수를 곤란하게 했다는 것이 책이 밝혀낸 ‘진실’이다. 요컨대 인간의 본성엔 디폴트로 ‘악(惡)’이 내재해 있다는 점을 증명해낸 것으로 알려진 짐바르도 교수의 스탠퍼드 감옥실험은 한마디로 사기극이었다는 것이 책의 주장이다.

<휴먼카인드>가 밝혀낸 심리실험의 진실

영화의 기본설정은 이렇다. 원인 미상의 대지진이 일어난다. 그냥 단순 지진이 아니라 지각이 크게 출렁거려 지상의 모든 건물이 파괴된다는 설정이다. 서울시내 대부분의 주거시설이 무너졌다. 어떤 이유인지 딱 한 곳, 언덕 기슭의 황궁아파트만 무너지지 않았다. 이제 폐허 가운데 우뚝 선 황궁아파트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사람들의 목적지가 된다. 수많은 사람이 황궁아파트로 몰려든다. 쓸데없이 허세만 부리는 그 지역구 국회의원과 비서관까지도. 이름은 거창하지만 지어진 지 꽤 된 구축아파트로 보인다. 바로 이웃에 있었지만, 집값은 더 비쌌던 드림팰리스 아파트 주민들은 대재난 이전엔 황궁아파트 사람들을 은근히 멸시하고 깔봤던 모양이다. 이제 피난처는 황궁아파트밖에 없다. 살아남은 드림팰리스 아파트 주민들도 황궁아파트에 와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필품(이미 재난으로 사회시스템은 붕괴됐기 때문에 돈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을 주는 대신, 수용해달라고 부탁한다. 앞서 짐바르도 실험, 그리고 그를 반박하는 책 <휴먼카인드>를 떠올린 건 시간이 지나면서 황궁아파트 사람들이 보여주는 가차 없는 집단광기를 영화가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홍보사 측에서 사전에 영화를 홍보하며 이 영화의 장르를 ‘블랙코미디’라고 선전했는데 영화가 후반부로 치달을수록 웃음기는 사라진다. 맞다. 마음 편히 볼 수 있는 영화가 아니다.

찝찝한 여운이 가시지 않는 영화

황궁아파트 주민들은 반복적으로 ‘아파트는 주민의 것’(이들이 제정한 강령의 제1조다)이라는 구호를 외친다. 우리만의 것이니 외부의 누구에게도 일말의 권리침범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이기적인 주장으로 치닫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파트 주민들은 외부에서 아파트에 침입하려는 사람들을 ‘바퀴벌레’라고 칭하며 이 ‘바퀴벌레’들을 도우려는, 그러니까 자신의 집에 숨겨주었던 주민들도 색출해 처단한다. 이 광기의 중심엔 아파트 주민들이 스스로 만든 대책위 위원장 903호 영탁(이병헌 분)이 있다. 영화는 주인공 격인 602호 민성(박서준 분)·명화(박보영 분)의 관점에서 이 집단광기를 그리고 있다. 그런데 민성은 영탁의 최측근이 되고, 그나마 영탁이 주도하는 권력에 저항하는 것이 간호사 출신의 명화지만 주인공 부부는 물론 영탁의 캐릭터, 그리고 자신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이탈한 809호 도균(김도윤 분)에 이르기까지 누구에게도 감정이입이 쉽지 않은 영화다. 다시 말해 영화는 대재난 직후 자멸해가는 인간군상을 시니컬하게 그리고 있다. <휴먼카인드> 저자가 밝힌 것처럼 인간-호모 사피엔스 종이 지구상 지배종이 될 수 있었던 근본 동력, 타자에 대한 친화력과 유대감은 발휘되지 못한다.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고 나서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뭔가 찝찝한 여운을 떨쳐버리기 힘들 것이다.

한국의 아파트문화 비판, 공감을 받을 수 있을까

유튜브 캡처

유튜브 캡처


재난이 일어났고, 불가사의하지만 모든 거주 공간이 파괴된 가운데 아파트 한 채만 우연히 살아남았다면? 이라는 질문을 영화는 던진다. 그후 인간군상의 행태들을 짚는 일종의 사고실험을 이어간다. 이 이야기는 과연 얼마나 보편성을 얻을 수 있을까.

한국의 주거문화 중심이 아파트로 바뀌게 된 건 대체적으로 1990년대 이후쯤일 것이다. 이른바 브랜드아파트 열풍을 일으킨 것이 ‘래미안, 당신의 이름이 됩니다’라는 카피와 함께 아파트 열쇠고리를 슬쩍 노출하는 ‘래미안(來美安)아파트’ 광고 이후쯤으로 기억한다(사진·이 CF가 대히트를 치면서 래미안아파트 이전에 삼성물산이 지은 아파트들도 이름을 래미안으로 변경해달라는 민원에 시달렸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아파트 브랜드는 거주인들의 사회적 신분과 부를 드러내는 지표가 됐다. 관련 기사들을 찾아보니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휴거’(휴먼시아에 사는 거지)나 ‘엘사’(LH아파트에 사는 사람)라는 차별 유행어가 등장한 것이 2018~2019년 무렵인 것 같은데 사실 거주 아파트 브랜드로 사람의 신분을 차등화하고 차별하는 건 지극히 한국적인 현상이다.

당장 이웃 나라 일본만 하더라도 ‘아파트(アパ-ト)’ 거주란 엘리베이터도 없는 2층짜리 허름한 건물의 단칸 월셋집에서 산다는 뜻이다(넷플릭스에 공개된 애니메이션 시리즈 <코타로는 1인 가구>(2022)에서 주인공 꼬마 코타로가 사는 집이 일본사회에서 말하는 전형적인 ‘아파트’다). 한국의 아파트에 해당하는 일본의 집단주거시설은 보통 맨션으로 통한다. 생각해보면 한국에서 아파트 열풍이 시작된 1970년대 후반이나 1980년대 지어진 아파트들만 해도 맨션이라는 이름을 많이 달고 있었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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