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교권이 아니라 시민, 노동자의 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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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구 서이초등학교 내 고인이 된 교사의 교실로 추정되는 공간 앞 벽면에 추모 메시지들이 붙어 있다. / 성동훈 기자

서울 서초구 서이초등학교 내 고인이 된 교사의 교실로 추정되는 공간 앞 벽면에 추모 메시지들이 붙어 있다. / 성동훈 기자

서울 서초구 서이초등학교 교사의 죽음은 예외적 사건이 아니다. 권리 없는 사회의 일상적 폭력이 복합적으로 축적되는 곳이 바로 학교다.

권리 없는 사회

근대의 인간관계는 권리와 의무라는 형식을 따른다. 내가 타인과의 관계에서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지에 관한 공통 규범이 공동체의 토대를 제공한다. 하지만 이런 식의 근대적 관계가 한국에 실질적으로 뿌리내린 적은 없다.

권리-의무 관계에 기초한 사회를 상상해보자. 이곳에서 권리 주장은 마땅한 것이고, 권리 침해는 무조건 부당한 것이다. 공통의 규범 위에서 각자의 권리와 의무가 세부적으로 규정된다. 노동자는 고용자에게 ‘안전 물품은 노동자의 권리이니 당신은 지급할 의무가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정시 퇴근은 권리이므로 ‘칼퇴’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는다. 교사는 부당한 요구를 하는 학부모에게 ‘당신은 그런 요구를 할 권리가 없고, 나는 그것을 수용할 의무가 없습니다’라고 답한다. 아이가 자라서 글을 읽게 되면, 권리란 무엇인지, 어린이의 권리는 어떤 것인지 교육한다.

반면 한국의 노동자는 고용자에게 안전 물품 지급을 ‘부탁’한다. 정시 퇴근이나 휴가도 권리가 아니라 ‘양해’의 대상이다. 교사는 무리한 요구를 받으면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그렇게 해드리기는 곤란합니다’라고 이해를 구한다. 옳고 그름에 대한 공통 기준이 없으니, 자신이 싫어하면 그른 것, 좋아하면 옳은 것이다. 그래서 권리 주장을 하는 대신 각자 좋고 싫음에 따라 ‘민원’을 넣는다. 정당한 요구는 물론 억지, 괴롭힘, 분풀이 따위가 모두 민원이라는 말로 뭉뚱그려진다. 권리와 의무의 세부 내용이 개인의 내면에 자리 잡지 못하니 ‘진상’과 ‘갑질’이 넘쳐난다. 판매자와 소비자, 고용자와 피고용자, 교사와 학부모, 시민과 공무원, 임대인과 임차인, 위층과 아래층 주민 등 거의 모든 종류의 사회적 관계에서 폭력과 갈등이 반복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권리 없는 사회는 민주화의 실패를 의미한다. 군사 독재 시절에는 폭력을 동반한 권위주의적 관계가 사회 전체를 지배했다. 국가기관은 시민 위에 군림했고, 학교의 목적은 국민 훈육이었다. 민주화 이후, 권위주의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려는 시도가 계속됐지만, 체계적인 권리-의무 관계에 기초한 적이 없었다. 시민과 국가기관은 기본권의 주체와 보호자의 관계로 재설정돼야 했지만, 실제로는 정말 엉뚱하게도, 고객과 서비스 제공자의 관계로 변형됐다. 교육현장의 권위주의는 약해졌지만, 행위자 사이의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권리-의무 관계를 구성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지금 학교의 문제는 단순히 ‘진상 학부모’의 존재가 아니라 부당한 요구와 정당한 요구를 구별하고 관리할 기준 자체가 없다는 사실에 있다. 결국 교육현장의 상황은 우연성에 의존하게 됐다. 운 좋게 친절한 학부모와 교사가 만날 수도 있지만, 운 나쁘게 악의를 가진 행위자가 한명이라도 있을 때는 교실 전체가 혼란에 빠진다.

