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해곡물협정 파기에 뿔난 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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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 중부 오로미아주 멜카벨로 와레다 저지대에서 지역 농부들이 잡초를 솎아내고 있다. 주민 800만명 이상이 식량위기에 몰린 에티오피아는 최근에는 주요 곡물 수출국인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전쟁 탓에 식량위기 해결은 더욱 어려운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 성동훈 기자

에티오피아 중부 오로미아주 멜카벨로 와레다 저지대에서 지역 농부들이 잡초를 솎아내고 있다. 주민 800만명 이상이 식량위기에 몰린 에티오피아는 최근에는 주요 곡물 수출국인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전쟁 탓에 식량위기 해결은 더욱 어려운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 성동훈 기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에 아프리카 국가들의 태도는 상대적으로 냉소적이었다. 상당수 국가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어느 한 편에 서기를 거부했다. 소련 시절부터 이어져 온 러시아와의 군사·경제협력, 정권 간 거래, 서방과 제국주의로 얽힌 역사 등이 이유였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아프리카 국가들의 서방 식민지배 역사에 대한 반감을 러시아에 대한 지지로 연결시키고 나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은 ‘서방에 맞서는 전쟁’이라고 정당화하는 외교전을 펼쳐 왔다. 7월 27~28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리는 제2회 러시아·아프리카 정상회의는 러시아의 대아프리카 외교 성과를 자랑하는 무대가 될 예정이었다.

러시아·아프리카 정상회의에 불참

푸틴 대통령의 구상이 어긋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러시아의 흑해곡물협정 파기 선언 때문이다. 아프리카 국가 정상들은 기아와 식량난을 심화시킬 결정을 두고 여러 아프리카 국가들이 러시아에 반감을 공개적으로 표출해 정상회의에 불참했다. 바그너 그룹의 반란 역시 아프리카 국가들의 고민에 무게를 더하고 있다.

유리 우샤코프 러시아 대통령 외교담당 보좌관은 7월 26일(현지시간) 제2회 러시아·아프리카 정상회의에 아프리카 정상 21명이 참석한다고 밝혔다. 이는 2019년 열렸던 제1회 러시아·아프리카 정상회의에 참석했던 정상 45명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규모다. 나머지 국가에서는 장관이나 고위공무원이 참석할 예정이다.

전쟁 중에도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을 보장해 온 흑해곡물협정은 러시아의 연장 거부로 지난 7월 18일 종료됐다. 러시아는 자국 농산물과 비료의 수출 보장 약속이 이행되지 않는다며 곡물협정의 종료를 선언했다.

아프리카 55개국 연합체인 아프리카연합(AU)은 러시아의 흑해곡물협정 중단에 유감을 선언했다. 무사 파키 마하마트 AU 집행위원장은 7월 19일 흑해곡물협정 중단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서 곡물과 비료가 아프리카와 같이 필요한 곳으로 안전하게 다시 운송될 수 있도록 당사자들이 문제를 해결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러시아는 지난 7월 24일에는 다뉴브강을 사이에 두고 루마니아와 마주보고 있는 우크라이나 레니의 곡물창고를 공격했다. 다뉴브강은 전쟁으로 흑해를 통한 곡물 수출이 여의치 않게 된 우크라이나의 대체 수출 경로였다.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곡물의 상당량이 아프리카가 아닌 다른 나라로 향하며 흑해곡물협정이 애초 목적과 달리 미국과 유럽의 이익을 위해 쓰였다고 비판했다. 러시아가 아프리카 국가들에 비료, 식량 등을 무상으로 제공할 것이라고도 강조했다.

흑해곡물협정을 통해 수출된 우크라이나 곡물이 가장 많이 향하는 곳은 실제로 아프리카가 아니다. 유엔에 따르면 흑해곡물협정으로 우크라이나가 지난해 7월 이후 수출한 곡물은 3290만t 가운데 4분의 1 이상인 796만t이 중국으로 향했다. 이어 스페인, 튀르키예, 이탈리아, 네덜란드, 이집트 순이다. 수출량의 44%가 부유한 국가로 분류된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72만5000t을 세계식량계획(WEF)에 제공한다. 중국 수출량의 10분의 1 수준이지만 우크라이나는 1t 기준 WEF 최대 공여국이다. WEF의 지원을 받는 나라는 에티오피아, 아프가니스탄, 예멘, 지부티, 케냐, 소말리아, 수단 순이다. 이 때문에 흑해곡물협정 중단은 아프리카의 기아 문제를 심각하게 만들 것이라는 예고가 나오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이 러시아의 흑해곡물협정 파기로 인해 곡물가가 최대 15% 상승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러시아가 뒤통수를 쳤다”

국제 구호단체와 인도주의 단체도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전 세계적으로 구호 수요가 많아지면서 시리아 난민 지원 규모를 줄이고 있다. 수단 내전과 수년째 계속되는 극심한 가뭄으로 난민이 대거 발생하고 있는 동아프리카의 타격이 클 것으로 예상된다. 케냐 외무부는 러시아의 흑해곡물협정 파기 선언을 두고 “뒤통수를 쳤다”고 비난했다.

첫 단추가 꼬였지만 러시아는 제2회 러시아·아프리카 정상회의에서 러시아와 아프리카의 관계 재구축을 논의할 방침이다. 문제는 실제 러시아가 아프리카 국가들을 대대적으로 지원할 힘이 있느냐 여부이다.

푸틴 대통령은 제1회 러시아·아프리카 정상회의 당시 아프리카와의 연간 교역 규모를 5년 안에 158억달러에서 400억달러로 두 배 이상 늘리겠다고 약속했으나 2021년 교역 규모는 177억달러에 불과했다. 같은 기간 유럽연합(2950억달러), 중국(2540억달러), 미국(837억달러)의 아프리카 교역 규모와 비교하면 매우 적은 수준이다. 아프리카에 대한 러시아의 인도주의적 지원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러시아와 아프리카 국가 간 협력은 ‘군사·안보 협력’에 치중돼 있었다. 아프리카 권위주의 국가에서는 러시아산 무기 수출과 바그너 그룹 등 민간군사기업을 통한 군사력 제공 등의 협력이 이뤄져 왔다. 그러나 지난달 바그너 그룹이 반란을 일으켰다 와해되면서 안보 협력이 예전만큼 이뤄질 것인지도 미지수다. 오히려 아프리카가 덩달아 불확실성에 빠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워싱턴포스트(WP)가 최근 미 국방부 유출 문서 등을 토대로 정리한 내용을 보면, 바그너 그룹은 아프리카 13개국에서 현지 정권과 결탁한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이들이 전투, 훈련, 정권 수호 등을 군사적 기능을 직접 제공한 국가만도 리비아, 수단, 모잠비크, 리비아, 말리, 중앙아프리카공화국(중아공) 등 8개국이며, 이밖에도 정치적 조언, 정보 작전, 물류와 경제 등에도 개입했다. 중아공과 말리, 리비아에선 군사, 정치, 경제 등 모든 영역에서 폭넓게 활동했다.

바그너 그룹은 정치·경제·안보를 혼합한 비즈니스 모델을 활용해왔다. 정권을 수호하는 대가로 상업적 대가를 받는 식으로,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서의 활동이 대표적이다. 바그너 그룹은 반란 중단 이후 중아공에서 철군한 것으로 확인됐다.

바그너 그룹이 단순 용병 조직 이상으로 정치·경제·안보에 깊숙이 개입한 만큼 이들에 의존한 아프리카 국가들 또한 더욱 취약해질 가능성이 있다. 오마르 투레이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ECOWAS) 위원장에 따르면 올 상반기 서아프리카에서 테러로 사망한 사람은 4593명에 달한다. 부르키나파소에서 2725명, 말리에서 844명, 니제르에서 77명, 나이지리아에서 70명이 사망했다. 말리의 경우 러시아와 가까워지며 반프랑스 감정이 일었고, 2013년부터 질서 유지를 목적으로 주둔했던 프랑스군이 끝내 철군했지만, 바그너 그룹을 앞세운 러시아가 제대로 된 치안을 제공해주지 못했다고 한다.

말리의 한 정치평론가는 “모두가 두려워하고 있다. 러시아에서 일어나는 일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리란 점을 모두가 안다”고 WP에 말했다. ‘서방 제국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와 손을 잡았던 아프리카 국가들에 러시아와의 협력과 의존은 또 다른 함정이 돼 있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러시아와 아프리카 국가 간 관계를 안갯속으로 몰아가고 있다.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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