교권이라는 정체불명의 언어

지금 가장 시급한 과제는 사회의 공적 영역 전체를 권리-의무 관계로 재구성하는 일이다. 교육현장도 마찬가지다. 이 작업의 가장 큰 걸림돌이 ‘교권’이라는 용어다. 이 말의 정확한 의미는 도대체 무엇인가? 교원지위법은 ‘교권 보호’를 규정하지만, 정작 교권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누군가는 교사의 ‘권위’로 이해하고 군사부일체 같은 의미를 부여한다. 학생 인권에 대응하는 ‘교사의 기본권’ 같은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교사가 자율적으로 교육 활동을 할 ‘권한’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 말의 가장 나쁜 효과는 권리와 권한 개념을 뒤섞는다는 점이다.

교사 개인은 권리의 주체지만, 기본적 권리 대부분은 교사라는 직업이 아니라 인간, 시민, 노동자라는 지위에서 나온다. 교사는 인권의 주체로서 모든 종류의 폭력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권리가 있고, 시민으로서 교육 정책 수립과 정치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 다른 모든 시민은 이러한 권리를 보호하고 존중할 의무가 있다. 교사는 노동자로서 안전한 노동환경에 대한 권리가 있고, 학교 관리자는 그러한 환경을 제공할 의무가 있다.

이러한 권리와 교육 활동에 대한 교사의 권한은 다른 차원에 속한다. 국가, 교육 당국, 학교, 학부모, 학생과의 관계에서 교사에게 어떤 자율성을 부여할지는 교육 정책의 궁극 목표를 고려하면서 민주주의적 절차를 통해 구체적으로 협의하고 정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교사의 권한과 자율성을 어떻게 규정하든, 기본적 권리를 절대적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기본적 권리의 절대성을 전제한 상태에서만 권한과 자율성을 논할 수 있다.

그동안 모두가 교권이라는 정체불명의 말에만 집착하면서 정작 교사가 인간, 시민, 노동자라는 사실은 망각하지 않았는가? 교권 보호를 외치는 사람은 많지만, 정확히 무엇을 보호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교사의 권한과 자율성을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사회적으로 합의하려는 노력이 과연 존재했는가? 이런 질문이 학교를 망치고 있는 폭력과 괴롭힘의 주요 원인을 지목하고 있지 않은가?

권리 없는 사회의 법

한국에서 사회적 폭력이 발생하면, 법 개정에 관한 주장부터 나온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공통의 규범보다 힘과 힘의 투쟁이 더 지배적인 이곳에서 법은 그런 투쟁의 도구로 전락하거나 무력화된다. 아동의 권리 보호를 위한 아동학대처벌법은 교사를 괴롭히는 도구로 활용되고, 교사를 보호하기 위한 교원지위법은 제 기능을 못 한다. 개인이 권리와 의무를 가진 도덕적 주체가 되고, 이러한 개인들이 사회의 다수를 차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법을 고쳐봐야 종이 쪼가리 위의 문장으로만 남을 것이고, 처벌과 제재를 강화해봐야 별 실효성 없이 부작용만 낳을 것이다.

지금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첫째, 교사가 가진 기본적 권리와 이에 대응하는 국가, 교육 당국, 학교, 학부모, 학생의 의무를 사회적으로 재확인하고 합의해야 한다. 둘째, 교육 정책의 궁극적 목표를 명확한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교육의 목표가 대입과 취업 준비인지, 자율적 시민의 양성인지에 관한 정치적 결정이 필요하다. 셋째, 앞의 두 가지 작업에 기초해 교육현장에 개입하는 행위자들의 권한을 세부적으로 정해야 한다. 물론 이 세 가지는 학교 공간을 아득히 벗어나는 작업이다. 교육을 비롯한 사회와 정치 영역 전체의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노력 없이는 교실 하나도 제대로 바꿀 수 없다.

<박이대승 정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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